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56화 (56/127)

# 56

“혹시 신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냐?”

“······.”

요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좋아, 이제 꺼져라.”

“네!?”

요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계약 해주신다면서요!”

“해주겠다고 말한 적 없어.”

정말이다. 나는 해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는 행동을 봐서 결정한다고 했지, 단언한 적은 없었다.

“용사님은 거짓말쟁이야!”

요정이 소리치고 훌훌 날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요정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무언가를 확신할 수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 나는 유적으로 출발하기 전 메자이의 부적을 사용해 위치를 지정해 놨다.

임신기간 동안만이라도 같이 있어달라는 기쉬네의 말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살을 맞대고 몸을 섞은 정이 이래서 무섭나 보다.

“뭐 하냐, 주인?”

“아무것도 아냐.”

괜히 속마음이 찝찝해서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숙소 뒤편에 메자이의 부적을 사용했다. 그러자 부적의 정보 아래에 위치 란이 생겨났는데 저장한 위치의 좌표도 함께 새겨졌다.

[메자이의 부적]

설명 – 서리 엘프 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목걸이. 특정 장소 A, B를 지정해서 서로 간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제한 – 쿨 타임 하루.

지정된 위치 A – 52T CL XXXX XXXX···.

그 후 우리는 적당히 빵과 스프로 아침식사를 하고 마을을 나섰다. 산과 들을 지나고 백두산 천지를 건너면서 해가 중천에 걸릴 때쯤에는 도착할 줄 알았는데 그때까지 우리는 도착하지 못 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서 길을 찾느라 불가피하게 낮게 날았던 까닭이었다. 그 탓에 몬스터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의 여정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용사님! 계약! 계약! 계약! 계약! 계약 해주세요!”

요정은 여전히 시끄럽게 계약타령을 했는데 그러다가 휴지에게 한 대 맞았다.

“꽥!”

“이거 더럽게 시끄럽다, 주인.”

“원래 민폐만 끼치는 놈이야.”

나는 새삼 아르카디아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강제로 소환당한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요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는데 요정은 웃기게도 항상 어떤 임무를 던져놓고서 ‘아니면 말고’식으로 책임을 졌다. 덕분에 구르는 것은 나의 몫이었고, 고생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지하에서 솟아난 천연온천과 돌산이 있는 바위들을 지나치고 한참을 걸었다.

갑자기 기쉬네가 멈춰 섰다.

“여기다, 주은성.”

그녀는 바위의 틈새를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1평 남짓한 새까만 구멍이 있었다.

“평범한 싱크 홀 같은데.”

내가 발밑의 구덩이를 슬쩍 쳐다보고 말했다. 구멍이 깊어서인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탐색.’

탐색스킬을 사용해서 확인해보니 입구에서 영롱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과연 내가 찾던 유적이 맞았다.

“확실하네. 안내하느라 고생했어.”

나는 기쉬네에게 고마움과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왜.”

내가 도리도리질의 의미를 물었다.

“왜라니.”

“무슨 뜻이야?”

“나도 같이 가야지.”

“뭐?”

나는 의아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왠지 네가 그냥 가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

그 말에 내가 더 불안해졌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자꾸 내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

이거 설마 의부증? 서리 엘프 종족에게 그런 면모가 있나?

그때 휴지가 어부바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등을 팡팡 쳤다.

“주인. 어서 내 등에 타라.”

기쉬네가 휴지를 째려봤는데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따로 내려가자.”

우리는 공중을 날아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하늘에 해가 쨍쨍했는데 구멍 안은 몹시 어두웠다. 유적이 대개 그렇듯 마법적인 처리가 돼 있어서 외부의 빛이 한줌도 들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내려가서 바닥에 착지를 하니 일행들이 소란을 피웠다.

“마법사용이 안 된다, 주인.”

“어두워. 주은성.”

“용사님! 계약! 계약! 계약!”

나는 아공간에서 전등을 꺼냈다. 손의 감각만으로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등을 켜서 주변을 살펴보니 눈앞으로 긴 통로가 있었다. 통로를 보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똑같겠네. 유적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없어.”

암호가 있고 몬스터와 함정이 있겠지.

휴지가 맞장구쳤다.

“공감한다, 주인.”

우리는 안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복도의 벽면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벽에 아무것도 없었다. 매번 있던 벽화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요정의 얼굴을 쳐다보게 됐는데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악귀에 씌인 것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음흉하게 웃고 있었는데 고통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 같은 괴상한 표정이었다.

“뭐야··· 징그럽게.”

계약을 안 해줘서 저러나.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네.

이윽고 첫 번째 문에 도착했다. 내가 앞장서서 문을 먼저 확인했는데 예전의 유적들과 달리 이번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뭐야? 이번에는 암호 방식이 아닌 건가?”

“주변에 글 같은 것도 안 적혀 있다, 주인.”

주먹으로 문을 부수려는데 기쉬네가 끼어들었다.

“그냥 평범한 문 아냐?”

나는 그녀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문을 가볍게 밀어봤다. 그러자 출구가 미끄러지듯 열렸다.

“정말이네. 평범한 문이었어.”

“잘 됐다, 주인.”

이후로 우리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앞장을 서고 뒤에서 남은 일행들이 따라붙었다. 복도의 끝에는 항상 평범한 문이 있었는데 별 건 없었다. 손으로 밀면 바퀴가 달린 것처럼 출구가 쉽게 열렸다.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어두워져서 나는 전등을 개별적으로 지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방에 어둠이 안개처럼 끼어있었다. 아공간에서 전등을 꺼내 건네주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

어느새 복도에 나밖에 없었다.

뭐야? 얘네들 다 어디 간 거야?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방금 전까지 같이 걷고 있던 일행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디 갔어?”

나는 멈춰 서서 일행들의 이름을 불러봤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탐색스킬을 사용했지만 식별되는 것도 없었다.

“이런 종류의 함정은 처음인데.”

환각이나 환영 종류의 함정인 듯했다.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어두운 상태가 지속되자 나중에는 사방이 깜깜해서 전등의 불빛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기어코 방향감각도 상실하고 나는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됐다. 오른쪽과 왼쪽도 도통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신기한 함정이네.

발로 땅을 찼지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손으로 옆을 쳤지만 마찬가지로 반발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도에 떠밀려 부유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충족감이 온몸을 감싸고 압박감이 피부를 간지럽혀서 굉장히 편안했다. 꼭 누군가가 전신을 마사지해주는 기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

안 돼! 잠들면 안 돼!

순간 잠들 뻔했다. 나는 환각과 수면욕구가 이들의 공격수단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에서 이겨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천마신공을 운용해 내력을 끓어 올렸다. 한 번 정신을 집중하자 주변의 어둠이 서서히 걷혔고 몸에 힘을 주자 전등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경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이 갑자기 솟구치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아났다.

“어!”

내 몸에 이상한 슬라임 같은 점액질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것들이 환각의 원인인 듯했다.

“끈적끈적해. 무슨 마사지 오일 같잖아.”

주변을 둘러보자 휴지와 기쉬네도 점액질에 먹혀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흔들어서 깨웠는데 둘 다 점액질에 흠뻑 젖어있어서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

“얘는 또 어디 갔어?”

그런데 이상했다. 요정이 보이지 않아서 둘러봤는데 요정은 멀쩡히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마치 불장난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보고 소리쳤다.

“용사님!”

“뭐야? 넌 왜 일어나 있어?”

“저도 몰라요!”

그러더니 또 계약타령이었다.

“용사님! 그것보다! 계약! 계약 해주세요! 계약!”

“싫어.”

역시 뭔가 이상해.

그 뒤로도 환각계통의 함정은 계속 됐다. 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일행들을 깨웠고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요정은 두 번째 함정부터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기절해 있었는데, 그 행동이 진짜 함정에 먹힌 건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비슷한 함정을 세 번쯤 지나치고 용암이 흐르는 외나무다리와 불기둥이 솟구치는 외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마저 크게 위협은 안 됐다. 요정은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내 뒤를 잘 따라왔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강했었나?

강한 의구심이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강철 가시가 솟아오르는 함정을 건너고 우리는 다시 문 앞에 서게 됐다. 내가 문을 밀면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내 바람이 하늘에 닿았을까.

문 뒤에서 넓은 공터가 나왔다. 더 이상 함정도 보이지 않았는데 다른 것들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만 있었다.

“끝인 거야?”

기쉬네가 물었다.

“아니, 잘 모르겠는데.”

내가 탐색스킬을 사용해보니 일단 식별되는 건 없었다.

“여기 맞아? 아무것도 안 보여.”

“여왕님께선 여기라고 했는데.”

“글자 같은 것도 안 보인다, 주인.”

요정만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는데 그 침묵이 소름 끼쳤다. 그때 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건을 갖춘 자. 너만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소원석!!”

그러자 휴지와 기쉬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요정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아무것도 없자 그들은 고개를 갸웃 숙였다.

목소리가 말했다.

-속마음으로 말해라. 안 그러면 정신병자 취급 받는다.

‘아!’

나는 일행들에게 급히 손을 흔들어 보이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네가 소원석이냐?’

-나는 소원석이 아니다.

‘뭐? 소원석이 아니라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또 헛고생인가.

‘무슨 소리야? 소원석이 아니라니?’

불안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 따위가 아니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직 방법만을 가르쳐줄 뿐이지.

‘방법을 가르쳐줄 뿐이라고?’

-그렇다.

생각해보면 소원석이라는 명칭은 본질을 벗어나 멋대로 지은 것일 수도 있었다. 깨달은 나는 가장 원했던 내용을 물었다.

‘그럼 신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줘.’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질문이었는데 에둘러 말하기가 이상해서 그냥 바로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신을 죽이는 방법?

‘그래.’

-그럼 제단 앞에 서라.

‘제단?’

-마음속으로 제단을 부르면 제단이 나타날 거다.

목소리의 말대로 마음속으로 제단을 상상하자 눈앞에 제단이 생겨났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직사각형의 제단이었다.

-일어서서 손을 뻗어라.

시키는 대로 일어서서 손을 뻗자 이번에는 제단의 가운데에서 새하얀 구슬이 두둥실 떠올랐다.

-구슬을 잡고 질문해라. 그러면 된다.

‘왜 이렇게 복잡해?’

-추상적인 질문을 이해하려면 너와 직접 접촉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제대로 된 방법을 가르쳐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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