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끄아아아아악!”
요정이 피를 토하고 비명을 질렀다. 소원석이 그녀의 가슴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포탈 앞에 도착하자 가슴에서 튀어나온 소원석이 내 손바닥 안에 안착했다.
“어!”
어안이 벙벙해서 소리치는데 소원석이 말했다.
-처음부터 포탈을 열기 위해 일부러 잡힌 거였다.
“뭐?”
나는 황당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놈들은 나 같은 근원을 보면 발정난 개처럼 달려든다. 내 경우 일반적인 법칙에 벗어나 있어서 이렇게 결과가 달라졌지만.
요정은 입과 가슴에서 초록색 피를 계속 토하더니 결국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포탈을 열기 위해 일부러 잡혔다고?”
-그래.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이게 어디로 통하는 포탈인데?”
내가 포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들의 집이다.
“그들의 집?”
-상위계층의 존재들이 사는 차원, 천외천(天外天)으로 향하는 포탈이다.
나는 황당해서 멀거니 섰다. 그리고 물었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나는 요정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고 그들 세계의 포탈을 열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어.”
-네 부탁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최유미라는 인간 여성이 했던 부탁의 한 과정이다.
“최유미가 한 부탁의 과정이라고?”
나는 놀란 숨을 훅 들이켰다. 최유미는 유지미를 통해 언급되었던 최초의 회귀자였다.
-그래.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곳 차원의 여성. 하지만 당시엔 그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먼 길을 돌아서 온 거다. 와중에 회귀로 시공간을 수십 차례나 일그러뜨리기도 했고.
최유미의 소원은 회귀가 아니었나.
그보다 소원석은 방법만을 가르쳐준다고 했지 않았던가.
“너 소원은 안 들어준다며. 방법만 가르쳐준다며?”
내가 따지듯이 묻자 소원석이 말했다.
-부탁을 들어줄 방법이 도저히 없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방법을 만든다. 그게 내가 가진 ‘세계의 균형’이다.
“방법이 없어서 네가 방법을 만들었다고?”
소원석도 요정처럼 행동에 제약이 있는 건가.
-그래. 정확히는 만드는 중이지.
소원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얘기가 점점 골치 아파진다. 나는 아까 꺼냈던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럼 날 지구로 부른 건 누군데? 최유미?”
그럴 리가 없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아니, 나다.
“뭐?”
나는 뒤통수에 뒤통수를 거듭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가 몰래 카메라를 찍나.
“네가 날 소환시킨 장본인이냐?”
-원망하지마라. 아르카디아에 그대로 있었으면 너도 그쪽 차원의 거주자들과 함께 소멸 당했을 운명이다.
녀석은 지나가듯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는데 당면한 현실은 녀석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의구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왜 소멸을 당해?”
-천외천의 놈들은 강하다. 그리고 지금의 넌 약하다. 그들은 규칙에 철저한 편이니 폐기처분이 확정된 차원에 계속 있으면 너도 같이 소멸 당했을 거다. 지금의 너는 결코 그들을 거역할 수 없다.
“개소리.”
만렙을 찍고도 약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진실이다. 그들이 소멸시키는 건 시련에 패배한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사용이 끝난 장기 말도 곧잘 함께 폐기시킨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나를 왜 지구로 다시 불렀는데? 무슨 이유로?”
-최유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방법이 없어서 너까지 개입된 거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나까지 개입돼?”
소원석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이제 시간이 없군.
“시간이 없다고?”
-너를 성장시키는데 내 힘의 대부분을, 요정을 죽이는데 남은 힘의 전부를 쥐어 짜냈다. 난 이제 사막처럼 메말라버렸다.
“그럼 내 소원은? 난 아직 부탁을 하지도 않았어.”
내가 따지고 물었다.
-너는 지구로 돌아온 순간부터 천외천의 존재보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걸로 만족해라.
“설마 윤회 스킬을 말하는 건가?”
나는 지구로 올 당시 특전으로 받은 윤회 스킬 덕에 레벨 제한이 해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만렙을 뛰어넘어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전하지. 성검과 마검을 구해서 천외천의 포탈로 들어가라. 두 검을 합치면 인간인 너도 포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다. 그것들은 애초부터 그들의 조난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이니까.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천외천으로 들어가라고?”
-너를 위해서다. 오래지 않아 천외천의 놈들이 같은 일족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될 거다. 원인을 찾고 너를 공격하겠지. 네가 그들보다 약하면 죽을 것이고, 강하면 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구도 같이 멸망할지 모른다. 내가 본 미래는 달랐지만.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말에 집중했다.
이 녀석 역시 미래를 볼 수 있었어!
“너 미래를 볼 수 있어? 어떻게? 뭘 봤는데? 난 나중에 어떻게 되냐?”
-내 말은 이게 끝이다, 주은성. 네 본심대로 행동해라.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다.
그러더니 소원석은 두 쪽으로 쩌저적 갈라졌다. 내가 미처 어떻게 하지도 못 할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 어어! 뭐야!”
갈라진 구슬의 틈새로 새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 새끼, 지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튀었어!
아직 묻고 싶은 게 한참이나 남았는데!
나는 망연자실해서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었다.
* * *
미국헌터협회의 회장 제이슨 모라즈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밥 말라리가 보고서를 건네고 있었다.
“회장님. 시키신 것들 모두 알아봤습니다.”
모라즈가 받아든 보고서를 확인했다. 보고서에는 간략한 문구와 지도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위치는 여기 두 곳이 확실해?”
“예. 정보국에 협조를 요청해서 사람을 파견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최신식 드론으로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혹시라도 틀리면 안 돼. 그는 국가권력급 헌터다. 정보에 따르면 혼자서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더군.”
모라즈의 말에 말라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닐까요?”
“우리 정보국의 정보 수집력을 무시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모라즈는 보고서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서 커다란 운석도 소환하는 헌터야. 혹시라도 기분을 거슬리게 하면 미국이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몰라.”
농담 같은 말이었는데 말라리는 웃지 않았다. 실실 쪼개기엔 모라즈의 낯빛이 너무도 진지했던 까닭이다.
띠리리리리!
그때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모라즈의 책상에는 총 세 대의 전화기가 있었는데 지금 울린 것은 긴급한 일에만 쓰인다는 가장 중요한 전화기였다.
모라즈가 수화기를 들고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헐떡거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회장님! 긴급 정보입니다!
“뭐야? 말해.”
-주은성···! 주은성 헌터가 지금 현재 세인트루이스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뭐?”
수화기를 쥔 손이 떨렸다. 모라즈의 두 눈이 소 눈알처럼 툭 불거져 나왔다.
* * *
엘프 마을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기쉬네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나와 휴지는 미국으로 향했다.
조금 더 쉴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소원석의 말이 걸렸다. 천외천에서 날 죽이러 온다니 두 발 뻗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마침 유지미로부터 얻었던 지도에 보라색 마크 두 곳도 마음에 걸렸다.
성검과 마검.
유지미로부터 받은 지도에도 보라색 마크가 딱 두 개 남았다. 공교로웠다. 나는 이것이 성검과 마검의 위치가 아닐까하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배고프다, 주인.”
미국 대륙의 세인트루이스 상공을 날고 있을 때였다. 휴지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그랜드 캐니언까지 금방이야.”
나는 그녀의 뱃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독거렸다.
남은 보라색 마크 중 한 곳은 그랜드 캐니언이었고 다른 한 곳은 네바다 주에 있는 51구역이었다.
51구역은 예전부터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는데 그 탓에 출입을 하는 것에 미국정부와 마찰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그랜드캐니언부터 가기로 했다.
“너무 배고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어.”
뱃살을 쥐며 운전하고 있는데 휴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세차게 나왔다. 안 그래도 얇은 배가 더 홀쭉해지니 운전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러다간 가는 도중에 퍼지겠어.
결국 내가 백기를 들었다.
“그럼 저기서 뭣 좀 먹고 가자.”
내가 아래의 MC날드라는 패스트 푸드점을 가리켰다.
“좋아!”
휴지가 반색을 하며 재빨리 착륙했다. 급발진을 하는 것처럼 빨리 내려가서 하마터면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탁!
바닥에 무사히 착지한 우리는 MC날드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사람들은 붐비지 않았고 매장 안은 한적했다.
“도심에서 벗어난 곳이라서 손님이 적은 건가.”
미국은 땅이 넓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황무지 중간의 음식점은 꼭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휴지를 구석 테이블에 앉힌 나는 카운터로 가서 햄버거를 주문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살짝 고민했는데, 서리 엘프 족에게 받은 수은 장식띠가 외국어 의사소통도 가능하게 해줬다. 예상보다 훨씬 범용성이 뛰어난 장비였다.
휴지의 연비를 생각해 어마어마한 양의 햄버거를 주문하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앉아서 기다렸다. 휴지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주인이 너무 멋있어서.”
휴지가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난 안다. 그녀는 먹을 걸 사줄 때만 헤픈 칭찬을 두서없이 뿌린다.
“그래, 너도 예쁘다.”
“응!”
우리는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확인했다.
일단 성검과 마검을 얻는 게 가장 먼저다. 그 다음 천외천으로 갈지, 가지 않을 지 정해야 한다.
서리 엘프 족에게 미리 귀띔을 해서 유적은 봉인해놨고 경비병도 붙여놨다. 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천천히 정해도 된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숭이 냄새가 나는 군.”
“그러게. 나는 동물과 함께 식사하기 싫은데.”
원숭이라고?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매장 안을 이리저리 훑었다. 구석진 곳에 앉아서 매장 전체가 훤히 보였는데 매장 어디에도 원숭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얘기인 줄 모르고 얼굴 내미는 꼴을 봐. 역겨운 칭챙총 새끼.”
“멍청한 라이스 이터.”
나는 고개를 훅 돌렸다. 큰 덩치에 스포츠 컷을 한 남자 둘이 내 쪽을 쳐다보고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휴지를 발견하고 놀랐다.
“헉! 뭐야!? 서양여자랑 함께 있잖아?”
“모델인가? 가슴도 크고 힙도 최고야. 심지어 얼굴도 예뻐. 대체 뭐야? 원숭이랑 저런 엘프가 사귄다고?”
그들은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계속 저들끼리 얘기를 나눴다. 인종차별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거 귀여운 새끼들이네.
나는 탁자를 두드리며 문제를 키워야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감자튀김을 내 쪽으로 던지며 시비를 걸어왔다.
“어이, 원숭이. 너는 여기 앉을 자격이 없어.”
다른 한 놈은 휴지에게 작업을 걸었다.
“못 생긴 원숭이 대신 우리랑 노는 게 어때?”
나는 감자튀김을 주워서 그대로 날려줬다. 힘을 실어서 날렸더니 감자튀김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어, 어어!?”
한 놈의 거대한 팔뚝에 구멍이 뻥 뚫렸다. 뒤늦게 고통을 느낀 녀석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내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