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그 놈의 혈연, 학연, 지연··· 소름 돋는다.”
한편으론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죽기 직전까지 성씨를 이용한 친목 도킹이라니.
이후로 나는 정계인사들을 모두 죽이고 환경부장관을 찾아갔다. 그는 검소하고 과묵했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구하니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유지미가 죽고 헌터회가 전멸했다는 겁니까?”
전해줄 건 다 전해줬는데 그것 밖에 듣지 않은 듯했다.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유지미를 죽인 겁니까?”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저들끼리 싸우다 내분으로 죽었어요.”
마지막에 머리를 깨부순 건 내가 맞지만 치명타는 핵폭탄이었다.
“허어어··· 유지미가 죽었다니! 헌터회가 전멸했다니···!”
앉은 자세로 공중제비를 돌려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문득 유지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왕을 죽여도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다. 사람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세상의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혹시 그녀가 같은 족속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예고편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은애가 끼어들었다.
“이제 장관님께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셔야하고, 60일 이내에 선거를 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해요.”
“허어···.”
환경부장관은 감탄 같은 숨을 훅 들이키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초인적인 감각으로 그를 뜯어보니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는 그 옛날, 광복을 맞은 식민지의 지식인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되찾은 들에도 꽃은 피는가!”
시적 감성이 참 충만한 사람이군.
나는 대화를 나눈 끝에 그에게 내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처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유지미처럼 권력실세로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누가 봐도 악법으로 보이는 몇몇의 법들만 좀 없어졌으면 싶었다.
“허어, 요청하신 사항들은 처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환경부장관이 체통을 되찾고 말했다.
“많이 걸린다고요?”
“예에. 입법절차가 있듯이 위법을 폐지하는 삭제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대부분의 자리들이 공석이다 보니 혼란스러운 것들이 제자리를 잡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요?”
“개인적인 견해로는 최소 세 달 정도 걸릴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나는 콧등을 찡그렸다.
“세 달이나 걸릴 리가 없을 텐데?”
“삭제와 수정을 요구하신 법들은 모두 유지미에 의해 만들어진 법들이지만, 대부분 기득권 계층에 유리한 법들입니다. 특히 사회유지법의 경우 대놓고 상위계층에 유리하고 하위계층을 억압하는 차별적인 법이죠. 그러니 법률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찬성해줄 리가 없습니다. 떡을 줬다가 갑자기 뺏는 식이니까.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뭐요?”
“말씀하신 법들이 완전히 삭제되긴 힘들 겁니다.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에 법이 삭제가 되고 나서도 다른 법으로 그 효력이 지속될 수도 있고, 또······.”
질척질척했다. 유지미와 그 수족들은 죽었지만 잔당들은 남아있다는 소리다.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서 곧바로 말했다.
“3일 드릴게요.”
그러자 환경부장관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아니, 3일이라니··· 3일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최소한 세 달은 필요합니다!”
“세 달이면 내가 수원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고 법을 고쳐도 될 법한 기간이에요. 그간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힘 있고, 땅 있고, 돈 있고, 민중의 지지가 있으면 누구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던데, 아닙니까? 그런 세상 같던데?”
물론 귀찮게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중세시대의 노예처럼 결코 우둔하고 수동적이지 않다. 멍청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힘이 없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잠자코 보고만 있는 것이다.
생리욕구과 안전욕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현재, 당장 대한민국보다 혜택이 좋은 선진국에서 이민권한을 부여해준다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 나라로 이민을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내가 나라를 세워서 기존의 틀을 유지한 채 무상주택, 무상급식, 무상지원 등 3무상 정책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모은다면 많은 사람들이 좀비처럼 몰려들 것이다.
나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고, 이들은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고, 번거롭고, 귀찮다는 이유가 컸다. 그 외엔 걸리는 게 없다.
재물을 써서 이들보다 법을 잘 알고, 똑똑하고, 공명정대하며 능력 좋은 사람들을 내세워 정통성을 잇고 다시 민주주의를 시작하면 된다. 그뿐인 것이다.
“나는 유지미 같이 나라를 휘어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럴 능력은 충분하지만, 식견이 부족하고, 권력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누가 봐도 부당해 보이는 건 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똥은 굳이 손가락으로 찍어 먹지 않아도, 심지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두 눈으로 보기만 해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부당하게 누린 게 많은 뻔뻔한 자들은 꼭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알면서도 고집을 피운다.
나는 그저 더러운 똥을 치우고 모두가 깨끗한 곳에서 살길 원한다. 지극히 합리적인 요구인 것이다.
“하, 하지만 멋대로 일을 강행한다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할 겁니다.”
“일부 사람들이 싫어하겠죠. 그거 느그법이잖아요.”
“서, 선생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에 규칙과 절차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걸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스템 안에서는 시스템을 바꾸는 게 힘들지만 시스템 밖에서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너무도 쉽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3일 뒤까지 처리가 안 되면 그냥 몰살 엔딩으로 가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정계인사들이 괜히 죽은 게 아니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일행들을 데리고 다짜고짜 건물을 나섰다.
환경부장관이 뒤에서 다급히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 * *
3일 뒤 대통령부터 각종 인사들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유일한 생존자인 환경부장관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다. 죽은 이들의 사인은 내가 요구한 대로 몬스터 사고사가 됐다.
동시에 사회 각층의 각종 비리가 수면위로 떠올라 가시화 되고 사회유지법을 비롯한 이해할 수 없는 법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안 된다고 하더니 결국 됐다. 결국 지들 마음대로인 것이다.
“하, 웃긴 세상이야.”
나는 휴지를 데리고 5성급 고급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호텔식당에는 나와 휴지밖에 없었는데 오늘 잡힌 약속 때문이었다.
“맛있어!”
휴지가 스테이크를 덩어리째 삼키며 웃었다.
“꼭꼭 씹어서 먹어. 누가 고기를 물마시듯이 그렇게 먹어.”
“하지만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걸.”
정부에서 잡아준 식당답게 나온 요리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맛있었다. 싼 게 비지떡이고, 비싼 게 찹쌀떡이란 말처럼 가격이 비싸니 맛도 좋은 것이다.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한 입 먹고 슬쩍 메뉴판을 살펴보니 밖에서는 1.5L에 3천원도 안 할 콜라 따위의 음료가 500ml에 2만원이었다. 일반 서민은 큰 축하잔치가 있어도 좀처럼 오기 힘든 곳이었다.
“주은성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메인요리를 다 먹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정부사람들이 찾아왔다.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새로 내정된 장관급 인물과 그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왔다.
“차폐막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악법의 삭제 외에도 유적에 있는 아이템들을 모두 옮기기 위해 판문점에 있는 이중 차폐막을 한시적으로 걷어주길 요구했었다. 지금처럼 하루 두 번만 개방해서는 아이템을 모두 옮기는데 답이 없었다.
“여전히 기술 부족으로 불가능합니다.”
장관급 사내가 말했다.
“해결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기한은 딱 오늘까지인데 설마 인정을 베풀라는 말은 아니겠고······.”
내 말에 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말을 이었다.
“이중 차폐막은 건드리기가 애매합니다. 그래서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기에 그것을 제시해드리기 위해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격식을 차리다보니 간소화해도 될법한 일도 꼭 대면보고를 했다. 물론 받는 입장의 나는 기분만 좋다. 나는 접시를 거두고 비서가 건넨 서류철을 받았다.
“땅굴?”
“네. 땅굴입니다. 아무리 알아봐도 가장 빠른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정부에서 제시한 방법은 대격변 이전에 북한군이 파놓은 땅굴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땅굴이 아직도 있어요?”
“찾아보니 두 곳이 있었습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그럼 지금까지 몬스터가 들어올 수 있는 구멍을 그대로 나뒀다는 것 아닌가.
“몬스터는?”
“땅굴 안쪽에 고블린과 코볼트 따위의 몬스터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안전합니다.”
“그래요? 흠······.”
내키지 않았지만 믿기로 했다. 실수를 하면 목이 날아간다는 걸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목이 날아간다는 뜻이다.
“그럼 유적의 아이템들은 모두 옮겨서 제 동생 길드에 전해주세요.”
“실버스타 길드 말씀이십니까?”
“예. 아랑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자 정부인사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휴지는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베어 물며 물었다.
“주인.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말해.”
“왜 모두 다 안 죽이고 일부 사람들은 살려둔 거냐?”
그녀는 이제 내가 법 위에 있다는 걸 안다. 그녀가 묻는 건 환경부장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은 교과서에서나 존재할 법한 사람이었다.
“완전히 깨끗한 사람은 없어. 그냥 인간답게 적당히 무고하면 봐주는 거지.”
“그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는 해. 하지만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게 저마다 다르거든. 천성과 본질의 문제야. 실수가 오히려 사람을 성장시킬 수도 있는 거지.”
“흐응.”
휴지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개똥철학이고 그걸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넘어지려는 몸에 지팡이를 대주는 정도로 만족해. 남은 것들은 시스템 안의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지.”
나는 할 만큼 했다. 남은 것들은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
식사를 끝낸 나는 휴지를 타고 판문점의 무법지대 입구로 향했다. 오랜만에 탄 휴지의 등은 여전히 따뜻하고 폭신했다.
나는 널문다리를 건너 무법지대로 향하면서 유지미에게서 받은 그녀의 아공간을 확인했다.
아공간 안의 살생부는 벌써 주아랑에게 넘겨줬고 남은 것은 소원석의 정보가 담긴 지도와 그녀가 남긴 일기장이었다.
나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시스템 안에 갇혀서는 결코 시스템 자체에 대항할 수 없다. 설혹 대항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승패가 정해져 있지 않은 가시밭길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결코 우물 전체를 볼 수도 없고, 우물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힘들은 신에게서 받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힘을 가지고 어떻게 신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간 너무도 막연했다.
나는 문제의 해답을 마왕을 비롯한 악의 세력들과 성검과 마검, 천마신공 등 각종 에픽 급의 아이템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해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유지미가 남긴 일기장을 꺼내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