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57화 (57/127)

# 57

나는 구슬을 쥐고서 말했다.

‘그런데 어떤 소원이든 물을 수 있는 거지?’

목소리가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소원이 아니다. 어떤 것이든 방법을 가르쳐줄 뿐이다.

‘그거나 이거나. 같은 말 아냐?’

-둘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쳇, 더럽게 깐깐한 놈이네.

‘그래, 알았어. 네 똥 굵다.’

-나는 똥을 싸지 않는다. 배변활동은 하위 계층의 저급하고 천박한 자들이 하는 행동이다.

‘······.’

나는 구슬을 쥔 손에 꽉 힘을 줬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서 힘을 좀 줬는데 구슬은 조금의 변화 없이 멀쩡했다.

엄청 단단한 옥이야.

포기한 나는 다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신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줘.’

목소리가 대답했다.

-신을 죽이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다.

‘왜?’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

나는 놀랐다. 순간 뒤통수가 시큰거렸다.

요정은 분명 신이 존재한다고 했었는데?

-네 착각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다른 생각도 읽네.’

-접촉하고 있을 땐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네가 말하기 곤란해 하는 것 까지도···.

그 말에 소름이 끼쳐서 구슬에서 손을 떼려다가 다시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신이 없다고?’

-그래.

‘나는 신의 부름에 다른 차원으로 가서 개고생까지 했었는데.’

나는 녀석이 내 생각을 읽기 쉽게 아르카디아에서의 기억을 되새겼다.

게다가 여기 오기 전에는 요정과의 진실게임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었다. 요정은 신이 여러 명이냐는 질문에 마력 파동이 훅 달라졌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주은성. 넌 지금까지 속고 있었던 거다.

‘속고 있었다니?’

나는 반문했다.

-신은 거창하지 않다. 영혼이 있다면 누구나 신이다. 네가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세상에 없다.

‘무슨 소리야?’

-모든 영혼이 신이라는 거다. 자기 자신을 믿는 힘. 스스로를 믿고 행동하는 본심. 그릇의 크기나 모양에 따라 질과 양은 다르지만, 영혼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신이다. 주은성, 너 자신도 이미 신이다.

나는 황당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럼 해충이나 벌레도 신이냐!’

-곤충은 영혼이 없다. 영혼이 있는 건 오직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들뿐이다. 본능으로 행동하는 생명체는 신이 아니다.

나는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아서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내가 속고 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네가 요정이라고 믿고 있는 존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요정이 아니다.

‘뭐?’

눈이 커졌다. 뒤통수가 더욱 시큰거렸다.

-너는 다른 종족에게 놀아나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종족?’

-저기 날개 달린 드워프 종족 말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요정을 쳐다봤다. 요정도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철없는 존재일 뿐이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줘.’

소원석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 10초쯤 지났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요정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지구보다 상위 차원에서 사는 생명체다.

‘상위 차원에서 사는 생명체?’

-그래. 네 언어로 설명하자면 드워프 족의 한 계통이다. 인간과 비슷하게 흑인, 백인, 황인처럼 드워프 족의 한 갈래로 구분지어지는 종족이지.

‘잠깐만. 그럼 저 녀석이 신의 대리인이나, 안내자 같은 것도 아니었단 거냐?

-그렇다. 요정도 아니고, 신의 대리인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럼 뭐야? 대체 왜 나를 도와준 건데?’

마음속으로 다시 묻자 목소리가 말했다.

-도와준 게 아니다. 네 상식에 맞춰 설명하자면 그들은 도둑과 비슷하다. 규칙을 지키는 게 다르지만.

‘도둑과 비슷하다고?’

확실히 그간 요정은 양심 없는 행동을 많이 하긴 했었다. 나는 요정의 삼각형 양심이 다 닳아져서 동그란 모양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도둑과 비슷한 무언가였다니.

-그들 세계에도 그들만의 규칙이 있다. 너희 세계의 법 같은 거다. 그래서 법에 저촉되지 않게 복잡하게 행동하는 거다. 목적은 매우 단순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너를 속인 날개 달린 드워프 족은 상위계층에서 차원을 판매하는 업자다. 차원을 지배하는 거주자들을 멸망시키고 차원의 주인들이 사라지면 그 차원을 판매한다.

‘차원을 판매한다고?’

얘기가 점점 더 흥미로워 진다. 나는 마음속 귀를 열고 들었다.

-네 세계의 언어를 빌려서 설명하겠다. 점유취득시효라는 게 있다. 주인 없는 땅에 어떤 인간이 몇 십 년간 거주하면 거주한 사람에게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제도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왜?’

-하지만 요즘 너희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있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몬스터가 살고 있는 땅 빼고는 없겠지?’

확실히 대격변이 일어난 이후인 지금도 주인 없는 땅은 거의 없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이라면 사유지가 아니면 국유지다.

-차원도 마찬가지다. 쓸 만한 차원엔 이미 영혼이 있는 존재가 지배하고 있다. 이곳 지구처럼 말이다. 지구는 인간이라는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순간 멋쩍어서 끼어들었다.

‘인간이 신이라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네.’

-신에도 단계가 있다. 지구의 인간들은 발아되지 않은 씨앗과 비슷하다. 가능성만을 품고 있는 단계지.

‘그 말은 밑바닥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정답이다. 밑바닥 부근이다. 지구의 인간들보다 아래층에 사는 존재들도 있지만, 어쨌든 지구의 인간들이 밑바닥 부근이라는 건 확실하다.

목소리는 잠깐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다고 생각했는지 큼큼거리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주인이 있는 땅을 합법적으로 얻는 방법이 뭐가 있겠나?

‘돈을 주고 산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땅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원숭이라면 너는 그들에게 화폐를 건네고 땅을 사겠는가?

‘아니.’

이건 확실했다. 나라면 원숭이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빼앗는 쪽을 선택한다.

-바로 그거다.

나는 차츰 그들의 방식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요정의 행동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갔다.

‘그럼 인류를 멸종시킨 다음 주인 없는 차원을 판매한다는 거 아냐? 하지만 요정은 지금까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서 행동했어. 정확히는 세계를 구하는 입장이었다고.’

-그들 세계의 법 때문이다.

‘법?’

-그들의 세계에도 규칙이 있다. 그는 네게 그것을 세계의 균형이라고 말했었다.

‘맞아, 세계의 균형.’

익숙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주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고 시련에 성공하면 차원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거주자들이 차원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면 업자들은 깔끔하게 손을 털고 물러난다. 그게 그들의 규칙이자 방식이다.

나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럼 차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시련에 실패하게 된다면?’

-멸종하겠지.

그렇다면 마왕과 요정이 한 통속이라는 건가?

-하지만 이런 규칙에는 당연히 불만이 생긴다.

‘불만?’

-차원을 판매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적다는 거다. 웬만한 존재들은 대부분 시련에 성공하니까. 저마다 각자의 차원에 있는 방식으로 시련을 부여받다보니 시련의 난이도가 상당히 쉬운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시련을 쉽게 극복한다. 그러니 자연히 합법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차원은 적고 판매업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거다.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몇몇의 경우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지.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 멈춘다고?’

-네가 소환당한 아르카디아의 경우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가만 보니 아르카디아의 시련은 그곳 주민들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극복했다. 마왕을 봉인하고 세상을 구한 건 그 차원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바로 나였다.

목소리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그쪽 세계는 이미 멸망하고 다른 이들에게 팔렸다.

‘뭐?’

내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팔렸다니?’

-다른 차원의 존재인 네가 시련을 극복한 관계로 아르카디아의 인간들은 규칙에 따라 모두 멸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차원은 거주지가 없는 다른 이민족들에게 팔렸다.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르카디아는 지구보다 낮은 계층에 속한 차원이다. 그러니 네가 시련을 극복하기가 쉬웠을 거다. 그래서 요정은 너를 그곳에 소환해서 작당을 벌인 거다.

‘잠깐만.’

-왜 그런가?

‘그게 멋대로 가능하면 모든 차원에서 나 같은 용사를 소환해서 활용하면 되는 거 아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시련극복에 성공하면 어쨌든 멸종이잖아.’

내가 물었다.

-시련에는 유효시간이 있다.

‘유효시간?’

-최초로 시련을 부여하고 나서 천년이다. 천년이 지나면 다른 차원에서 이방인을 소환하는 게 그들의 규칙으로 가능하다.

‘그럼 요정이 나를 다시 지구로 부른 건 무슨 꿍꿍인데?’

나는 궁금한 걸 그냥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소원석은 뭐든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지구로 널 부른 건 날개 달린 드워프 족이 아니다.

‘저 녀석이 아니라고?’

요정은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흉흉하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잠깐 구슬에서 손을 떼 봐라.

‘왜?’

-어서.

나는 소원석의 말대로 구슬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요정이 내 얼굴 앞에 와 있었다.

“어!”

이상했다. 요정은 제단 위에 있는 구슬을 덥석 집었다.

“너, 뭐해!”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보다 요정이 이렇게 빨랐던가?

요정이 웃으면서 소리쳤다.

“고맙다! 미천하고 천박한 인간이여!”

“뭐?”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눈빛도 흉흉하게 뜬 그녀는 얼른 구슬을 삼켰는데 구슬이 그녀의 목 안에 사라지면서 마지막 말을 전했다.

-걱정하지 말고 봉인석이 있던 유적에 먼저 가 있어라.

그리고 끝이었다. 더 이상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요정!”

나는 요정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놈이 피할 것을 염려해 파괴력보다 빠르기에 치중했다. 요정은 곤충 같은 날개를 펼쳐서 내 주먹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얼굴에 맞을 것을 배에 맞았다.

“갸아아아아악!”

배빵을 당한 요정이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걸쭉한 초록색 액체가 구슬과 함께 바닥을 적셨다.

이 새끼는 대체 혼자서 뭘 처먹은 거야?

나는 토사물 사이에서 구슬을 주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요정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캬아아아아악!”

“윽!”

뾰족한 비명이 귀를 찔렀다. 영롱한 빛의 줄기가 실타래처럼 나를 옭아매고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나는 순식간에 몸이 휘감겼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요정은 만족스러운 듯 웃더니 구슬을 다시 집어 삼켰다.

우웩, 비위도 좋아.

그리고는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기쉬네와 휴지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주인, 무사해?”

“주은성, 괜찮아!?”

휴지와 기쉬네가 다가와 내 몸에 감긴 실타래를 풀었다. 둘은 안달복달해서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스스로 놀랄 만큼 태연했다.

“유적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지?”

목소리의 마지막 말이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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