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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45화 (45/127)

# 45

“제 아무리 강해도 죽을 겁니다. 만년한철로 이뤄진 벙커라고요. 산산이 무너져서 지하 깊숙이 매몰되면 탈출도 못 할 겁니다.”

죽림의 이시백이 대답했다. 그는 헌터회의 부회장으로 유지미에게 오랜 기간 구박을 당해왔다. 스트레스가 극심해 정수리에 원형탈모까지 생기고 있었다. 더 이상 머리털을 죽일 순 없었다.

“지하벙커의 곳곳에 북한출처의 핵들이 있다. 만년한철 정도는 충분히 뚫고 저들을 묵사발로 만들겠지.”

빌런의 한진수가 덧붙였다. 벙커의 핵들은 정계의 인력들이 배신 할 때를 대비해 미리 설치해둔 핵이었다.

제 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인간이라면 핵 앞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확실한 결과는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김강호가 물었다.

“터뜨릴까?”

“하세요.”

“해.”

유지미가 죽으면 이제 세상은 그들의 것이 된다.

김강호는 죽은 아내 최유미를 떠올리며 폭파버튼을 눌렀다.

* * *

쿠르르릉!

지진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기어코 천장이 무너졌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대처할 틈이 없었다.

벼락같은 소리가 연이어 몰아치고 천장의 만년한철이 쩌저적 갈라지더니, 거미줄 같은 틈새에서 거대한 화염과 흙먼지가 동시에 쏟아졌다. 나는 무너지는 벽들에 갇혀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온몸이 몸살에 걸린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설마 이게 함정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내 우둔함을 탓하며 주변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수면제를 먹은 듯 정신이 몽롱해서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수마에 빠져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파도처럼 수차례 넘실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훅 들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만년한철과 흙에 먹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가슴 위부터 여유 공간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하아···. 이러면 망한 건데.”

다행히 말은 나왔다. 일을 조용히 처리할 생각으로 온 것이 번뜩 떠오르자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개의치 않고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유지미는 어디 있을까?

잔해더미에서 오른팔을 상체까지 꺼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벙커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그녀도 나와 함께 있었다. 이 거대한 폭발에 분명 휘말렸을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왼팔까지 가까스로 빼내자 공동전체가 흔들거렸다. 나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생각보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재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도 반쯤은 미쳤구나.”

두 팔의 운신이 자유로워지자 나는 손을 더듬어 여유 공간의 넓이를 예측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간은 꽤 넓었다. 팔을 끝까지 뻗었음에도 끝자락에 닿지 않았다.

“어!”

그런데 팔을 쭉 뻗어 만세 자세를 취했을 때 무언가 만져지는 게 있었다. 처음엔 놀라서 급히 팔을 당겼지만 천천히 다시 만져보니 부드러웠다.

주변에 털 같은 게 수북했고 중간쯤엔 어떤 구멍이 있었는데 손을 넣자 굉장히 축축하고 따뜻했다. 홀린 것처럼 그 구멍에 손가락을 깊숙이 넣으니 음성이 들려왔다.

“하으으읏······.”

누군가가 교성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 입술이었나.

나는 유지미의 이빨과 콧구멍, 눈두덩까지 만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대체 입을 왜 벌리고 있는 거냐. 그녀도 방금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사지가 먹힌 채 얼굴만 배꼼 내민 처지인 듯했다.

“주은성······.”

유지미가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상태가 더 나쁜 것 같았다. 의식도 없는 것 같았는데 능력치가 나보다 2배가량 낮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나는 바지의 호주머니에서 아공간을 꺼냈다. 빼낸 오른팔의 틈새가 오밀조밀 절묘하게 공간을 만들고 있어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공간에서 비상용 전등을 꺼내 공간을 밝게 비추고 힐링 포션을 꺼내서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입 안에서 자꾸 피맛이 나고 코피가 흘렀지만 견딜만했다. 머리의 열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아서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이거 잘못하면 무너지겠는데···.”

피부에서 가려움이 느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햇살 아래의 고드름처럼 피부가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찢어진 옷의 틈새로 누런 고름과 혈흔이 가득했다. 상처감염 때문에 이런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으으, 따가워.”

보이는 상처에 힐링 포션을 붓고 탈출할 궁리를 떠올렸다. 다행히 아공간에는 미처 꺼내지 못 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나는 아공간에서 아이템들을 꺼내 틈새의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대검과 장검들을 쭉 넣어 지지대로 만들고 상체를 살짝 빼내니 다행히 공동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들을 털어 붓고 그것들을 제물삼아 완전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흐으으···.”

몸을 일으켜 쳐다보니 유지미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잃은 채 눈을 뜨지 못 하고 있었다. 팔자 참 늘어졌네. 나는 그녀의 입에 거칠게 포션을 붓고 뺨을 난타했다.

“야. 이봐, 일어나.”

그제야 유지미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쓰읍, 뭐야···.”

꿈이라도 꾸고 있었나.

“뭐기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자살공격이냐?”

“아······ 아냐.”

“아니긴.”

“지금 이건······ 나도 당했어.”

상황을 파악한 유지미가 씁쓸하게 웃었다.

“후우···, 설마 키우던 놈들에게 물릴 줄이야.”

초연히 말하는 그녀도 나처럼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감회에 젖으려는 그녀의 이마를 철썩 때리고 물었다.

“그래서 회귀 스킬은 어떻게 얻는 거냐?”

그녀는 피를 한 움큼 토하더니 나를 노려봤다.

“이런 상황에서 조차 너는···.”

“빨리 말해.”

“···난 지쳤어.”

“무슨 개소리야, 자꾸. 내가 더 지쳐.”

“하아. 넌 신 같은 게 아니었군.”

유지미는 계속 말을 아꼈다. 짜증나서 발로 머리를 후려쳤는데 그녀의 입에서 선지 같은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쿨럭, 헉, 헉.”

“야. 아직 죽으면 안 되지.”

놀란 나는 포션을 따서 강제로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버둥거렸다.

“크, 크읍, 흐으읍··· 그, 크허업, 그만!”

“이제 좀 살 것 같나?”

“흐으으···.”

“죽을 때 죽더라도 아는 걸 다 말하고 죽어.”

유지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그 눈빛은 꼭 산 자의 회광반조처럼 더 없이 맑고 진지했다.

그러더니 한숨만큼 긴 얘기를 토했다. 나는 다그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잠자코 들었다.

별 건 없었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또,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말했다.

그녀는 영웅이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지쳤다. 회귀 때마다 삶은 변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처음엔 노력했다. 자신이 세상을 구할 운명은 아닐까.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회귀 스킬을 얻게 된 그녀는 이따금씩 운명을 믿었다. 그리고 마왕을 봉인하고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다시 시작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상은 다시 멸망했다. 몇 번을 시도해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멸망시켰다.

저마다 성장의 끝자락에 도달하자 개개인의 능력은 엄청나게 커졌고, 방향성 없는 거대한 힘들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을 선별해서 키우고 살려야 했어.”

“유사국가가 그런 이유였나?”

“아니면 세상이 더 빨리 멸망해.”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비쳤지만 내겐 면죄부를 받으려는 듯 변명하는 것처럼 보여서 가증스러웠다. 동시에 그녀가 내 대역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위선자. 회귀 스킬은?”

이번에는 발로 차지 않았다.

“무법지대의 어딘가에 소원석이 있어.”

“소원석?”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야. 나는 회귀를 빌었거든.”

“그게 어디 있는데?”

“회귀를 할 때마다 매번 모든 것들의 위치가 바뀌어.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사람이 소원석을 얻을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찾기도 힘들고 시련도 있어. 심지어 소원을 쉽게 이뤄주지도 않아. 내가 가진 회귀 스킬마저 사용에 조건이 있는 걸.”

그녀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 툭 내뱉었다. 나는 유적을 얻었을 때를 기억해냈다.

유지미가 말했다.

“난 이제 틀렸어.”

그녀는 나를 쳐다보더니 또 피를 토했다.

“솔직히 조금 기뻤어.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동안 싱글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거든. 목적마저 없었다면 진작 미쳐버렸겠지.”

“넌 이미 미쳤어.”

나는 그녀의 머리를 찼다. 그녀는 웃었다.

“최유미가 이런 마음이었나. 그래서 내게 소원석을 양보했구나.”

“무슨 소리야?”

“내 가슴팍에 아공간이 있어. 거기에 내가 추린 인원들과 사람들의 명단이 있을 거야.”

“명단? 그게 뭐?”

“사실 네가 원하는 소원석의 정보도 있어.”

나는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집어 넣었다. 물컹한 젖가슴을 지나쳐 둔덕의 정점을 꼬집다보니 그녀의 말대로 배꼽을 가기 전, 손바닥 크기의 아공간이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숨겨두는 거냐.

아공간 안에는 갖가지 아이템들과 종이로 써진 명단, 그리고 지도가 있었다.

유지미가 말했다.

“명단의 사람들··· 모두 죽여줘.”

“싫다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게 포탈을 열어줄게.”

그녀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했다.

“포탈? 그냥 부수고 올라가도 될 것 같은데.”

“핵폭탄이 터졌어. 만년한철들을 부수고 올라가면 차폐막 안쪽에 방사능이 흘러들 거야.”

그녀는 또 선지 같은 피를 토해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피부가 분화구처럼 솟아오르고 누런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넌 방사능을 못 버티는 군.”

“그래.”

그녀는 확실히 나보다 약했다. 나와 달리 레벨 제한이 정해져 있는 만큼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포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포탈을 열더니 최후의 숨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난 이제 쉴 거야.”

나는 그녀의 뜻을 존중해 그녀의 머리를 깨부수고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번뇌 길드의 사무실이 나왔다. 아직 사람의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은 것 같았다. 벙커의 위치를 되새긴 나는 천마비행술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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