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엘프들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줄 알았는데 서리 엘프족은 달랐다. 나무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나와 휴지는 늙은 엘프와 엘프 군의 호위를 받으며 그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손님을 맞는 접견실에 앉아있었는데 시간을 보낼 겸 아공간에서 초콜릿을 꺼내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휴지.”
“왜.”
“근데 너 아빠가 서리 엘프 족이라고 하지 않았냐?”
“응.”
“여기에 너희 아빠는 없어?”
휴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없다.”
“엘프는 오래 살고 폐쇄적이라서 소수의 일족이라면 모여 살지 않냐?”
그녀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 우리 아빠가 사랑의 방랑자라서 그렇다, 주인.”
“무슨 말이야?”
“진정한 사랑을 찾다가 일족에서 쫓겨났다.”
“낭만이 있는 분이었네. 그래서 드래곤의 마음을 쟁취한 건가.”
휴지의 가정사를 듣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엘프 둘이 들어왔다. 아까 전의 그 늙은 엘프는 보이지 않고 웬 엘프 검사와 육덕진 몸매의 여성 엘프가 들어왔다.
“이들입니다. 레아 여왕님.”
“그래.”
농염함이 온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매력적인 여성이 일족의 여왕인 듯했다. 엘프 검사는 여왕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검을 쥔 채 탁자 옆에 섰다.
경호원인가.
우리는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세가 됐다.
“반갑다. 서리 엘프 일족의 여왕 레아 세라핌이다. 레아라고 부르면 된다.”
그런데 어째 여왕의 말이 짧았다. 서리 엘프족의 특징인가.
“주은성이다.”
나도 짧게 말해줬다. 여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보통 이럴 때 격식과 예의를 차리라면서 엄포를 내는 놈이 많았기에 도리어 신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밑에 있는 종놈 쪽에서 엄한 불똥이 튀었다.
“왜 반말이냐?”
엘프 검사가 서슬 퍼런 눈으로 나를 위협했다.
“뭐가?”
“여왕님께 예의를 갖춰라.”
“예의라면 받은 그대로 돌려줬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휴지를 쳐다봤다. 눈칫밥 좀 먹은 휴지가 나를 대신해 나섰다.
“너야 말로 내 주인께 예의를 갖춰라.”
“뭐? 주인?”
엘프 검사는 잠시 얼이 빠졌다.
“넌 누구냐? 쫓겨난 우리 일족 같은데, 아닌가?”
“휴지다.”
휴지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자 엘프 검사가 숨을 훅 멈추고 놀랐다. 여왕도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는데 그녀는 작은 입술로 휴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난 여왕님의 경호기사 기쉬네다.”
더 덤빌 거라 여겼는데 기쉬네는 자기소개를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싱거운 놈.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이곳 근처에 있는 다른 유적의 위치를 안다고?”
레아가 대답했다.
“그래. 마굴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에게 들었다. 유적을 찾고 있다며.”
이거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유적을 마굴이라고 부르는 건가?”
“네가 들어간 동굴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 듣기로 너는 마굴의 함정을 모두 돌파했다던데 혹시 악마는 죽였나?”
“악마?”
“그래.”
질문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봉인석을 말하는 건가?”
“역시 마굴의 끝에 악마가 봉인돼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
그녀는 놀라면서도 태연한 척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미세한 얼굴의 떨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봉인석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고?”
“혹시 악마의 목소리를 못 들었나?”
“그런 건 못 들었는데······.”
전혀 못 들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고 휴지를 쳐다보자 휴지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확실히 비석에 악마가 봉인된 거야?”
나는 조금 불안해서 물었다.
이거 유지미에게 속고 있는 건가.
“우리는 악마로 추정하고 있다. 매일 같이 마굴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니까.”
“이상한 목소리?”
“구해달라거나, 살려달라는 목소리.”
나는 곰곰이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마왕의 편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악마는 너희들과 같은 편 아닌가? 그래서 구해달라는 거 아냐?”
“우리가 마왕 쪽에 가담한 건 맞다. 하지만 마왕 쪽과 우리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관계다. 종이 몇 장과 구두로 나눈 약속이 전부다. 피를 나눌 의리는 없지.”
“그렇군.”
결국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 손을 잡고 있다는 건가.
끼이익!
그때 나무문이 열리고 다른 엘프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선반에 손님을 위한 음료를 들고 왔는데, 이들 종족은 말투는 경박해도 최소한의 격식은 갖춘 종족인 것 같았다.
“이거 맛있는데, 너도 마셔라.”
“응!”
한 모금 마시고 독이 없다는 걸 깨닫자 휴지에게 말했다. 휴지가 음료를 단숨에 털어 넘기자 레아는 눈으로만 웃더니 순순히 문제를 털어놨다.
“게다가 그 이상한 목소리에 홀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굴로 향하는 엘프가 많아졌다. 두 달 전에는 갑자기 잠잠해졌지만 근래 들어서 또 다시 더 심해졌다. 마법진으로 봉인하고 바위로 막아뒀지만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거 재밌네.”
“우리 쪽에선 심각한 문제야.”
문제를 털어놨다는 건 해결해달라는 거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은?”
“왜 마굴에서 그냥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악마를 끝장내줘.”
“그게 끝이야?”
“그래.”
나는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이거 완전 얻어 걸린 재물 아닌가.
“바바님께 듣기로 넌 강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부탁한다.”
“바바님? 아아.”
아까 늙은 엘프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역량을 대충 가늠할 수 있는 건가. 확실히 묘한 분위기를 풍겼었다.
나는 레아의 목소리에서 묻어난 절박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울의 추가 조금 안 맞는 거 같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악마가 엄청 강한데 그쪽에서 좀 더 내뱉어야 한다는 거지. 내가 상인은 아니지만 수평을 맞춰야 서로가 만족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 말은 사실이었다.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지만 봉인석의 조건은 무려 만렙이었다.
“뭐가 더 필요한데?”
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
“여기 마법서적 같은 건 없나?”
“마법서적?”
“응.”
그동안 유지미의 쇄국정책으로 한국의 헌터시장엔 제대로 된 마법서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나는 탄지공만 줄창 사용해왔다. 쓸 만한 원거리 스킬 혹은, 마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배웠을 거다. 특히 범위형으로.
레아가 물었다.
“스킬 북을 말하는 거지?”
“그래, 그거.”
“있어. 꽤 많아. 아니, 아주 많아.”
그녀가 너무 쉽게 동의의사를 내비치자 나는 저울에 추를 좀 더 얹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쓸 만한 아티팩트도 필요해.”
“아이템?”
“평범한 거 말고.”
“으음···.”
레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나와 휴지를 번갈아봤다. 그리고 묘한 웃음을 흘렸는데 눈이 높은 나도 인정할 만큼 색한 미소였다.
가만 보니 젖가슴도 꽤 큰 것 같다. 둔덕의 사이즈가 무지막지한데.
그녀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우리 종족의 언어를 모르잖아?”
“언어?”
“그래. 서리 엘프족의 언어!”
설마 언어를 가르쳐주겠다, 이딴 헛소리는 아니겠지.
“언어를 가르쳐주겠다!”
너무 당당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마시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내가 황당해서 쳐다보자 그녀가 아아 거리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언어가 통하는 아티팩트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언어가 통하는 아티팩트?”
“그래. 수은 장식띠라는 머리띠가 있는데 그걸 착용하고 있으면 모든 언어가 자동으로 통역되지.”
“오.”
가지고 있으면 분명 언젠가 쓸 일이 있을 법한 아이템이었다. 휴지라는 든든한 통역사전이 있지만 그녀의 도움도 한계가 있다.
“언젠가 필요는 하겠는데··· 흐음.”
하지만 그다지 쓸 일이 없을 수도 있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휴지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주인. 서리 엘프 종족에게는 저것보다 더 특수한 아티팩트가 있다. 차라리 그걸 달라고 해라.
-더 특수한 아티팩트?
내 귀가 쫑긋 섰다.
-대대로 여왕에게만 전해지는 메자이의 부적이라는 목걸이가 있다. 듣기로는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는 목걸이라고 했다. 그걸 달라고 해라, 주인.
-오.
나는 휴지에게 들었던 그대로 메자이의 부적을 여왕에게 제시했다.
여왕은 상체를 뒤로 내빼고 더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만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첨언했다.
“물론 언어통역 아티팩트도 포함해서.”
“잠깐! 그러면 우리 쪽이 손해잖아?”
“손해?”
“그래. 메자이의 부적만 해도 부족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야. 게다가 수은 장식띠도 전대의 유물이라서 수량이 많지가 않아.”
나는 방금 전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심각한 문제라며. 그 정도는 꺼내야지.”
“크으읏···.”
레아는 혀를 깨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그쪽의 힘으로는 무리를 해도 해결할 수 없기에 나한테 부탁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잠자코 있던 기쉬네가 쌍심지를 켰다.
“무례하다! 인간! 그다지 강해보이지도 않는데!”
“진짜 강한 사람은 겉으로는 강해보이지 않는 법이야.”
그래서 불철주야 마케팅에 힘을 써야지.
레아가 내 말을 받았다.
“바바님의 말을 믿고 네게 부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린 당신의 강함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아.”
“마굴을 혼자서 돌파했는데?”
“그 마굴이 강함과 전혀 관계없을 수도 있지. 가령 마왕이 수작을 부려서 우리 종족에게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할 수도 있잖아.”
“상상력이 굉장한데.”
내 비아냥거림에도 레아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유적의 위치정보와 아티팩트를 모두 얻고 싶다면 좀 더 도와줘야겠어.”
말하는 건 공짜였기에 나는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녀가 두 손을 살포시 모으고 말을 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내 약혼자가 나쁜 놈들에게 잡혀갔어.”
“약혼자?”
“그래. 부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데 납치됐어. 덕분에 내가 임신을 할 수 없게 됐지.”
나는 무심코 음료를 홀짝거리다가 또 다시 뱉을 뻔했다.
어우, 사레들릴 뻔했네.
옆에서 휴지가 귓속말로 정보를 보강했다.
-서리 엘프 종족은 모계사회다, 주인. 강한 남자의 씨를 받아서 임신을 하는 풍습이 있다.
-임신이라고? 여왕이잖아? 여왕이 임신을 한다고?
-여왕이라서 더 강한 남자의 씨를 받고, 또 임신하는 거다.
-그럼 임신 기간 중에 일은 누가 하는 거야?
-강한 남자가 대신 한다.
순간 내 머릿속에 묘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여왕에게 물었다.
“부족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데 납치를 당했다고 했지?”
“그래. 네 표정을 보니 어떤 의문인지는 알겠는데 그는 방심하다가 잡혀갔다.”
“무슨 방심?”
“강한 남자가 방심하는 곳이 침대 위 말고 어디 있겠어.”
“······.”
나는 간단히 납득해버렸다. 휴지가 귓속말로 정보를 보강했다.
-서리 엘프 종족의 여성은 평소에 생리를 하지 않는다. 임신 기간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그 짓만 한다.
-그 짓?
-밥도 침대 위에서 먹는다, 주인.
-오.
나는 정보를 종합해서 되물었다.
“그럼 기력이 다 빨린 상태로 납치당한건가?”
“그래.”
“침대 위에서?”
“내가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였다. 너도 알겠지만 여자가 흥분을 하면······ 아니, 어쨌든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어.”
“누가 납치해 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