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54화 (54/127)

# 54

“무슨 소리야.”

내가 귀를 의심하고 소리쳤다.

“너 내 마음에 들었어. 너처럼 강한 남자를 기다렸거든.”

기쉬네가 말을 이었다.

“마침 운이 좋아. 임신 기간이야.”

“뭐야? 너 여자였냐?”

“그럼 남자로 알았어?”

분명 기쉬네는 여자처럼 예뻤지만 나이가 좀 있었다. 특히 단발머리에 가슴이 거의 없고 목소리가 허스키해서 나는 영락없이 남자인 줄 알았다.

“여왕의 호위기사라며.”

“무슨 소리야?”

순간 나는 차별적인 발언이 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여자가 여왕의 호위를 한다는 게 이상하잖아?”

“여자가 여왕님의 호위기사인 게 당연하잖아.”

“아, 그러고 보니 모계사회라고···.”

뒤늦게 휴지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올라와.”

기쉬네가 침대시트를 팡팡 치며 말했다.

“싫어.”

내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왜.”

“나는 가정을 만들 생각이 없어.”

“책임지라고 안 해. 그냥 내 안에 네 씨만 뿌려줘.”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책임 없는 씨뿌리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방종권유는 실로 무서운 소리였다.

“그리고 넌 내 취향이 아냐.”

“이렇게 매력적인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보다 예쁜 여자를 많이 만나봤어. 너 정도는 나한테 호박으로 밖에 안 보여.”

사실 참외나 메론 정도로 보였지만 과장해서 말했다.

“흐응.”

기쉬네가 요염한 숨소리를 냈다.

“전투에서는 그렇게 강한 남자가 침대 위에서는 약한가 보지?”

그녀는 전략을 바꾼 듯했다.

“도발해도 소용없어.”

“도발이 아닌데?”

“이러는 거 유치해. 그만하자.”

“······.”

기쉬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속옷까지 완전히 벗어버렸다. 창문 밖에서 달빛이 들어왔는데 새하얀 여체가 달빛에 반사돼 빛났다.

“한 번만 해줘. 제발.”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남자다. 매끈한 몸매의 미인 여성이 다짜고짜 해달라고 하는데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불경을 외워도 이건 버티기가 힘들다.

“해줘. 해줘. 해줘. 해줘. 응?”

그녀는 아이처럼 보챘다.

“떼쓰지 마.”

나는 이미 그 짓의 쾌락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경험이 없었다면 쉽게 내쳤을 텐데.

“후우.”

나는 수많은 번뇌가 담긴 한숨을 내쉬고 한참 만에 결정을 내렸다.

“좋아. 대신 난 정말로 책임 안 진다.”

“걱정 마. 우리 서리 엘프 족은 원래 남편이 여러 명이니까.”

“일처다부제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얼른 들어와.”

기쉬네가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활짝 펼쳤다. 나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안았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과 달리 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만약 임신해서 인간 아이가 태어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이 떠올라서 물었다.

문득 동양인 부부의 출산에서 흑인이나 백인 아이가 태어났다는 도시괴담 같은 루머가 떠올라서였다.

“엘프는 종족의 근원이 강해. 피가 섞여도 겉모습은 보통은 엘프가 발현 돼. 뭐···, 오크보다는 종족의 근원이 약하지만 인간보다는 확실히 강해.”

그녀는 경험이 있는 듯 말했다.

나는 순간 휴지가 떠올랐다. 휴지도 하프 드래곤이지만 인간형태의 외형은 이들과 똑같았다.

“시작한다.”

“응. 얼른 와줘.”

이윽고 우리는 몸을 섞었다. 헐떡거림과 비명 같은 교성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한창 몸을 흔들고 있는데 기쉬네가 말했다.

“주은성.”

“왜.”

“너 일반적인 크기를 넘어섰구나.”

나는 슬쩍 다리 사이의 내 주니어를 봤다.

“이 정도면 평균 아닌가?”

“얼굴은 순둥이면서 아래는 아주 흉악한 범죄자야. 강해. 너무 강해. 아랫배가 찌르르 우는 것 같아.”

그녀의 몸을 세우고 크고 펑퍼짐한 둔덕 사이에서 오랫동안 왔다갔다 하니 결과가 나왔다.

기쉬네가 말했다.

“하아. 더 하자.”

“뭐?”

“너 나랑 몸이 잘 맞는 것 같아. 이렇게 달아오른 적 처음이야.”

나도 오랜만의 행위라서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하면 정말 위험할 것 같았다.

“더 하자. 응?”

하지만 기쉬네가 커다란 엉덩이를 세우고 실룩거리자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날이 샐 때까지 바쁘게 움직였다.

* * *

다음 날 여왕에게 적당히 에둘러 말하고 우리는 베이징에 있는 바벨의 탑으로 향했다. 유적에 봉인된 봉인석의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선 만렙이 필수였다.

날아가는 중에 휴지의 등에 타서 쉬고 있는데 휴지가 말했다.

“주인.”

“왜.”

“피곤해 보인다.”

“그러냐.”

“얼굴이 해파리처럼 퍼졌다. 파리하게 질렸다.”

“겉으로 보기에도 내 상태가 많이 나쁜가 보네.”

“응.”

나는 기가 빨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마력뿐만이 아니라 체력까지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기쉬네와 몇 번 하고 마력이 한 뭉텅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무시하고 여러 차례 했더니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포션이 많아서 다행이야.”

“뭐가 말이냐, 주인?”

“아무것도 아냐.”

정신이 팔팔해질 때쯤 바벨의 탑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위와 살얼음의 길. 대륙의 중앙에 우뚝 솟은 마왕의 탑, 바벨의 탑.

탑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웬만한 도시 한 개 넓이의 검은 탑이 100층으로, 대기권을 뚫고 세워져 있었기에 안개가 걷히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오랜만이네.”

“주인. 와본 적 있는 거냐?”

“그냥 옛날에 자주 왔었지.”

문득 아르카디아에서 강요되었던 용사의 운명이 떠올랐다. 나는 생면부지의 주민들을 위해서 탑을 올랐었다.

곳곳에 시련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탑을 오르면서 생각했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중2병적인 감성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무언가에 홀렸는지도 모르겠다. 미신을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혼자 탑을 오르는 지구인의 고독은 이따금씩 운명을 믿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마왕도 참 끈질기네. 여기까지 도망쳐 와서 또 새살림을 차리다니.”

우리는 탑 인근의 수풀에 착지했다. 바벨의 탑 인근에는 마왕이 뿌려놓은 경험치 좋고 영양가 높은 몬스터들이 많았다.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 주인.”

휴지가 탑 주위의 공터를 쳐다보며 말했다. 탑의 오랜 세월처럼 흔적이 자리한 그곳엔 수많은 무덤과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탑을 지키는 망자들이야. 탑에 먹힌 사람들이지.”

“먹힌 사람들?”

“세상을 구하려다가 실패한 사람들.”

바벨의 탑은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마왕만의 독자적인 공간이었다. 탑을 오르는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어버리면 탑에 귀속되어 망자가 돼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왕을 죽이기 위해 탑을 올랐는데, 마왕을 지키는 충직한 부하로 부활해버리는 것이다.

“너 실드 단단히 펼치고 있어라.”

“왜?”

“얼른.”

“알았다, 주인.”

나는 공터의 비석들을 향해 메테오 콜링 마법을 사용했다. 망자를 해방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무덤과 비석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봉인석의 개념과 비슷한데.”

내가 메테오 콜링 마법을 사용하자 내 앞에 푸른빛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캐스팅 시간을 늘리면서 마력을 꽤 쏟아붓자 마법진의 지름이 3미터 정도로 훅 커졌다.

마법진에 마력을 붓는 것은 페트병 입구에 깔때기를 대고 물을 붓는 것과 비슷했다. 단번에 많은 마력을 쏟아붓지 않는다면 마력은 결코 헛되게 낭비되지 않는다.

지이이이잉!

손바닥을 펼치고 탄착지를 무덤 쪽으로 지정했다. 방아쇠를 당기듯 마법을 발동하자 눈앞의 마법진과 대응한 마법진이 저 멀리 구름너머의 하늘에서 생겨났다. 크기는 눈앞의 것보다 훨씬 컸다. 지름이 10미터는 훨씬 넘어보였다.

쿠구구구구궁!

후끈한 열기가 뺨 위로 느껴지고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운석이 비스듬히 낙하했다. 원형의 운석은 시뻘겋게 타오르며 주변의 어둠을 찢어발기고 숲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우아아아아앗!”

휴지가 놀라서 폴짝 뛰었다. 운석이 구름을 가르고 내려와 무덤과 비석에 내리 꽂혔다.

콰과과과과과광!

커다란 폭발음이 지상전역을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고 지진이 나면서 새하얀 기류가 뺨을 스치고 몰아쳤다.

휴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실드가 깨졌는지 거센 바람에 휴지의 볼 살이 밀려 가관이었다.

푸스스스스스슷!

팔을 올려 눈을 보호하고 폭발의 근원지를 살펴보니 사막처럼 땅이 마르고 커다란 분화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수증기 같은 열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지고 하늘 위로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라 있었다.

“굉장하다, 주인!”

휴지가 공중제비를 돌며 탄성을 내질렀다. 눈앞에선 빛의 글귀가 떠올라 레벨 업을 알리고 있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탑 근처의 무덤과 비석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폭발적인 레벨 업을 했다. 나는 뭉텅 사라진 마력 탓에 살짝 비틀거렸다.

“마력을 너무 많이 부었다. 너무 오버했는데.”

“하마터면 바람에 날려가서 나무밑동에 처박힐 뻔했다, 주인.”

아이템을 확인하기 위해 뛰어가는 휴지를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정보 창을 열고 레벨을 확인했다.

<주은성>

레벨: 782(윤회+1) [경험치 69843/133087]

[체력: 470] [감각: 308]

[의지: 125] [마력: 500]

물리 공격: 470

마법 공격: 500

물리 방어: 360  저항력: 125

마법 방어: 250  회피력: 308

[미 분배 포인트: 381]

“윤회스킬로 경험치가 10배라도 단숨에 만렙은 무리구나.”

이제 782레벨. 그래도 나쁘지 않은 레벨 업 속도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근시일 내에 1000레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예정대로 탑에 올라서 레벨 업을 해볼까.”

대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쥐고 탑의 입구로 향하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기척들이 느껴졌다. 휴지가 급히 돌아와 말했다.

“주인.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게. 많이도 왔네.”

“폭발 소리를 듣고 근처에서 몰려온 것 같다.”

생각지도 못 한 메테오 콜링의 부가적인 효과였다. 잔치소리를 듣고 몰려온 거지 떼들처럼 폭발소리를 듣고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이러면 굳이 탑에 올라갈 필요가 없겠는데.”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탑에 오르지 않는 게 레벨 업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나포션을 벌컥벌컥 마신 나는 탐색스킬을 활성화해서 나타난 몬스터들을 향해 탄지공을 날렸다. 탑 주변의 몬스터들이라 레벨이 높고 강했다. 아이템을 주워오려는 휴지를 오히려 말렸다.

메테오 콜링의 쿨 타임이 차오르면 다시 주변에 분화구를 만들어 폭발을 일으켰고, 그러면 폭발소리를 듣고 다시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게 계속 사냥을 반복했다. 우리는 며칠간 탑 주변에 기거하면서 열정적인 레벨 업을 했다. 내가 만렙에 도달한 것은 예상보다 며칠을 더 초과해 한 달쯤 지나서였다.

* * *

한 달 만에 서리 엘프 족의 마을에 도착했더니 여왕이 나를 몹시 반겼다. 기쉬네도 버선발로 뛰어와 먼발치서 나를 쳐다봤는데 눈빛이 애틋해서 당장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무척 곤란했다.

우리는 하룻밤을 더 쉬고 봉인석이 있는 유적으로 향했다. 여왕이 자기들도 악마의 실체를 보고 싶다고 말해서 불가피하게 대군을 이끌고 유적으로 들어갔다.

유적 안에 있는 대부분의 함정들은 모두 파괴했지만 혹시나 몰라서 내가 앞장섰다. 그러나 별 건 없었다. 처음 진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벽면에 날개 달린 드워프의 벽화가 있었는데 휴지가 그걸 보면서 또 감탄했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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