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나는 목에 걸린 메자이의 부적을 손으로 쥐었다. 이곳에 오기 전 숙소 뒤편에 위치 A를 미리 지정해 놨다.
내가 부적을 사용해 엘프 족의 마을로 순간이동을 한다면 요정보다 더 빨리 유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봉인석이 있던 유적은 여기보다 엘프 족의 마을이 더 가까우니까.
설마 소원석은 이 사실을 알고 내게 말한 건가?
“소원석의 정체가 대체 뭐지?”
어째서인지 녀석은 미래를 보는 힘도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이거 1인용이네.”
목걸이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데 기쉬네가 말했다.
“갑자기 공격하다니 역시 저 작은 녀석은 악마였어. 그보다 몸은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그녀는 부담스럽게 다가와서 내 몸을 살폈다. 특히 바지 밑단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는데 손으로 만지려는 걸 내가 뿌리쳤다.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끈적끈적한 시선을 내치고 목걸이를 사용해 위치 B를 이곳에 지정했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는 기쉬네와 휴지에게 기다려줄 것을 당부하고 메자이의 부적을 사용했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자 순식간에 숙소 뒤편에 와 있었다.
나를 발견한 어떤 엘프가 뭐라고 소리쳤는데 나는 무시했다. 곧장 봉인석이 있던 유적으로 향했다.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날아서 유적의 입구에 도착하니 요정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들을 지나치고 봉인석의 흔적이 있는 마지막 방에서 대기했다.
파괴된 봉인석을 둘러보고 멀거니 서서 한참을 기다리니 요정이 나타났다.
“헉!”
요정은 나를 발견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왜 이렇게 늦게 와? 한참을 기다렸잖아?”
“어, 어떻게! 어떻게 저보다 빨리 왔죠?”
녀석은 갑자기 말투를 바꿨다.
“용사님! 거기서 비켜주세요! 급한 일이에요!”
요정이 부서진 봉인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뻔뻔한 급이 얼굴에 티타늄 합금을 바른 정도였다.
“왜?”
“저는 돌아가야 해요!”
불과 얼마 전까지 계약타령이더니 이제는 귀환타령이다.
“돌아가고 싶어?”
“제가 안 돌아가면 세상이 멸망할 거예요!”
“멸망?”
“네에!”
“웃기는 소리.”
나는 요정의 순진무구한 얼굴에 혀를 내둘렀다.
“구슬 내놔.”
“이건 악의 결정체에요! 긴가민가해서 보고만 있었는데 확실해요!”
“거짓말 그만하고 빨리 내놔.”
“저희 세계로 들고 가야 해요! 용사님은 감당할 수 없어요!”
요정이 울먹거리면서 소리쳤다. 소름끼칠 정도로 출중한 연기실력이었다. 그녀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단번에 저 울먹거림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양심이 빻았다.
“네 말에 진정성은 있지만 신뢰성은 없어. 소원석에게 네 정체를 다 들었어.”
“그거 전부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은 무슨. 너 마지막에는 나한테 욕도 하고 구슬도 삼켜서 도망갔잖아.”
“그것도 오해에요! 환각마법이에요!”
“나는 환각과 실체를 구분 못 하는 모지리가 아냐.”
“유적의 함정에서도 강한 환각마법이 있었잖아요!”
나는 묵살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요정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요정은 계속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거머리처럼 질척질척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용사님! 제발! 제 말을 믿어주세요!”
요정은 계속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마침내 막다른 벽에 등이 부딪히자 요정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말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어쩔 수 없지.”
작은 몸집에서 귀에 거슬리는 뾰족한 목소리가 나왔다.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적응이 잘 안 됐다.
“시간이 남았다고? 무슨 시간?”
“쓸데없는 호기심 그만 가지고 네 걱정이나 해, 멍청한 인간아.”
요정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었다.
“드디어 미쳤나.”
나는 소름이 끼쳐서 녀석을 향해 탄지공을 날렸다.
파밧!
빛의 섬광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요정은 탄지공을 가뿐히 피하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마법을 쏘았다. 초음파 같은 소리가 영롱한 빛줄기들과 함께 내게로 쏘아졌다.
“또 당할 줄 알고.”
아까 전에는 방심한 터라 당했지만 이번에는 결코 그냥 맞아주지 않았다. 나는 엄습하는 빛줄기를 주먹으로 쳐내고 단숨에 녀석에게 달려갔다. 땅바닥이 내 발힘을 버티지 못하고 움푹움푹 패였다.
“어!”
그 순간 요정의 모습이 변했다. 작은 몸집에서 새하얀 긴 팔이 튀어나오고 가슴이 커지면서 몸이 자라났다. 몸 아래에서는 적당한 두께의 허벅지가 생겨났는데 비율이 좋아서 모델 같았다.
오직 얼굴만은 커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였는데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요정은 원래 가분수였다.
요정이 단숨에 흑발의 미인으로 변하자 내가 놀랐다.
“그게 네 본 모습이야?”
요정이 말했다.
“이 모습은 규칙 위반이라서 보여주기 싫었는데.”
“그게 네 본 모습이냐고.”
“넌 살 기회를 스스로 버렸어.”
요정은 내 말을 무시하더니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손에서 마법진이 생겨나고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훨씬 큰 빛줄기들이 나를 향해 엄습해오고 있었다.
나는 쇄도하는 빛줄기들을 모두 피하고 단숨에 요정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요정의 얼굴을 향해 강권을 내질렀다.
뻐억!
“캬악!”
요정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입에서 이빨이 튀어나와 후두둑 허공을 날았다. 나는 이어서 녀석의 배를 거세게 연타했다.
퍼억! 뻐억! 퍼걱!
“캬아악! 캬악!”
변신을 하길래 극적인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요정은 여전히 약했다. 그녀의 입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한 움큼 튀어 나왔다. 나는 그제야 그 액체의 정체가 요정의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초록색 피라니. 괴물 맞네.”
혹시나 구슬을 토해내진 않았을까 몸을 숙이고 살펴보는데 요정이 다시 소리쳤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칼날 같은 마력의 창이 날아왔다.
“잔재주를.”
나는 맨손으로 창을 쳐내고 요정을 향해 붕권을 내질렀다. 요정이 고개를 젖혀서 피하더니 불을 내뿜었다.
화아아아악!
뜨거운 열기에 몸이 익는 것 같았다. 몸을 비틀어 바닥을 내딛고 다시 녀석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붕권에 맞은 요정이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변신을 해도 약하잖아.”
“과연 그럴까.”
요정은 내 주먹을 일부러 맞아줬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는데 앞니 두 개가 없어서 웃는 꼴이 괴상했다.
나는 문득 오래된 코미디 프로그램의 이빨에 김을 붙이고 관객을 웃기려는 여자연예인이 생각났다. 당연히 웃기지 않았다.
“네 발밑을 봐.”
요정이 말했다.
“발밑이 뭐?”
내가 발밑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뭐야? 언제 새긴 거지?
가만 보니 요정이 맞으면서 토해낸 피가 마법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이빨 두 개는 마법진의 정점인 듯 육망성의 정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이상한 술수를 부리네.”
“이곳에서 내 본신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넌 날 이길 수 없어.”
“그럼 이거 치우고 싸워보자.”
“싫어.”
요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진이 발동됐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커다란 압박감이 온몸을 졸랐다.
“윽.”
전기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찌르르한 고통과 불이 몸을 지지는 열상의 고통이 동시에 느껴졌다. 견딜 만은 했지만 고통은 심했다. 어떻게 마법진을 파훼할까 고민하는데 요정이 말했다.
“얌전히 나랑 계약을 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멍청한 소리를 하네.”
“지금이라도 계약 할래? 그럼 목숨은 살려줄게.”
“꺼져.”
“그간 정이 들어서 살려주려고 했더니 너는 끝까지 실망을 주는 구나. 애완동물에게 손을 물린 기분이야.”
요정은 새하얀 알몸을 돋보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를 두고 봉인석의 파편 앞에 다가섰다.
“마침 시간도 됐네. 죽어가면서 잘 보고 있어.”
요정이 중얼거리자 갈라진 봉인석의 파편이 흔들거렸다. 파편의 틈새에서 스파크가 몇 차례 일어나더니 요정의 앞에 희끗한 빛이 생겨났다.
“포탈···!”
내가 소리쳤다.
“얌전히 구경하고 있어.”
나는 마법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투명한 장막이 내 몸을 억압했다.
소원석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걱정하지 말라더니, 지금 큰일 난 거 아냐?
믿음이 사라지고 원망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포탈은 어느새 중간 정도로 커졌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영락없이 요정에게 소원석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나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고 소원석에게 어떤 소원을 묻지도 않았다. 모든 일의 원흉인 요정에게 소원석을 그냥 넘겨주기도 싫었다.
쩌정!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주먹으로 장막을 때리자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장막은 외관상으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괴물 같은 놈!”
요정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는 더욱더 발광했다.
쩌정! 쩌정! 쩌정!
요정이 걱정이 되는지 한소리 했다.
“수작 그만부리고 얌전히 죽어!”
“너 같으면 얌전히 죽겠냐.”
나는 장막을 수십 번 더 내려치다가 포기했다. 장막은 깨지지 않았고 주먹은 아팠다. 포탈은 어느새 거의 다 완성 돼가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깜빡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미 분배한 능력치 포인트가 있었다. 혹시나 유적의 조건에 능력치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 올리지 않고 모아둔 것이었다.
<주은성>
레벨: 1000(윤회+1) [경험치 15693/318993]
[체력: 470] [감각: 308]
[의지: 125] [마력: 500]
[미 분배 포인트: 599]
정보 창을 열어서 확인하자 만렙을 찍고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가 599개나 있었다. 나는 체력에 모든 포인트를 올인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배가 끝난 후 장막을 때리자 장막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뭐야!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부술 수 있는 건데!”
요정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장막을 계속해서 때렸다.
쩌정! 쩌정! 쩌저정!
열대 쯤 때렸을 때 갈라진 균열이 커졌고 스무 대쯤 더 때리자 마법진이 기어코 부서졌다. 내가 주먹을 보며 흡족해서 말했다.
“역시 최고의 파훼법은 무작정 부수는 거네.”
“미친, 일개 인간 따위가! 도대체 근원은 무슨 생각으로 저 녀석을 괴물로 만든 거야!”
파아앗!
그때 포탈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요정이 소리쳤다.
“완성 됐다!”
나는 재빨리 요정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거리가 꽤 있었다. 요정은 단숨에 포탈로 몸을 날렸다.
“기다려!”
요정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안 돼! 이건 이미 늦었다.
내가 절망한 얼굴로 포탈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포탈에 들어가려던 요정이 갑자기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녀의 가슴이 커졌다. 둔덕 두개가 커진 게 아니라 흉부의 중앙이 뭔가 튀어나오듯이 훅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