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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52화 (52/127)

# 52

내 물음에 레아는 뜨거운 콧김을 훅 내뿜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노려보는 것처럼 접견실의 한 구석을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몽롱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분노를 토해내듯이 말했다.

“오크들.”

“오크? 여기에 오크도 있었나?”

휴지가 귓속말로 말했다.

-주인. 알다시피 마왕의 달콤한 말에 홀린 종족이 많았다. 특히 오크들은 단순해서 다른 종족들보다 더 잘 속아 넘어왔다.

“그렇군. 그런데 이런 건 귓속말로 안 해도 돼.”

“알았다.”

레아는 분노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오크들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쳤다. 다른 이종족과 몬스터가 없는 땅은 별로 없어. 오크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서 악마의 위협을 받으며 살 이유도 없었을 거야.”

나는 다시 이야기의 초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납치된 강한 남자를 구해오라는 거냐?”

“아마 죽었을 거다.”

“그러면?”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복수를 해줘. 붉은 머리 오크족의 족장을 죽여줘.”

수차례의 얘기 끝에 여왕과 나는 협상을 끝마쳤다. 여정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유적의 위치와 마법서적을 먼저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그것들 대신 수은 장식띠만 먼저 넘겨줬다.

“차라리 마법서적 쪽을 미리 주는 게 낫지 않나?”

“공용어를 할 줄 아는 엘프가 적어. 다시 돌아올 때 말이 통해야 수월할 거야.”

휴지가 나섰다.

“내가 있다.”

“죽을 지도 모르지.”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 것들은 일을 끝마치면 줄게. 그리고 다른 엘프족은 모르겠지만 우리 서리 엘프족은 되도록 공격하지 말아줘.”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고려해주지.”

* * *

나와 휴지는 곧바로 출발했다. 어느새 구름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에 노을이 져서 숲속 공터에 은은한 분위기가 풍겼는데 풍취가 몹시 좋았다.

휴지가 불쑥 물었다.

“베이징엔 안 가는 거냐, 주인?”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쉬운 일부터 단계적으로 하자.”

범위형 마법을 배우면 거대한 지역을 순식간에 초토화 시킬 수 있다. 나는 탐색 스킬로 엘프족의 서고에 보관된 마법서적들을 이미 확인했다. 범위형 마법을 배워 빛과 같은 속도로 레벨 업을 할 생각이었다.

“북경오리가 먹고 싶었는데.”

“중국이란 나라가 멸망했는데 북경오리를 어떻게 먹어.”

“저번에 박은애가 말했다. 나라가 망했어도 도시 단위로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그래. 북경오리를 먹을 수도 있겠네. 강도를 만나서 칼부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걸음을 옮기며 감각을 확장했다. 여왕이 말하기를, 백두산 너머의 지린성 일대에 오크들이 몰려 산다고 했다.

“한 군데를 특정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주인, 왜 걸어가는 거냐?”

“혹시 유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산을 다 내려가도록 유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산 밑에 도착하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버렸다. 휴지를 타고 하늘로 도약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어이 잠깐! 거기 멈춰!”

자신을 기쉬네라고 소개한 엘프 검사였다.

“뭐냐.”

“헉헉, 같이 가자.”

기쉬네는 숨을 헐떡거리고 가까이 다가왔다가 휴지의 등에 업혀 있는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뭐하긴 탈것에 타고 있지.”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인간 형태의 휴지는 여성체로서 따듯하고 무엇보다 부드럽다. 승차감이 좋다는 거다. 속도도 빨라서 최고의 탈것이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하늘을 날아갈 거야. 따라오려면 탈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마라. 나는 정령술도 수준급이니까.”

기쉬네는 숨을 고르면서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띄웠다. 나는 휴지를 이끌고 하늘을 날아 앞장섰다.

“얼굴 한 번 내밀었다고 나중에 뻔뻔하게 에누리를 바란다거나 하진 않겠지.”

“걱정이 많군. 자발적으로 온 거다.”

“자발적으로? 너 여왕의 경호기사가 아니었냐?”

“순번제라서 괜찮다.”

나는 엘프 특유의 습성을 되새겼다. 풍습은 부족마다 다르다지만 종족 특유의 성격으로 보자면 호기심이 많은 종족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없는 쪽에 가까운 편이었다.

“아르카디아의 말 중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 엘프는 귀를 가리고, 오크는 눈을 가리지만, 인간만은 호기심을 품고 끝까지 확인해서 눈이 멀고 귀가 먹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납치됐다는 강한 남자가 혹시 네 형제냐?”

“그렇다. 내 형제다.”

아, 역시 그렇군.

단숨에 이해했다.

“혹시라도 살아있다면 기필코 구할 것이다.”

기쉬네가 타오르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망울은 커다란 결심을 한 듯이 반짝였는데 흩날리는 은색 단발과 함께 몹시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니.”

기쉬네의 속도가 꽤 느렸지만 나는 일부러 휴지의 뱃살을 만져서 그의 속도 폭에 맞춰주었다.

* * *

“이래서 지린성에 오크들이 산다고 했구나.”

“징그럽다, 주인.”

“확실히 바퀴벌레 같네.”

깜깜한 하늘 위에서 아래를 살펴보니 특정 지역이 환했다. 산 밑의 평야지대였는데 불빛 아래의 오크들이 어찌나 바글거리는지 마치 벌레 떼가 꾸물꾸물 기어가는 것 같았다.

“저게 다 오크란 거지?”

“붉은 머리 오크는 저들 중에 정수리에 붉은 피를 묻히고 다니는 놈들이다.”

기쉬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탐색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전부다 그냥 오크로 보이네.”

탐색스킬도 생명체의 본질만 나타낼 뿐이다. 저들끼리 나눈 족속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일단 내려가자.”

우리는 고도를 낮춰 하강하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훑었다.

기쉬네가 말했다.

“오크는 호전적인 종족이다. 특히 이곳 평야는 갖가지 부족들이 모두 몰려있다. 괜히 중앙 쪽으로 가면 한 번에 많은 적들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오크 부족들은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처럼 천막집을 펼쳐서 살고 있었다. 곳곳에는 횃불들이 즐비했고, 피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걸까?”

“그래 보이는데.”

우리가 지면과 충분히 가까워질 때쯤 한 오크 무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취이이익! 뭐인 거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오는 거시다!”

“보급 물자인 거시다! 취이이익!”

“오.”

나는 이마에 미리 착용해둔 수은 장식띠를 만지고서 감탄했다. 오크의 말투가 조금은 이상하게 들렸지만 통역기능이 확실하게 작동 되고 있었다.

“취이익! 수컷 하나에 암컷이 둘인 거시다!”

“수컷은 강간하고 암컷은 죽이는 거시다! 취이이익!”

우와, 이 새끼들 성적취향 한번 살벌하네.

나는 고개를 돌려 기쉬네를 쳐다봤다. 확실히 수컷보다는 암컷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어쨌든 흉측한 돼지머리가 날 강간한다고 공언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탁!

휴지의 발이 땅에 닫고 내가 등에서 내렸다. 처음에 발견한 오크무리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수많은 오크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인간인 거시다, 크취이익!”

“취이이익!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한 거시다.”

그 수만 족히 서른 마리. 저 멀리서 달려오는 놈들까지 포함하면 오십 마리도 넘을 것 같았다.

“진짜 바퀴벌레 같네.”

“오크는 본능에 충실한 종족이다 보니 번식을 잘 한다, 주인.”

흘깃 기쉬네를 쳐다보니 놈은 겁에 질려있지 않았다.

“실력에 자신 있나보지?”

“이래봬도 부족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다.”

“그래?”

떠드는 사이 오크들이 불시에 공격을 해왔다. 한쪽 날이 잘 벼려진 손도끼가 날아오고 뾰족한 화살들이 엄습해왔다.

나는 그것들을 가뿐히 낚아채서 그대로 돌려줬다. 손도끼가 날아가서 두개골을 깨부수고, 화살이 날아가서 놈들의 이마를 관통했다.

기쉬네도 검을 뽑아들고 놈들과 싸웠는데 검술이 화려했다.

내가 슬슬 피하면서 기쉬네의 검술을 감상하고 있으니 배틀 엑스를 쥔 오크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내게 달라붙었다.

“크취이이이익! 굶주린 거시다!”

“인간 남자는 맛있는 거시다! 취이이익!”

다른 의미로 들려서 소름이 끼쳤다.

“우와, 등줄기에 닭살 돋았다. 징글징글하잖아.”

나는 손이 닿기도 싫어서 탄지공을 날렸다. 마력을 많이 싣지 않고 적당히 날렸는데 달려오던 오크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역시 약해. 경험치도 적게 주는 군.”

이제 레벨도 어느 정도 있는 터라 웬만한 놈들은 경험치를 잘 주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머리에 피 칠하고 있는 놈은 안 보이는데.”

나는 이리저리 훑으며 탄지공을 간간히 날리다가, 먹음직스럽게 일렬로 서 있는 오크들을 발견했다.

그들을 향해 마력을 적당히 실어 탄지공을 날리자 새하얀 섬광이 그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관통했다. 순식간이었다. 오크들의 머리가 순서대로 사라지고 초록색 거체가 도미노처럼 땅에 쓰러졌다.

“우와! 굉장하다, 주인!”

휴지가 공중제비를 돌며 감탄했다.

나는 매의 눈으로 오크들을 훑다가 여기 모인 놈들 중 붉은 머리 오크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감탄 하는 휴지를 뒤로하고 나는 탄지공을 날려서 주변의 오크들을 쓸어버렸다. 기쉬네가 헉헉거리는 꼴을 보니 가만히 놔뒀다간 죽을 것 같아서였다.

“헉헉, 어떻게 그런 강함이···! 역시 바바님의 말이 맞았단 말인가!”

기쉬네가 숨을 몰아쉬고 감탄했다.

“네 안목이 틀린 거지.”

나는 대충 대꾸하고 유일하게 살려둔 오크에게 다가갔다. 오크는 죽어나간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취이이익! 살려달라는 거시다! 미안한 거시다! 잘못한 거시다! 안 따먹는 거시다!”

휴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거 귀엽다, 주인.”

“넌 별게 다 귀엽나 본데. 이 녀석 엄청 추악해.”

나는 소름이 돋았지만 참았다. 정보를 캐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았다.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손도끼를 발견한 나는 그걸 쥐고 놈 앞에 흔들어보였다.

“살고 싶나?”

오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마의 수은 장식띠를 만지고서 감탄했다.

“이거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통행이네. 의사소통도 되는 건가.”

그때 오크가 손바닥을 게장 뚜껑의 밥알 비비듯 싹싹 비비고 말했다.

“살려주는 거시다! 안 따먹는 거시다!”

나는 순간 열이 뻗쳐서 놈의 가랑이 사이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고기 자르는 소리가 들리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미친 발정난 새끼가!”

그래도 죽으면 귀찮아지는 건 나였기에 힐링포션을 꺼내서 서둘러 환부에 부었다. 세상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던 오크가 조금은 얌전해졌다.

내가 물었다.

“붉은 머리 오크족이 어디에 있지?”

오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환부를 쳐다봤다.

“취이익! 당신은 악마인 거시다! 사랑이 없는 거시다!”

“이 미친 새끼가!”

내가 손도끼를 높게 치켜들자 오크가 즉시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부, 붉은 머리 오크족은 저 쪽에 사는 거시다! 저쪽에 있는 거시다!”

나는 놈을 죽이려다가 생각해보니 살려두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오크들에게 귀감이 돼서 부디 발정이 덜 나면 좋을 것이다.

“그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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