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50화 (50/127)

# 50

나는 손날을 세워 수도로 엘프들을 기절시켰다. 그들 덕분에 유적을 쉽게 찾은 만큼 그 공로를 인정해 죽이진 않았다.

“요 근래에 날 공격하고도 살아남은 놈들은 너희들이 처음일 거다.”

“vivivivivi!”

마지막 엘프가 기절하기 직전, 뭐라고 소리쳤는데 주의 깊게 듣진 않았다. 휴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방금 기절한 엘프가 말하길 이곳에 악마가 산다고 했다.”

“여기에?”

“응.”

나는 잠깐 이마에 손을 짚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혹시 이번 유적의 시련은 악마를 죽이는 걸까.

“그러면 더 쉽겠는데.”

나는 바위를 깨부수고 손쉽게 안으로 입성했다. 수직으로 세워진 육망성의 마법진을 지나치자 어두운 동굴이 보였다.

“어둡다.”

“마법을 사용해.”

앞이 분간 되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는데 휴지가 라이트 마법으로 앞을 비추자 문제없이 유적 안을 탐사할 수 있었다.

“우와. 여긴 안 춥다.”

“함정 같은 것도 딱히 안 보이는데.”

동굴 안은 지난 번 유적처럼 마법으로 만들어졌는지 춥지도 덮지도 않았다.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일직선의 원통형 모양이었는데 바닥은 평평해서 걷는데 불편함도 없었다.

“동굴에 이상한 그림들이 많다, 주인.”

“그러게.”

벽면에는 화려한 색감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관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먼지도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나는 예술에 취미가 없어서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드워프 그림이다, 주인.”

휴지가 벽면의 한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유적도 드워프들이 만든 걸까?”

나는 벽화를 흘겨보고 대꾸했다.

“날개가 있는 드워프 그림이다, 주인.”

“날개가 있는 드워프라니. 최악인데.”

“치마를 입은 걸 보니 성별은 여성이다.”

“날개가 달린 여성 드워프라··· 어떤 의미로는 굉장하네.”

한참을 더 걸어갔을 때 꽉 막힌 벽이 나왔다. 커다란 빙판을 세워둔 것 같은 벽에는 내가 모르는 언어가 가득 했다.

“주인. 지난 번 유적과 같은 고대 드워프들의 언어다.”

“암호 입력 장치라는 거지?”

“응.”

“힌트는 없나?”

휴지는 이리저리 훑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없는 것 같다.”

“일기장을 뒤져봐야 하나.”

나는 유지미의 일기장을 펼쳐서 훑어봤다. 그러나 빠르게 넘겨봐도 단서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느낀 거지만 로맨스 소설처럼 감정묘사만 잔뜩 해놨네.”

가만 보면 소원석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도 없다. 중요한 걸 대체 왜 안 적어 놓는 거야.

“에이, 그럼 그냥 부수자.”

나는 심플하게 가기로 했다.

콰과광!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몇 대 때리자 벽의 표면에서 투명한 장막이 가장 먼저 깨졌다. 그리고 좀 더 힘을 줘서 벽을 내려치자 이번에는 벽 전체가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우와! 대단하다, 주인!”

휴지가 공중제비를 돌며 감탄했다.

“내 기억으로는 유적에 방호 시스템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규칙을 어기고 들어가면 뭔가 귀찮은 일이 많이 일어난단 말이지.”

지난 번 유적에서도 불법 침입자를 위한 함정과 몬스터들이 잔뜩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예상대로 부서진 벽의 틈새로 걸어가자 복도의 양 옆에서 몬스터 모양의 석상들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창의성이 없어. 저번과 비슷한 모양새네.”

나는 침을 퉤 뱉고 달려가서 깨어나는 몬스터들을 두들겨 팼다. 지난번처럼 누더기 골렘이었는데 핵이 있는 위치가 저마다 달랐다.

나는 탐색스킬을 사용하고 번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피분수가 솟구쳤다. 몬스터들도 본능은 있는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쭈뼛거리고 멈춰 섰다.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고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새끼들, 그러기에 얌전히 자고 있을 것이지.”

손날을 세워 칼처럼 목을 절삭하고 강권과 붕권을 사용해 전신에 구멍을 뚫어주니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몬스터가 낙엽처럼 하릴없이 쓰러졌다.

마지막 놈의 목을 분지르고 있는데 휴지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단검으로 시체를 갈라서 마석을 캐고 있었다.

“주인. 아이템이 없다. 마정석 밖에 없다.”

“쳇. 가진 것도 없는 놈들이 나댄 거였네.”

휴지의 아공간을 비워두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녀는 숙련된 아이템 줍기용 펫이었다.

“가자.”

우리는 몬스터들의 시체를 지나쳐 복도의 끝으로 갔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함정이 설치된 복도가 나왔다.

“기다려. 탐색 스킬로 알아봐야 하니까.”

“응.”

휴지에게 일갈하고 탐색스킬로 복도를 살펴보자 금세 함정들이 파악됐다. 조잡한 화살 따위의 함정부터 기름과 불로 이루어진 불쇼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이건 신경 좀 썼나보네.”

나는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건 때우고 부술 수 있는 건 부쉈다. 천장에서 커다란 배틀 엑스가 떨어졌을 땐 조금 놀랐는데 시각적인 효과로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후우, 다음은 또 뭐냐.”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문을 부수고 나가자 이번에는 가시밭길이 나왔다.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는데, 뾰족하고 날카로운 검들이 하늘방향을 향한 채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한데.”

“별 것 없는 것 같다.”

우습게 여기고 휴지를 안고 천마비행술로 술술 날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바람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언가 위험을 직감하고 곧바로 몸을 틀었다.

파직!

“꺄악!”

“뭐야, 깜짝이야.”

서둘러 소리의 근원지로 눈을 돌리니 시선이 닿은 곳엔 사람 몸집만한 거대 투창이 박혀 있었다. 오른쪽에서 날아온 것이 나를 가로질러 왼쪽 벽면에 박힌 듯했다.

“공중에도 뭔가 장치가 있나본데.”

“마법으로 설치된 함정인 것 같다.”

그럼 그렇지, 쉽게 통과시켜줄 리가 없지. 나는 휴지를 힐끗 쳐다봤다. 나야 투창에 꼬챙이가 돼도 단순히 침을 맞는 기분일 테지만 휴지는 달랐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럼 부수는 수밖에 없나.”

나는 탄지공을 날려 벽면을 아예 부숴버렸다. 그러자 벽이 부서지면서 함정이 발동되거나 투창이 부서지면서 함정이 해체됐다.

“건너기가 수월해졌다.”

우리는 단숨에 반대편의 문에 도착했다. 나는 다음엔 뭐가 나올까 궁금해 하면서 다음 문을 부쉈다.

파가각!

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이번엔 넓은 공터와 비석이 나왔다. 중앙에 있는 비석은 마치 승전 기념비처럼 무슨 글자가 잔뜩 새겨진 채 거룩하게 세워져 있었다.

“뭐지? 함정이 아닌 건가.”

탐색 스킬로 뜯어봐도 도통 파악이 되지 않았다. 휴지가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고 말했다.

“봉인석이다.”

“봉인석?”

“비석의 가장 위에 드워프 언어로 봉인석이라고 써져 있다.”

휴지는 비석에 다가가서 고개를 있는 힘껏 젖혔다. 비석이 큰 건지, 그녀가 작은 건지, 휴지의 앞에 있는 검은 비석은 그녀를 잡아먹을 듯 거대하고 흉흉해보였다.

“여기에 무언가 봉인되어 있는 것 같다.”

“아까 걔네들이 말했던 게 뭐였지··· 악마?”

“악마가 산다고 했었다.”

“이게 봉인석이라면 여기에 악마라도 봉인되어 있다는 건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반쯤 농담으로 던졌는데 휴지는 진지하게 말했다. 음식을 먹을 때 빼고 이렇게 진지한 그녀는 처음이었다.

“설마 이거, 소원석의 위치를 나타낸 게 아니었어?”

나는 갑자기 소름이 후두둑 돋았다.

유지미 그년이 날 속인 거였나?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던데 유지미를 두고 하는 말일까.

나는 혹시나 몰라서 비석에 다가간 뒤 손을 뻗었다. 차가운 비석의 표면을 만지고 있는데 갑자기 빛의 글귀가 떠올랐다.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조건 : 레벨 1000>

“어!”

순간 나는 깨달음이 훅 솟구쳤다. 유지미가 유적의 위치를 알고도 선점하지 못 했던 까닭을 알게 된 것이다. 유적에 레벨 조건이 있었기에 사용할 수도, 습득할 수도 없었던 거다.

“1000레벨이라고?”

지금 내 레벨이 596레벨. 방금 전 레벨 업을 한 상태였다. 그간 설렁설렁 사냥을 했기에 1000레벨이 못 됐다.

나는 휴지를 불러 비석에 소원과 관련된 말이 적혀 있냐고 물었다. 휴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모르겠다, 주인. 그런 말은 안 적혀 있는데 그냥 무언가 봉인되어 있다고만 적혀 있다.”

“흐음.”

그래도 레벨 조건을 보니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조건이 너무 높으니 갑자기 신뢰가 확 솟구쳤다.

“무언가 봉인이 되어 있는 봉인석이라···.”

혹시 소원석이라는 건 아이템이 아니라 어떤 의지가 깃들어 있는 생명체 같은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1000레벨을 찍어야겠는데. 그래야 죽인지 밥인지 알 수 있을 테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마왕이 있는 바벨의 탑으로 가서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마왕 수하의 몬스터들은 레벨이 높고 강한 만큼 경험치도 많이 준다.

‘가장 빠른 건 마왕을 죽이는 거지만, 유지미의 말에 따르면 마왕을 죽일 때마다 세계가 멸망했다고 했으니 그건 자제해야겠지.’

멸망의 도화선에 불을 지필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탑 안에 있는 몬스터들만 분질러주면 금방 1000레벨이 될 것이다.

“일단 레벨 업을 하러 가자.”

“어디로?”

“베이징으로.”

“거긴 왜?”

“바벨의 탑에서 금방 레벨을 올리려고.”

예전 같았으면 천마신공도 없고, 천마비행술도 없고, 타고 다닐 펫도 없어서 바벨의 탑을 가는 게 어려웠을 거다. 정확히는 도착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천마신공이 있어서 마력 량도 어마어마하고 천마비행술과 타고 다닐 수 있는 펫, 휴지가 있어서 부담이 없었다.

“윤회 스킬의 버프로 경험치가 10배니 만렙까지 금방이겠지.”

아르카디아와 같다면 바벨의 탑은 아마 100층으로 돼 있을 거다. 그럼 99층까지는 클리어해도 문제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입구에 도착했을 때쯤 불청객들이 보였다.

“sldrps! ejdltkddms ah ekapek!”

“dkan dmlal djqtdma!”

활과 단검 따위로 무장한 엘프들이 서 있었다.

“손속에 너무 사정을 뒀나. 그새 일어나서 고자질을 하고 오다니.”

휴지가 통역했다.

“멈추라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 한다.”

“구경만 하고 나왔다고 말해.”

엘프들의 가운데에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늙은 엘프도 있었다.

엘프도 늙긴 늙는 구나.

휴지가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하자 늙은 엘프가 나섰다. 그가 뭐라뭐라 중얼거렸는데 나는 무시했다. 저런 건 대꾸를 할수록 시간만 날리는 꼴이다.

“그냥 무시하고 가자. 휴지 트랜스폼!”

그러자 휴지가 어부바자세를 취했다. 나는 즉시 그녀의 등에 탑승했다.

늙은 엘프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소리쳤다. 그러자 무장한 엘프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턱 굽혔다.

뭐야, 무슨 짓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늙은 엘프가 소리쳤다. 아르카디아의 언어라서 나도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잠깐! 멈추십시오!”

“싫어.”

내가 완강히 거부하고 휴지의 뱃살을 만져 조종하자 휴지가 공중에 붕 떴다. 늙은 엘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들었습니다! 이 근처에 있는 유적을 찾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원하는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잠깐 얘기라도 들어주십시오!”

뭐야, 엘프라는 족속들이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나는 공중에서 멈춰 섰다. 확실히 지금 발견한 이곳 외에도 백두산 근처에 보라색 마크가 한 곳 더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