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그래서 용건은 그게 끝?”
그럴 리가 없겠지만 물었다.
“사실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말라리가 말했다.
역시 그럼 그렇지.
“뭔데요?”
“현재 미국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둘러 말하지 말고 바로 본론을 말해주세요.”
빙빙 돌리는 건 질색이다.
말라리가 관자놀이의 땀을 닦았다.
“미국은 몬스터의 위협이 거의 끝났지만 그 후유증이 문제입니다. 대격변이 끝나고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사회각층에서 인종차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내가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쳐다봤다. 나를 모욕했던 놈들은 내가 밖에 있을 때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들 몸을 내빼는 게 LTE급이네.
말라리가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대격변이 남긴 여파로 많은 미국 내 많은 가정의 경제사정이 나빠졌습니다. 잃은 게 많은 백인들일수록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자기네들 혜택을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죠. 일자리의 기회, 삶의 방식, 사회적 지위, 복지혜택 등등···. 문제는 단순히 일상적인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차별을 넘어서 혐오에, 나아가서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귀속욕구를 통해 집단을 만들고 집단으로 무차별 테러를 일삼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집단으로 무차별 테러를 한다고요?”
“네. 그 중심에 있는 집단이 화이트 드래곤이라는 헌터집단입니다.”
내 미간이 찌그러졌다.
“헌터가 혐오범죄를?”
“덕분에 아주 곤란한 상태입니다. 그들 중에는 공권력으로 어떻게 건드리기 힘든 강자들도 있으니까요. 세상이 뒤집힌 뒤로 사회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특히 화이트 드래곤은 수준 높은 헌터들로 구성된 집단이라서 저희 힘만으로 그들을 처리하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그때 휴지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은밀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있어서 정신이 곤두섰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하고 있는데 그녀가 귓속말로 내 귀를 간지럽혔다.
-화이트 드래곤이래, 주인.
그게 끝이냐.
-네 얘기 아냐.
말라리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빌런이나 머더러라고 불리고 있지만 어쨌든 문제가 큽니다. 저희는 그자들의 처리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물었다.
“부탁이라고 하셨죠?”
“예.”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곤란한데.”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지 않아 천외천에서 날 죽이러 괴물 같은 놈들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간을 길게 낭비할 순 없었다.
내가 거절의사를 내비치자 말라리의 눈이 간절해졌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 측에선 주은성 헌터님의 강함을 잘 압니다. 한국의 헌터들을 지배하고 바벨의 탑에 거대한 운석을 떨어뜨리는 능력···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냥 가시는 길에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말라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턱을 쓰다듬고 고민하고 있는데 말라리가 쉬지 않고 덧붙였다.
“그들은 미국 한 개 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점조직형태가 아니라 세력이 큰 반정부단체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세력이 점점 커져서 나중엔 미국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단체의 수장만 처리해주셔도 저희 쪽에서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는 간절한 어조로 말하면서 품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생긴 건 헌터 라이센스 카드와 비슷했는데 품질은 더 좋아보였다.
“시간을 잠깐 내주신다면 이 카드를 드리겠습니다. 미국 최고등급의 헌터를 위한 SSS블랙 카드입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정부에서 대신 지불하고 때에 따라서 국가 공권력의 힘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헬기나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도 마찬가지로 이용할 수 있고요.”
“국가 공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요?”
내 귀가 쫑긋 섰다. 필요는 크게 없었지만 흥미는 갔다.
“예. 신분의 증명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이 카드를 소지한 사람은 미헌협의 차관급 직위를 보장받습니다.”
휴지가 끼어 들었다.
“그러니까 식당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거네?”
말라리의 눈이 밝게 트였다. 흡사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 같은 눈빛이었다.
“예, 맞습니다. 유명한 셰프들이 운용하는 5성급 식당들도 모두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정부에서 부담합니다. 하루 최대한도는 10만 달러까지고, 식사는 한 끼 2만 달러까지 가능합니다.”
휴지는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귓속말로 말했다.
-카드가 검은색이라 멋있게 생겼다. 승낙해라, 주인.
나는 묵살하고 테이블을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그럼 단체의 수장만 죽이면 되는 건가?”
“네, 맞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들의 거점은 이곳 세인트루이스에 있습니다. 단체의 수장도 당연히 이곳에 있고요.”
내 혼잣말에 말라리가 급히 반응했다.
귀도 좋아라.
혹시 방금 만난 인종차별주의자들도 그 단체의 일원들일까. 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
“까짓 거 잠깐 시간을 내드리죠.”
“감사합니다!”
말라리가 감격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 후 우리는 얘기를 끝내고 헤어졌다. 헤어지기 직전, 말라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는데 휴지가 공중제비를 세 바퀴 연속으로 돌며 더 기뻐했다.
* * *
목적지인 차별주의자들의 은거지는 멀지 않았다. 휴지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니 금방이었다.
근처에 도착해서 살펴보니 주둔지는 외딴 황무지에 위치해있었고, 철옹성 같은 높다란 담장과 미로 같은 생김새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넓은 동네에 커다란 성벽을 두른 것 같았다.
주머니 사정도 꽤 괜찮은지 구색이 잘 갖춰져 있었는데 눈동냥으로 얼핏 봤던 한국 군대의 시설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아니, 한국 군대의 시설이 구린 건가.”
“무슨 말이냐, 주인?”
“혼잣말이야.”
나는 빵빵한 휴지의 뱃살을 만지작거려 입구근처에 착륙했다. 내 손길이 그녀의 소화 작용을 도왔는지 휴지가 연거푸 꺼억꺼억 트림을 했다.
“너 콜라 엄청 마셨구나. 콜라냄새나.”
나는 코를 찡그리고 주둔지의 입구로 걸어갔다. 담장 위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하이. 헬로우.”
내가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자 총구방향이 내 쪽으로 틀어졌다.
“누구냐!”
“나다!”
“네가 누구야?”
경비병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놈들은 개성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지 헤어스타일이 하나같이 스포츠 컷이라서 구별하기 힘들었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게 이런 말일까.
내가 조용히 처리할까, 소린을 피울까 고민하는데 경비병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저 새끼 동양인이야!”
그러더니 그들은 총구를 움직여 나를 정조준했다. 경고를 더 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총들이 불을 뿜었다.
탕! 탕! 타다당!
탄환이 발밑에 박히고 화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대화가 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대인관계능력에 크게 실망했다.
“이 새끼들이 다짜고짜 총질이야! 동양인으로 태어난 게 죄냐!”
“동양인은 다 죽어야 해!”
“몬스터도 다 동양인 탓이야!”
놈들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역시 멍청하니까 차별을 하고 그러는 거야.”
나는 엄습하는 총알들을 쳐내고 손가락을 튕겨 탄지공으로 화답했다. 새하얀 빛의 줄기가 그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끄악!”
“으악!”
후두둑! 투둑!
머리를 관통당한 경비병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나는 땅을 박차고 천마비행술로 날아 단숨에 담장 위에 안착했다.
탐색스킬을 사용해서 넓은 주둔지를 살펴보니 수장이 있는 곳이 금세 파악됐다.
수많은 건물 중 가장 크고 높고 화려한 건물이었는데 어디 대기업 회장님이 은퇴하고 시골에 세운 전원주택 같았다.
아마도 저기에 수장이 있겠지.
“목표 대상이 헌터라서 다행이네.”
민간인이었으면 레벨이 고만고만해서 누가 단체의 수장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때 사이렌과 경보음이 주둔지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총소리를 듣고 내 존재를 파악한 것 같았다.
나는 경보시설에서 시선을 거둬들이고 천마비행술로 날아 수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휴지가 폴짝폴짝 뛰며 따라왔다.
그때 놈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탐색스킬로 확인하니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과 달리 전원이 헌터들이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놈들 중 가장 강한 놈이 선두에 나서며 소리쳤다.
내가 가슴을 쫙 펴고 대답했다.
“갓동양인 주은성이 너희들을 징벌하러 왔다!”
“미친놈!”
그러자 난데없이 불과 얼음이 날아오고 전기가 엄습했다.
이 새끼들 인종은 엄청 차별하면서 스킬들은 다양하게 익혔네.
나는 번개 같은 속도로 몸을 움직여 놈들의 목을 비틀고, 머리를 부수고, 몸에 구멍을 뚫어줬다. 밖에 나와서 날 공격했던 헌터들은 모두 죽었다. 여기까지 불과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은 포인트를 모두 체력에 투자해 순수 체력이 1069가 되니 근육량이 증가해서 힘도 쌔지고 빠르기도 빨라졌다. 마음만 먹으면 3km 달리기도 1분 안에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얘네들 엄청 약하다, 주인.”
“내가 강한 거야.”
우리는 시체들을 넘어서 단체의 수장이 있는 건물로 갔다.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 중간중간에 예술작품과 골동품 같은 항아리가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비싸보였다.
이 새끼 벌이가 정말 괜찮나보네. 돈 지랄 엄청 했잖아.
어두컴컴한 복도의 불을 켜고 수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건물은 한 없이 조용했다.
“흰둥아! 어디 있냐! 얌전히 나와라!”
나는 미로 같은 구조의 복도를 탐색하기도 귀찮아서 벽들을 부수면서 나아갔다.
쾅! 쾅쾅! 쾅쾅쾅!
내 도발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단체의 수장으로 보이는 놈이 칼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야이 개새끼야! 너 누가 보낸 놈이야!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게 무슨 행패야!”
놈이 바락바락 고함을 치며 칼끝을 세워 나를 겨냥했다.
“갓동양인 주은성이다!”
“미친 원숭이 새끼! 정신병자였냐.”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가서 놈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입술이 터지고 강냉이가 후두둑 허공을 날았다.
“어어, 으어어···!?”
놈이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정체가 뭐야!”
나는 놈의 멱살을 쥐고 뺨을 더 후려갈겼다. 피와 살점이 터지고 놈의 머리가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놈이 칼을 휘두르며 반항했지만 내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마법도 부렸는데 그것마저 귀여웠다. 세 살배기가 재롱잔치를 부리는 것 같았다.
새끼, 귀엽네.
파자작!
놈이 휘두른 칼이 내 몸에 닿자 오히려 칼날이 부서졌다.
“으, 으어어어!”
몇 대 더 얻어터지고 나서 놈은 기어코 무릎을 꿇었다.
“히이이익! 사, 사려 주세효···! 저는 자못 업서효···.”
이빨이 다 뽑히니까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녀석은 딸국질을 하며 울먹거렸다.
“너 이 새끼, 인종차별을 하는 이유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