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내가 묻자 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 동양인은 열등하니까···요!”
온힘을 다해서 말하는지 이빨이 없음에도 발음이 정확했다.
“그게 차별의 이유냐?”
“인종적으로 차이가 있는 건 진실이야···요! 동양인은 열등해! 백인은 우월해!”
“지랄!”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자 놈의 두개골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놈이 화가 났는지 피를 토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지랄이 아니야! 너희 중국인들은 우리 백인보다 열등한 민족이다! 사회악! 해충! 박멸해야 마땅한 족속이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놈의 머리를 발로 찼다.
“으악!”
놈이 축구공처럼 힘차게 날아갔다. 복도 끝까지 날아간 그는 벽에 부딪힌 후 바닥 위에 나동그라졌다.
“난 중국인이 아냐.”
나는 달려가서 놈의 뺨을 후려갈기고 말을 이었다.
“나는 미국인이다.”
아공간을 열어서 대검을 꺼내 쥐니 놈이 기겁을 했다.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파악한 녀석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빔박자로 싹싹 비볐다.
“사, 사려줘!”
“싫어.”
“도, 돈 줄게.”
나는 강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몇 달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돈 필요 없어.”
내가 놈의 면전에 대검을 들이대고 말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빛을 발하자 놈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차, 차별과 혐오는 돈이 돼!”
“무슨 소리야?”
“혐오를 조장하면 돈이 잘 벌려! 멍청한 놈들이 알아서 돈을 갖다 바쳐!”
나는 기가 막혔다. 녀석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부짖었다.
“나를 살려줘. 그럼 너는 명예 백인 시켜줄게.”
“제정신이 아니군.”
“사실 나는 흑인보다 황인을 더 좋아해. 쌀 요리도 아주 좋아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짬뽕이야.”
“짬뽕은 쌀이 아니라 밀가루로 만들어.”
나는 대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었다.
서걱!
피가 튀고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싱거운 녀석.
나는 휴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메테오 콜링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이 소환되어 주둔지에 떨어졌고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먼지구름이 버섯모양으로 피어오르면서 놈들의 흔적이 티끌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 저기 경찰차가 오고 있다.”
휴지가 도로의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놈들인가.”
오래지 않아 경찰차가 도착하고 밥 말라리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허어, 정말 금방 처리하시는군요. 정부기관이 조직적으로 움직여도 처리하지 못 할 규모를 이렇게 단 시간에 처리하시다니···. 게다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탄성을 지르고 말라리가 물었다.
“혹시 놈들이 이상한 말을 하지 않던가요?”
“누구요?”
“헌터들 혹은 단체의 수장이나 뭐, 아무나···.”
나는 생각할 것도 없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군요. 저희 쪽에서는 정보가 필요하거든요.”
말라리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별 말을 안 해서.”
하지만 생각해봐도 크게 없었다. 내가 묻지를 않았기 때문인지 단체의 수장이란 놈도 살려달라는 말밖에 안 했다.
말라리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 일로 언론에 노출되셔도 괜찮으십니까?”
언론이라···.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다.
“아뇨.”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건은 저희 측에서 마무리한 걸로 보도 하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감사합니다.”
말라리가 계속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나는 멋쩍어서 손사래를 쳤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니 그렇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사회의 암 같은 놈들을 이렇게 단번에 처리해주시니, 감사드려서···.”
나는 석연치 않아서 뒷말을 덧붙였다.
“부탁을 들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그렇게 감사하시면 제가 더 부담스럽죠.”
그러자 말라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휴지의 등에 탔다. 뒤에서 말라리가 뭐라고 소리쳤는데 들어보니 접대를 하고 싶다는 말이어서 그냥 무시했다.
우리는 그랜드캐니언 쪽으로 향하다가 시간이 늦어서 캔자스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 숙박을 했다. 비싼 식사와 각종 서비스를 블랙 카드로 결제하고 누릴 걸 다 누렸다. 휴지가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 * *
미국 조지아에 위치한 KTM 사무실.
KTM은 Kill The Monkey의 약자로 그들은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비밀단체로 사회 각 층에 잠복해 있는 인종 혐오자들이었는데 그들 중 핵심인원들로 구성된 세인트루이스의 조직이 완전히 괴멸되자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말이 돼! 원숭이 새끼 하나가 조직 전체를 괴멸시켰다고? 그것도 하루 반나절만에!?”
단체의 회장 헨리 무라딘이 이마를 짚었다.
“한국인 출신의 주은성이라는 헌터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가진 정보가 적은데 어디서 듣기론 국가를 멸망시킬 정도의 무력을 가진 헌터라고 합니다.”
부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헨리 무라딘이 이마를 두들겼다.
“국가 멸망? 국가를 멸망시킬 정도의 무력을 가진 헌터라고?”
“저도 황당한데, 또 어디서 듣기로 누구는 그가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해서···.”
헨리는 더 어이가 없어졌다.
“푸핫! 지구 멸망! 누가 그래? 어느 정신병자가? 미친 거 아냐?”
부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협회의 정보부서쪽 출처입니다. 정확히는 정보부장 제임스가 말했는데···, 그가 말하길 협회장 제이슨과 말라리 요원이 담배피면서 하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미쳤군.”
그들은 공권력 쪽에도 발을 뻗고 있어서 정보를 얻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정보는 출처가 어디더라도 신뢰성은 없었다.
국가멸망을 넘어서 지구를 멸망시킬 정도의 헌터라니?
이 무슨 개소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어떻게 하루아침에 조직이 괴멸할 수가 있지?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다고 했지?”
“예. 주둔지 전체가 아주 깔끔히 사라졌습니다.”
“하아.”
헨리가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밀었다.
“보고서 줘봐.”
“여기.”
이미 확인한 내용이었지만 다시 한 번 보고서를 펼치고 확인을 하니 더 황당했다. 얼굴이 딱딱한 벽돌처럼 굳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정보가 아냐.”
“예?”
“원숭이 새끼들이나 명예 백인 놈들이 거짓 정보로 분탕 치는 거 아닐까?”
“아시다시피 정보부서 쪽은 명예 백인이 없습니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더 묻게 된다.
“씨발. 마지막에 거대한 운석을 소환해서 주둔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니···. 이게 도대체···.”
파면 팔수록 이해가 안 되는 일 투성이였다.
거대한 운석을 소환했다니. 상식적으로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어떻게 할까요?”
부하가 물었다.
“어떻게 하긴. 동물원 원숭이한테 쳐 맞으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정보를 종합해보면 원숭이가 아니라 그놈들의 이상한 소설에 나오는 제천대성? 뭐,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만···.”
“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못 믿어. 어쩌면 정보부서 쪽에서 넘어간 것일 수도 있지. 그놈들 혼혈이잖아. 이번에 자리 하나 약속받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것일 수도 있어.”
“얼마 전에 정보부서쪽 인물들을 만났을 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직이 괴멸한 건 거짓 정보가 아닙니다만···.”
“알고 있어. 하지만 동양인이 그렇게 강하다는 건 믿을 수 없어. 거짓말이야.”
헨리의 말에 부하도 어느 정도 납득은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많았다.
헌터가 아무리 강해도 일단은 인간이다. 그런데 보고 받은 내용대로라면 주은성이라는 헌터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다.
부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죽여야지.”
헨리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더라도 일단은 동양인이다. 그는 뼛속까지 백인이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다. 거짓말이 가득한 보고내용과 찝찝함 하나 때문에 한낱 동양인에게 겁을 먹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놈의 다음 목적지가 그랜드캐니언이라고 했지?”
“예.”
“혹시 모르니까 애들 불러서 처리해. 꼬리 자를 수 있는 놈들로.”
“알겠습니다.”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헨리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의 정체를 단순한 기우로 치부했다.
한편 주은성을 유심히 지켜보는 집단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천외천(天外天).
세상 밖의 세상, 차원 밖의 차원.
천외천은 상위계층의 존재들이 사는 차원으로 다양한 족속들이 갖가지 개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지구를 공략하던 그룹은 그중에서 소규모에 속하는 이익단체였는데, 그들은 현재 모두가 심각한 표정이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말단직원 나달이 하위 차원에서 죽었다.”
그룹의 리더 퍼시픽 림이 말했다.
“지구라면 하위 중에서 거의 최하위에 근접하고 있는 차원인데, 그런 곳에서 우리 족속이 죽다니.”
천외천도 지성체들이 사는 공간이다보니 하계의 차원과 다를 바 없이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때에 따라서 관습과 전통이 있었다.
그룹의 인원이 죽으면 리더로서는 손해 보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인원이 말단 중에 말단이더라도 회사의 사원이 산재를 입은 것처럼 책임은 오로지 리더의 몫이었다.
“본래 허가가 난 담당자 외에 차원을 방문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담당자가 죽어서 없으니 공관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허가 내용은 뭔가요?”
일원 중 한 명이 물었다.
퍼시픽 림이 말했다.
“사인의 조사와 관련자의 말살. 그쪽 거주자들 전체를 말살시키는 건 허락 받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공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공관이 허락하지 않는 걸 억지로 했다간 그들로서도 소멸을 면치 못한다.
그룹의 인원들이 침통해했다. 날개달린 드워프족 나달은 그룹의 홍일점으로 예쁘고 몸매가 좋았다. 그들 중에는 나달을 짝사랑하고 있던 남자도 꽤 있었다.
“누가 가겠는가?”
퍼시픽 림의 물음에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 * *
미국으로부터 받은 위성지도가 있으니 유적을 찾기가 한결 쉬웠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휴지를 타고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니 금방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가 없었다면 꽤 애먹었을 거야.”
위성지도와 실물을 비교하면서 협곡 사이를 훑자 금세 지형지물들이 파악됐다. 유적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 휴지의 뱃살을 움켜쥐고 착륙을 하는데 휴지가 소리쳤다.
“어! 저기 사람들이다!”
나는 지도에서 시선을 거둬들이고 그들을 발견했다.
“저 사람들은 뭐야?”
아까부터 몬스터들이 안 보여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이유였었나.
관광객처럼 보이는 허술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 검 하나가 수직으로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