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49화 (49/127)

# 49

<회귀자의 기록물.>

일기장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첫 문구였다. 일기장은 그녀가 직접 기록한 게 아닌 회귀의 부가적인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두꺼운 일기장이 남아 있는 거겠지.”

“무슨 일이냐, 주인?”

휴지가 물었다.

“아니. 앞으로의 여정을 좀 확인 하려고. 몬스터가 나오면 말해.”

“알았다.”

“혹시 모르니까 사람이 다가와도 말하고.”

“응.”

나는 휴지를 세워두고 다시 일기장을 펼쳐서 집중했다.

일기장엔 내가 부재한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과 그녀가 회귀를 하면서 겪은 일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나는 빠르게 속독했다. 이런 건 소설로 치면 외전에 써야할 내용이었다. 내게 필요한 내용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일기장의 내용대로라면 유지미가 나서기 전 최유미가 먼저 세상을 구했고, 그녀는 지쳐서 유지미에게 소원석의 비밀과 회귀에 대한 비밀을 알려줬다고 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당연 소원석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소원석.’

소원석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소원을 들어주는 아이템. 내가 주목한 것은 소원석이 신이 남긴 아이템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나는 그 옛날 아르카디아에서 요정에게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신이라는 놈이 이런 문제를 왜 다른 차원에서 온 나한테 맡겨? 그냥 자기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세계의 균형 때문이에요, 용사님. 신께서는 균형 탓에 직접 움직이실 수가 없어요.

-허울 좋네. 간판만 신이잖아.

-비아냥거리시면 안 돼요. 신께서는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항상 불철주야 노력 중이시라고요!

요정은 아르카디아의 사람들에게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는 것조차 ‘세계의 균형’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선이 있어야 악이 있는 것처럼, 마왕이 있기에 용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신이라는 존재가 절대의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이라는 존재마저 어떤 규칙에 의거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회사를 운영하는 직원처럼.

사장은 따로 있고 그저 관리를 맡고 있는 바지사장처럼 말이다.

그런데 소원석은 그런 내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회귀마저 가능한 아이템. 그들이 말하는 세계의 균형과는 거리가 먼 아이템이었다.

-소원석으로 어떤 소원이든 빌 수 있다. 그러나 단 한번만 가능하고 대가를 바쳐야 한다. 소원이 클수록 대가도 크다.

나는 유지미가 했던 말과 일기장의 내용을 토대로 소원석에 대한 정보를 종합했다. 그녀에게서 얻은 지도를 펼치자 지구를 평평하게 편 듯한 세계지역전도가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지도의 곳곳에는 유지미가 표시해놓은 마크가 있었다. 보라색이 네 개. 빨간 색이 수십 개였다.

“아마도 보라색 쪽 중에 소원석이 있겠지.”

게다가 지도에 표시만 해놓고 소원석을 선점하지 않은 걸 보면 소원석의 획득에 또 다른 조건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목적지를 가장 가까운 보라색 마크로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보라색 마크 두 곳이 거의 근접하고 있었는데 한 곳은 한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백두산이었다.

“휴지.”

“왜.”

“이제 출발하자.”

“알았어.”

휴지가 어부바자세를 취하자 나는 그녀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데 팔에 내려앉는 커다란 가슴의 촉감이 좋았다.

“도착하면 깨워.”

“응.”

나는 자동모드로 운전해놓고 잠에 빠져 들었다.

* * *

“크오오오!”

덩치도 크고 키도 컸다. 새하얀 털의 설인이 눈바람을 맞으며 고릴라처럼 제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뻐억!

그러나 내 주먹에 가슴이 뻥 뚫리고 털썩 쓰러졌다. 화려한 등장과 달리 허무한 죽음이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면전의 설인을 죽이고 뒤에서 엄습하는 또 다른 설인을 연이어 죽였다. 옆에서 얼음 같은 주먹이 다시금 엄습하자 가뿐하게 피하고 반격했다. 내 로우킥에 놈의 두 다리가 부서졌다.

“크워어어억!”

“시끄러.”

폴짝 뛰어 주먹으로 두개골을 깨부수자 뇌수가 쏟아지고 뜨거운 김이 훅 솟구쳤다.

벌써 몇 번째 전투인지 모르겠다.

나는 능력치를 투자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긴 정말 굉장한 곳이네.”

날아가면 편했겠지만 추운 날씨 탓에 휴지가 앓는 소리를 내서 더는 날 수 없었다. 대류권을 돌파해서 성층권에서 날면 따뜻하다는데 그러면 왠지 목적지를 잃을 것 같았다.

“우주방사능 같은 것도 영향을 받으려나?”

“무슨 소리야?”

“아냐.”

그래서 우리는 양강도에 있는 북포태산쯤부터 걸어가기로 했다. 북포태산은 백두산 아래에 위치한 산이었다. 양강도 자체가 아직은 인적이 드물어서 사람이 없었고 그 대신 몬스터가 많았다.

덕분에 예정에도 없는 사냥 타임이다.

“확실히 마왕이 있는 곳 근처다보니 몬스터 수준도 강하네. 금방 만렙 찍겠어.”

“주인.”

“왜.”

“여긴 너무 춥다.”

휴지는 연신 입김을 불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 멀리 설산이 있고 앞으로는 눈이 소복하게 덮인 둔덕과 평야지대가 있었다.

함경남도의 개마고원을 지나가면서 느낀 건데 한반도의 북쪽 지방은 엄청나게 추웠다. 겨울의 북부지방은 칼바람이 부는 살얼음 길과 같았다.

“너 냉기 속성의 하프 드래곤 아니었냐?”

“맞는데. 인간 형태로는 버티기가 힘들다.”

체력 능력치가 높은 나도 조금은 공감했다.

휴지가 칭얼거렸다.

“여긴 내가 살던 곳보다 더 춥다. 아까 오줌을 쌌더니 오줌이 바로 얼었다.”

“크흠.”

인간형태의 그녀는 본체의 모습보다 모든 면에서 약했다. 그래서 더 추위를 타는 것일 지도 몰랐다.

“많이 추워?”

“이대로라면 산채로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주인.”

그녀는 마법으로 모닥불을 만들고 앉았다.

“그리고 배도 고파.”

나는 방금 사냥한 설인들을 가리켰다.

“저거 구워 먹을래?”

“몬스터는 맛없어.”

“예전에는 잘만 먹었잖아.”

“그치만 이젠 맛없는 걸. 더 이상 평범한 걸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몸이 돼 버렸어.”

문명의 혜택이 이래서 무섭다. 한 번 적응하면 금방 중독돼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된다.

휴지가 입술을 내밀고 입맛을 다셨다.

“따끈따끈한 호빵이 먹고 싶어.”

소환수의 감정이 그대로 공유되는 만큼 그녀의 기분이 다운되면 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나는 아공간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그녀에게 두껍게 입히고 없는 호빵 대신 핫바를 꺼냈다. 식량은 편의점에서 충분히 준비해왔다.

“이제 안 춥지?”

“응. 고맙다, 주인!”

내가 앞장서자 휴지가 부모를 따라다니는 새끼오리처럼 내 뒤를 따랐다. 그녀는 항상 먹을 걸 쥐어주면 얌전해진다. 단순한 성격이다.

“이제 소원석이 어디 있느냐는 건데.”

설인들의 시체를 지나치고 다시 걸었다. 휴지를 안고 천마비행술로 술술 날아가니 백두산 천지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휴지를 남겨두고 다시 도약했다. 공중에서 탐색스킬을 사용하자 수많은 생명체들이 단숨에 파악됐다. 하지만 지난번 유적을 찾았을 때처럼 영롱한 빛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너무 많아.”

넓게 퍼진 생체반응들이 거슬렸다. 공중에서 탄지공을 사용해 몇 마리를 죽였지만 그래도 수가 많았다.

에이, 그럼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지.

나는 탐색스킬을 사용해서 탄지공을 수십 차례 날렸다. 새하얀 빛의 섬광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어디서 화살이 날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나는 날아온 화살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조준을 하고 쐈는지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를 맞았을 것 같았다.

“화살···?”

순간 내 눈이 반짝였다. 나는 땅으로 내려와 휴지를 안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었다. 10초도 걸리지 않아서 도착하자 푸른 머릿결을 휘날리는 뾰족한 귀의 종족이 보였다.

엘프? 엘프가 왜 여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반가움이 먼저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서리 엘프 종족이다, 주인.”

휴지가 말했다.

“서리 엘프 종족?”

“나와 마찬가지로 마왕이 넘어올 때 같이 넘어온 놈들이다.”

“거참 다양하게도 왔네.”

“전쟁은 기회라는 마왕의 꼬드김에 홀린 종족이 많았다.”

휴지를 내려주고 엘프에게 다가서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경고사격도 없나.”

나는 피하기도 귀찮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만으로도 날아온 화살이 두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fafafafafa!”

엘프가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휴지가 대답했다.

“정체가 뭐냐고 묻고 있다.”

“아르카디아의 공용어가 아닌데?”

“저들은 폐쇄적이라서 공용어를 알고 있는 자가 적다.”

“넌 어떻게 아는 건데?”

“아빠가 서리 엘프 종족이었다.”

“그렇군.”

서리 엘프 종족인 아빠와 화이트 드래곤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건가.

나는 휴지에게 통역을 부탁해서 혹시 이 근처에 던전이 없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꺼지라는 말만 한다. 여기는 우리가 올 곳이 아니라고 한다.”

“입으로 대화가 안 통하면, 몸으로 대화하는 수밖에 없는데.”

휴지가 내 말을 통역하자 돌연 엘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째서인지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이곳에 사는 원주민을 만나서.”

나는 단숨에 엘프에게 접근했다. 엘프가 죽으면 아쉬운 건 나였기에 일단 무기만 뺏기로 했다.

파각!

내가 순식간에 근접해서 활을 부수자 엘프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drfd!? dhwlsms rkr!”

엘프는 단숨에 번쩍 일어나더니 나를 피해서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나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서리 엘프 종족은 원래 느린가?”

“주인이 빠른 거다.”

거리를 적당히 벌려서 따라가니 막다른 절벽에서 멈췄다. 촌락 따위의 자기네들 무리가 있는 마을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무장한 다른 엘프들이 서 있었다.

“fafafafafa!”

“drfd? dw? Tdw!”

휴지가 통역했다.

“정체가 뭐냐고 묻고,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귀엽네.”

나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다가가서 그들의 무기를 모두 부쉈다. 엘프들이 하나 같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휴지를 시켜서 다시 그들에게 유적 같은 것의 위치를 묻게 하자 휴지가 그들의 말을 통역했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라고 한다. 빨리 사라지는 게 신상에 좋다고 한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탐색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들의 뒤에 있는 바위로부터 영롱한 빛이 식별되고 있었다.

“설마 여긴가?”

내가 엘프들을 지나쳐 바위에 다가가자 그들이 소리쳤다.

“sldrps! ah ekapek!”

휴지가 통역했다.

“방금 한 엘프가 어이! 그 앞은 지옥이다! 라고 외쳤다.”

“그렇다면 엘프들이 유적을 지키고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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