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내 주도로 남은 함정들도 모두 파괴하면서 우리는 금세 봉인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프들이 무기를 든 채 경계하고 나는 숨을 죽이며 봉인석 앞에 다가섰다. 뒤에서 기쉬네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라, 주은성.”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석의 표면에 손을 댔다. 순간 빛이 반짝였다. 내 손에서 빛이 나는 건 줄 알았는데 비석이 갈라지고 그 틈새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인!”
휴지가 소리쳤다.
“괜찮아.”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제지하고 다시 봉인석을 쳐다봤다. 엘프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경계를 한층 더 강화했고 마침내 봉인석의 비석이 반으로 갈라졌다.
쩌저저저정!
경쾌한 소리가 났다. 만년한철이 부서지는 소리보다 더 경쾌했는데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빛이 걷히면서 봉인석에서 뭔가가 튀어나왔을 때 휴지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어! 날개 달린 드워프다!”
엘프들도 경악했다.
“저것이 악마의 정체!”
나 또한 놀랐는데 나는 황당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해로운 곤충!”
봉인석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소리쳤다.
“용사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고 조용해졌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하.”
기가 찼다.
“네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데?”
“왜 한숨을 쉬세요!”
“한숨이 안 나오겠냐, 지금!”
“용사님! 저는 오랫동안 용사님을 기다렸단 말이에요!”
봉인석에 갇혀 있던 악마의 정체는 요정이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날 줄기차게 쫓아다녔던 요정!
“날개 달린 드워프와 아는 사이냐, 주인?”
휴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아니.”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요정이 목을 세우고 소리쳤다.
“용사님! 제가 용사님을 기다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나는 황당해서 멀거니 섰고 엘프들은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왕이 요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우리 부족을 괴롭힌 악마의 정체야?”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듯했다.
“아마도.”
요정이 끼어 들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갇혀 있는 게 너무 힘들었는 걸! 누구라도 날 구해줬으면 했어요!”
그녀는 요정답게 덩치가 사람 머리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할 때마다 바락바락 고함을 쳤는데 그래도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맙소사!”
여왕이 이마를 짚고 주저앉았다. 요정이 빙그르르 날아서 내 몸을 한 바퀴 돌았다.
“그치만 어쩔 수 없었는 걸! 예언자를 내세웠지만 용사님이 들어주시지 않았잖아요!”
“예언자?”
“네!”
순간 나는 미녀길드의 최소영이 떠올랐다. 그들이 말하는 유적이 이것이었나?
요정이 말을 이었다.
“용사님! 신께서 당신의 보좌로 나를 이곳으로 보냈었어요!”
나는 콧등을 찡그렸다.
“신?”
“네!”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어찌나 해맑은지 도리어 한 대 쥐어 패주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데?”
“왜 마왕을 곧장 죽이지 않는 거죠!”
“내 마음이지.”
요정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신께서는 용사님이 얼른 마왕을 죽이길 원하세요!”
여전히 건방지고 제멋대로였다.
“일단 저와 계약을 해주세요!”
“계약?”
“마력을 아낀다고 봉인돼 있었는데 그래도 버티기 힘들어요! 이대로라면 며칠을 못 버티고 몸이 사라질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화를 냈다.
“이게 다 소원석 때문이에요! 누가 회귀를 소원으로 빈 거야! 그 탓에 이쪽과 저쪽의 차원 축이 완전히 엇갈렸다고요!”
내가 물었다.
“소원석을 알고 있나?”
“네!”
“네가 어떻게 아는데?”
“지금 소원석 때문에 난리에요! 덕분에 용사님과도 이렇게 힘들게 만난 걸요!”
역시 소원석은 이들의 영향력 밖에 있는 힘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소원석이 정확히 뭐지?”
“소원을 빌 수 있는 보석이요!”
“어떤 소원이더라도?”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가 곤란한 듯했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네가 여기 온 용건은 뭔데?”
“용사님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함이지요!”
“올바르게?”
“용사님이 신님을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용사님은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해야 해요!”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해?
나는 유지미에게서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마왕을 죽이면 이곳 세상이 멸망한다던데?”
순간 요정은 멈칫 굳었다.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에요! 마왕을 죽이면 평화가 와요!”
“구라치고 있네.”
“거짓말이 아니에요!”
나는 일단 판단을 유예하고 몸을 돌렸다. 요정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짙게 들었다. 손을 턴 나는 여왕에게 말했다.
“악마 퇴치 완료다. 이제 보상을 줘.”
여왕은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요정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죽이라고?”
“그래.”
요정을 보고 물었다.
“그렇다는데? 너 죽을래?”
요정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히이이익!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 * *
미국에서는 바벨의 탑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드론으로 바벨의 탑을 관찰했는데 최근 한 달간 이상 현상을 식별했다.
“어제도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미국헌터협회 소속 요원 밥 말라리가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아주 사막을 만들 작정인가 보군.”
헌터협회의 회장 제이슨 모라즈가 보고서를 받았다.
그들로서는 의아하던 참이었다. 악의 결집체라 불리는 탑의 하늘에서 운석이 숭숭 떨어지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위기를 겨우 이겨낸 미국의 헌터수준은 한국보다 높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다른 나라가 대개 그러는 것처럼,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가 단위로 마정석을 구매했고, 어마어마한 마정석을 바탕으로 차폐막을 넓게 설치했다.
차폐막 안에서는 화약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한국의 유지미 헌터가 퍼뜨린 정보였다.
대다수의 국가들은 차폐막이 성장의 족쇄인 줄 모르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차폐막의 족쇄효과를 알고 있어서 차폐막을 줄이는 한편, 화약무기들을 전기무기나 마석을 이용한 무기로 바꾸고 있는 추세였다. 그래도 한참이나 늦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아냈나?”
제이슨 모라즈가 보고서를 넘기며 물었다.
“예.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드론이 부서져서 곤란했었는데 가까스로 신원확인을 완료했습니다.”
“신원을 확인했다고?”
“예.”
부하의 말에 제이슨 모라즈가 놀라서 두 눈을 치켜떴다.
“누군데?”
말라리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몇 달 전 우리나라에 이민을 신청했던 한국 쪽 시민입니다.”
“오, 그럼 이제 미국인이라는 소린가?”
“예. 그렇습니다.”
역시 미국의 위세는 대단하다. 세상이 발칵 뒤집혀졌어도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미국의 시민이 되길 원한다.
“이름이 뭔데?”
“주은성이라는 자입니다.”
“주은성!”
제이슨 모라즈가 놀라서 탄성을 질렀다. 주은성.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미국은 이미 한국이 뒤집혔다는 것도 알았고 그 중심에 주은성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사람이 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그는 유지미 헌터의 뒤를 이을 생각이 아니었나?”
“조사해본 결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유지미 헌터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말라리가 추가로 보고서를 건넸다. 모라즈가 즉시 받아들고 보고서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보고서가 넘어갈 때마다 모라즈의 낯 위로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 * *
사건이 일단락되고 여왕으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반쯤 흐지부지돼서 그냥은 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여왕은 냉큼 줬다. 엘프 족은 신뢰가 있는 종족이었다.
“신기한 목걸이네. 포탈 기능이 있는 건가?”
나는 숙소로 돌아와 목걸이를 확인하고 있었다. 일단 받은 것은 메자이의 부적이라는 목걸이였다.
[메자이의 부적]
설명 – 서리 엘프 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목걸이. 특정 장소 A, B를 지정해서 서로 간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제한 – 쿨 타임 하루.
내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확인하고 있는데 누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자 밖에는 기쉬네가 서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내가 유적 안내원이야.”
기쉬네가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면서 말했다. 유적까지의 안내는 엘프 족에게 받기로 했다. 그녀가 이번 여정의 안내원 역할인 듯했다.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지금은 밤이야.”
하지만 출발은 내일 아침이었다. 내가 하늘을 가리키자 기쉬네가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알면서.”
“뭐가?”
“임신기간이라고 했잖아.”
순간 나는 뒤통수를 철퇴로 얻어맞은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생각해보니 휴지가 말하길 이들은 가임기 동안 그 짓만 한다고 했다.
“무섭다, 너.”
“옷을 벗었으면 씨라도 받아야지.”
기쉬네가 그들만의 속담으로 말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벗은 옷 다시 입으면 안 되나?”
“안 돼.”
“될 것 같은데.”
그때 요정이 파리처럼 날아왔다.
“용사님! 계약!”
요정은 끈질기게 계약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쉬네가 요정을 보고 소리쳤다.
“악마!”
“저는 악마가 아니에요! 요정이에요!”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엘프 족이 홀린 상태로 밤길을 헤매서 위험에 처했는지 알아? 죽은 엘프가 없기에 망정이지.”
“죄송해요!”
나는 생각했다.
신이라는 놈은 정말 여러 명을 물 먹이는 구나.
대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쯤은 감수하라, 뭐 그런 마인드일까.
기쉬네가 말했다.
“미안. 갑자기 할 기분이 확 떨어지네.”
“미안할 것까지야.”
오히려 고마웠다. 이번에도 하고 나면 기가 다 빨릴 것 같아서 걱정됐었으니까.
“아침에 다시 올게. 쉬고 있어.”
“조심히 돌아가.”
기쉬네가 돌아가고 나는 요정을 불렀다.
요정이 잔뜩 기대해서 날아왔다.
“이제 계약할 마음이 생기셨나요! 용사님!”
“아니, 너 하는 것 봐서.”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일단 내가 묻는 걸 제대로 답변해줘.”
“그럼 계약 인가요!”
요정이 내 주변을 날면서 소리쳤다.
나는 묵살하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까 전에 물었던 건데, 다시 물어볼게. 마왕을 죽이면 이곳 세상이 멸망하지?”
나는 탐색스킬을 사용하고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순수 마력 능력치가 높아진 이후로 작은 마력의 파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요정을 막 깨웠을 때 느낀 건데 녀석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마력파동이 달라졌다.
“아뇨!”
마력파동이 달라졌다. 역시 거짓말이었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좋아, 그럼 소원석은 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물건이냐?”
“아뇨!”
요정이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마력파동만으로 대답의 진위를 알 수 있었다.
“혹시 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냐?”
“신께서는 분명 존재하세요!”
요정의 대답에 나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