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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53화 (53/127)

# 53

얼마 걷지 않아 오크의 말대로 붉은 머리 오크족이 보였다. 돼지머리들이 정수리에 시뻘건 피를 묻힌 채 방방 뛰는 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경계병 오크의 가랑이를 징벌하고 있는데 기쉬네가 말했다.

“저들이다! 저들이 붉은 머리 오크족들이다!”

“알고 있어.”

눈에 힘을 줘서 그들을 훑어보니 저녁식사가 한창인지 커다란 모닥불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위에는 꼬챙이가 여럿 있었는데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관통된 채 구워지고 있었다. 휴지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주인.”

“저거 자기네들 동족을 잡아먹는 거야.”

내가 고기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했다.

“엥? 오크들이 동족들도 먹어?”

휴지가 처음 듣는 것처럼 물었다.

“몰랐어?”

“응.”

“몇몇 오크들은 사냥이 힘들어지면 종종 동족을 먹기도 해. 고기로 희생되는 건 다른 부족 놈이겠지만.”

“우와, 근본 없는 놈들이다.”

휴지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시 물었다.

“그럼 저건 무슨 행동이냐, 주인?”

내가 집중을 해서 그들 무리를 훑자 오크 두 마리가 교접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마리가 몸을 숙이고 있고 다른 놈이 그 위에서 열나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짓을 하는 거냐?”

얼핏 짝짓기와 비슷해 보였지만 짝짓기는 아니었다.

“아냐.”

오크들은 저열하고 천박하지만 공개적으로 성교를 하지는 않는다. 성교를 할 때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서열 관리지. 서로 먼저 등에 올라타는 놈이 강한 거야.”

“그럼 둘 다 수컷인 거야?”

“그래.”

“우와, 진짜 근본 없는 놈들이다.”

근처에 있는 경계병 오크들을 차례차례 징벌하고 우리들은 붉은 머리 오크족에게 접근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후 몸을 튕겨서 순식간에 근접하니 놈들이 놀라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

“취이익! 인간인 거시다! 맛좋은 인간인 거시다!”

“품질 좋은 고기들인 거시다! 맛있게 먹는 거시다!”

내가 무슨 시장판에서 판매되는 생선이냐.

“맛좋은 인간이 왔다!”

내가 소리치자 초록색 넓적다리를 먹던 오크가 고기를 물리고 가장 먼저 엄습해왔다. 놈은 손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왔는데 주먹으로 가볍게 인사하자 몸에 구멍이 뚫리고 내장과 체액을 뱉어냈다.

“아, 습관.”

덕분에 오크의 체액으로 옷이 흥건히 젖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 몸이 더러워질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먹이 튀어나간다. 모기 같은 해충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한 인간인 거시다! 취이익!”

“크취이이익! 경계병! 모두를 부르는 거시다!”

모닥불에 앉아 있는 오크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경계병 오크들이 뿔피리를 불었다. 몇몇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기도 했다. 천막 안에서 오크들이 깨알 같이 쏟아져 나왔다.

“우아, 엄청나다! 주인.”

“그러게.”

평소 거주하는 거주지의 밀도가 엄청난지 천막 하나당 평균 서른 마리의 오크들이 나왔다. 메뚜기 떼를 보는 것 마냥 징글징글했다.

팟! 팟! 팟!

손가락을 튕겨 탄지공으로 놈들을 요리해주고 근접해오는 놈들은 손과 발로 대항했다. 겁에 질려서 도망가는 놈들이 있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없었다. 아주 오래전 상대한 오크들과 마찬가지였다. 오크라는 종족은 천성적으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휘익! 휘이익!

사방에서 손도끼가 날아왔다. 기쉬네와 휴지를 신경 쓰면서 도끼를 피하고 있으니 오크들이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달라붙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그들은 나를 움직이는 먹이쯤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취이이익! 따먹는 거시다!”

“내 스타일인 거시다! 찰진 엉덩이인 거시다!”

“이런 제길, 먹이가 아니라 성욕 배출구였냐.”

곳곳에서 쇄도하는 도끼와 화살세례를 피하고 아공간에서 대검을 꺼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거대한 검날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오크들의 몸이 바닥을 기었다. 두꺼운 가죽과 뼈가 절삭되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나는 여세를 몰아 수직으로 베고, 횡으로 베고 아주 베고 베고 또 베었다.

오크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가왔지만 호흡이 가빠지거나 땀이 흐르진 않았다. 끈적끈적한 체액 때문에 기분만 조금 더러웠을 뿐이다.

물 흐르듯이 압박을 하며 검을 휘두르다보니 어느새 주변에 시체가 널려있고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겁을 모르던 오크들도 점점 뒷걸음질을 치더니 기어코 화살이나 투창 따위의 원거리 공격을 우선으로 했다.

“족장은 나와라! 강한 인간이 도전하러 왔다!”

거기에 맞서 내가 소리치며 탄지공을 날리자 오크들이 찬바람 앞 갈대처럼 후두둑 쓰러졌다.

소나기 같던 화살이 그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고 그제야 족장으로 보이는 놈이 천막을 헤치고 나타났다.

“크취이익! 누구냐! 누가 족장소리를 내었어!”

놈은 다른 오크들과 달랐다. 키와 덩치가 족히 두 배는 컸고 두뇌도 영민한지 말투도 정상적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왼쪽 눈이 멀었는지 안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잘 어울렸고,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피를 머리에 끼얹은 상태였는데 갓 뽑아낸 피를 쓴 것인지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족장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다!”

내가 나섰다.

“나다!”

“그대인가? 그대가 족장소리를 내었는가?”

“그렇다.”

“참으로 딱한 놈이로구나!”

족장의 등장에 살아남은 오크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나와 족장의 덩치를 비교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예감하는 듯했다.

크워어어어엉!

족장이 커다란 표효를 내지르자 오크들의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그들의 환호에 힘을 실어줬다.

거참,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나는 즉시 대검을 들고 놈에게 달려갔다. 족장은 거대한 양날도끼를 휘둘러 내 공격에 대응했다.

빠직!

검과 도끼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러나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내 대검에 놈의 양날도끼가 반으로 갈라지고 놈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히이이익! 뭐냐!?”

“강한 인간이다!”

나는 번개 같은 속도로 접근해서 놈의 발등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대검의 손잡이를 밟고 뛰어올라 놈의 두개골에 강권을 때려 박았다.

“깨져라!”

빠각!

“크허허헝!”

일격에 놈의 머리가 재활용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죽어라!”

나는 확실히 끝내기 위해 주먹을 연타로 꽂아 넣었다. 눈알이 터지고 놈의 입에서 피거품이 보글보글 흘러나왔다.

쿵!

육중한 거체가 어이없이 고꾸라지자 환호하던 오크들이 입을 닫았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설마 그들의 우두머리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크취이익! 족장이 죽은 거시다!”

“꿈인 거시다! 이런 꿈은 싫은 거시다! 현실로 돌아가는 거시다!”

“어딜 도망가!”

나는 도망가는 놈들을 탄지공으로 모두 처리하고 숨을 골랐다. 정보 창을 열어보니 생각 외로 경험치가 많이 올라서 레벨 업을 몇 번이나 했다. 족장이 경험치를 가장 많이 준 듯싶었다.

“주인. 이상한 무기들과 정체불명의 고기, 마석들이 전부다.”

휴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아이템들을 채집했다.

“그래.”

미 분배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기쉬네가 말했다.

“말도 안 돼! 붉은 머리 오크족은 근방의 오크들 중 가장 강한 족속인데, 이렇게 쉽게 죽이다니!”

나는 목을 풀고 대꾸했다.

“포장만 좀 다르고 알맹이는 같나보지.”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것 같은데···!”

“여기저기 휘둘리고, 강제로 이동당하고, 자살자들과 많이 대면하면서 치열하게 살면 돼.”

나는 족장의 발등에서 대검을 뽑은 뒤 검을 휘둘러 족장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산책을 하는 것처럼 놈들이 거주하는 천막 안을 확인했다. 잔당의 소탕과 인질여부의 확인 때문이었다.

“엘프는 안 보이네.”

모든 천막을 뒤적거려봤지만 정체불명의 음식이나, 치즈, 육포 따위가 널려 있을 뿐이었다.

간간히 사람의 뼈들도 보였지만 엘프의 뼈인지, 사람의 뼈인지 구분 지을 수 없었다.

“역시 늦은 건가.”

기쉬네가 모닥불에 꽂힌 시체를 쳐다봤다. 아마도 오크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돌아가자.”

나는 휴지를 시켜 몸에 묻은 체액을 씻고 아공간에서 의류를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흠뻑 젖은 채로 휴지의 등에 타기는 조금 미안해서 돌아올 때는 천마비행술로 직접 하늘을 날았다.

* * *

엘프 마을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여왕을 찾아갔다. 오크족장의 머리를 전달하고 약혼자의 비보를 같이 전해줬는데 그녀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다.

일을 도와준 수고비는 일단 마법서적만 받기로 했고, 나머지 것들은 악마를 죽인 후 받기로 얘기를 끝냈다.

게다가 마법서적은 시간이 늦어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에 서고를 이용하라고 제안 받았는데, 나는 그냥 바로 보상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휴지는 피곤하다고해서 숙소에서 쉬게 하고 나는 다른 엘프의 안내를 받아 서고에 도착했다.

“여기다.”

날 안내해준 토비라는 엘프가 말했다.

“바깥에서 볼 때보다 훨씬 사이즈가 아담한데.”

나는 감각을 열고 서고 안을 확인했다.

“오크와 몬스터들에게 몇 번 습격을 당하면서 서적의 상당부분을 소실했다.”

“협상할 때는 아주 많다더니.”

“많다의 기준은 상대적인 거다.”

“그래 뭐, 내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내가 서고에 첫 발을 내딛자 토비가 따라붙으며 신신당부했다.

“잊지 마라. 가지고 갈 수 있는 마법서적은 단 하나뿐이다.”

“알고 있어.”

서고가 작긴 해도 웬만한 도서관 한층 정도는 됐다. 그래도 미리 봐둔 마법서적이 있기에 나는 서고를 매일 들리는 사람처럼 익숙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역시 이거지.”

걷다가 서고의 중간쯤에 멈춰서 마법서적을 뽑았는데 내가 뽑은 마법서적은 메테오 콜링이었다.

[메테오 콜링]

등급 - 유니크

효과 – [기본 데미지 100] + [마력 계수 0.5]

소모 – 마력 150

제한 – 쿨 타임 300분 / (마력 계수 0.5)분

설명 – 아스트랄계에서 운석을 소환하여 원하는 표적에 떨어뜨립니다. 캐스팅 시간과 마력을 많이 소모할수록 더 강하고 커다란 운석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습득조건 – 순수 마력 능력치 100이상. 마력 량 총합 200이상.

메테오 콜링은 원하는 표적에 운석을 떨어뜨리는 마법으로 메테오 스트라이크보다 위력은 떨어지지만 쿨 타임이 짧아 쓸 만한 마법이었다.

“이걸로 할게.”

“알겠다.”

쓸 만한 마법서적이 더 있었다면 억지를 부렸겠지만 이것 외에는 쓸 만한 게 없었다. 나는 토비의 확인을 받고 서고를 나와서 메테오 콜링을 곧바로 익혔다.

“그럼 편히 쉬어라.”

“수고.”

다시 토비의 안내를 받고 숙소로 돌아오니 휴지는 자고 있었다. 우리의 공로를 높게 쳐줬는지 거실도 있고 방도 두 개인데다가 화장실도 딸린 숙소였다.

“귀빈 모실 줄을 아는데. 천마신공이나 운용하면서 자볼까.”

나는 휴지를 남겨두고 다른 방으로 갔다.

“어!”

그런데 남은 방에는 기쉬네가 있었다.

“이제 왔나?”

“뭐야, 여기 너희 집이었어?”

어쩐지 손님맞이용 숙소치고는 지나치게 좋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쉬네가 겉옷을 술술 벗어 던지는 게 아닌가.

“주은성. 밤에는 얼마나 강한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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