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63화 (63/127)

# 63

“버스도 있다, 주인.”

휴지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협곡과 둔덕 너머에 45인형 버스가 여러 대 서 있었다.

“이게 뭐야? 관광지?”

나는 기운이 빠져서 휴지의 등에 업힌 채 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설마 이런 곳에 대놓고 성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저기 사람들이 몰려 있다.”

“진짜 관광지네. 완전히 관광단지를 조성해놨잖아.”

성검을 두고 옆에는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여럿 서 있었고 그 주변과 뒤에는 차단봉과 기다란 사람들의 줄이 있었다.

관리하는 시설인지 건물도 몇 개 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서리 엘프 족에서 레벨 업을 하는 사이 성검이 발견되어 관광지로 바뀐듯했다.

“줄을 선 사람들이 많다, 주인.”

“차례를 기다려야 하나.”

황당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니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람들 대부분 민간인들 같은데.

휴지의 등에 탄 채로 줄의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앞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 있는 엑스칼리버를 뽑으시면 보상으로 10만 달러를 드립니다. 시간제한은 딱히 없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오래 걸리시면 안 돼요. 구매한 표를 보여주시고 순서를 지켜서 시도를 하시면 됩니다. 물론 기념촬영도 가능하시고요.”

능숙한 설명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엑스칼리버?”

휴지가 끼어들었다.

“엑스칼리버가 뭐냐, 주인.”

“허구 속에 나오는 검이야.”

성검의 명칭은 클리브 솔리스지, 엑스칼리버가 아니다. 엑스칼리버는 아서왕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검이다.

“생긴 건 성검이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내밀어 탐색스킬로 검을 살펴보다가 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걸로 돈을 벌고 있는 듯했다. 애매한 명칭보다 직관적이고 유명한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

장사수완 좋네.

돈 많은 거부가 뒤에서 손을 봐주고 있는 건가. 하긴 그러니까 그랜드캐니언의 한복판에 이런 관광시설을 운영하지.

“저기요.”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누구?”

뒤를 돌아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속눈썹이 길고 이목구비가 귀여운데 몸매는 농익은 성인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가슴팍의 커다란 둔덕 두 개가 블라우스 밖으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어서 몹시 관능적으로 보였다.

휴대폰 번호를 달라는 건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입장권 좀 확인할게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거 없는데.”

날아서 왔으니 당연히 입장권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안전지대 쪽 공용도로를 타고 멋대로 외부에서 오신 분 같은데. 여긴 엄연히 사유지에요. 저희는 장애인 할인이나 혜택 같은 것도 없고요. 단순히 구경을 하시는 것도 돈을 내야해요.”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휴지의 등에 업혀 있는 나를 보고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오해한 듯했다.

“험험.”

나는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내 발로 땅을 딛고 섰다.

그러자 여자가 나를 쓰레기 보듯이 쳐다봤다.

“불편하신 것도 없는데 여자 등에 타고 계셨던 거예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허.”

여자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20달러에요.”

“뭐가요?”

“입장권 가격이요. 두 사람이니까.”

여자가 휴지를 가리켰다.

“음.”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나는 갈등을 일으키기 싫어서 순순히 표를 구매하기로 했다. 지갑을 꺼내고 돈을 확인하는데 중대한 문제를 깨달았다. 현금이 3달러 밖에 없었다.

“아, 먹는 걸로 다 썼구나.”

MC날드에서 현금을 모조리 쓰고 그 뒤로는 말라리로부터 받은 블랙카드로 결제를 다 했다. 카드의 혜택이 워낙 좋다보니 현금을 환전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국 돈 받나요?”

다행히 한국 지폐는 5만원권이 있었다.

“아뇨.”

내가 다시 물었다.

“카드는요?”

“카드는 돼요.”

“다행이네.”

여자가 카드 리더기를 꺼내고 손바닥을 내밀자 나는 안심하고 지갑에서 블랙카드를 꺼내서 건넸다. 미국에서 쓸 수 있는 카드는 말라리로부터 받은 이 블랙카드가 유일했다.

그런데 카드를 받아든 여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우와!”

여자가 경악 같은 탄성을 내지르고 나를 쳐다봤다.

“왜요.”

“이, 이거 VVIP 블랙카드잖아요.”

“그게 왜요.”

“맙소사! 죄, 죄송합니다.”

여자가 목소리를 싹 바꾸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이거 생각보다 자본주의의 위력이 굉장한데.

“제대로 못 알아보고 실언을 했습니다. VVIP 고객님들은 동반고객 1인을 포함해서 무료입장이 가능하세요.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험험.”

나는 관대해서 봐주기로 했다.

여자가 연거푸 고개를 꾸벅 숙이자 다른 관리자가 이쪽으로 왔다.

“무슨 일이야?”

여자보다 더 직책이 높아보였는데 그는 상황을 묻다가 내 손에 들린 블랙카드를 발견했다.

“와우!”

그도 벼락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카드였구나.

고급호텔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는 보기 드문 카드였나보다.

“혹시 사장님 친구 분이십니까?”

“사장님?”

“아, 아니시군요.”

관리자는 찰나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풀었다. 그리고는 헤실헤실 영업용 미소로 나를 응대했다.

“엑스칼리버를 뽑으러 오신 거죠?”

“네.”

“아무렴, 요즘 엑스칼리버 뽑기가 엄청난 이슈죠. SNS에 사진만 찍어도 좋아요가 몇 개나 찍히는지.”

그는 손바닥을 좌삼삼우삼삼 비비며 내 아부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는 눈을 흘겨 뜨곤 길게 늘어진 줄을 쳐다봤다.

“그런데 사람이 많네요.”

“아이고 참, VVIP는 줄이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는 손뼉을 짝 치고 차단봉을 움직여 새로운 줄을 만들었다.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새치기는 좀···. 저 사람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여행 패키지로 온 사람들이라서 이용객들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검을 뽑기 위해선 입장권 말고도 따로 표를 사야하지만 이따가 오후 3시부터는 기념촬영부터 일체가 전부 무료거든요. 물론 표 없이 검을 뽑으면 상금을 못 타지만.”

“그렇군요.”

일이 잘 풀렸다. 나는 휴지를 데리고 성검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성검은 땅바닥에 손잡이만 배꼼 내민 채 박혀 있었다.

내가 성검을 뽑으려고 막 손잡이를 움켜쥐는데 관리자가 물었다.

“기념촬영 해드릴까요?”

“기념촬영이요?”

“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성검은 마검과 결합해서 천외천으로 가는 열쇠로 쓸 생각이다.

그럼 잘나봤자 일회용품일 텐데, 굳이 그걸 기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진을 찍어도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관리자를 뒤로하고 있는 힘껏 성검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땅바닥이 쩌저정 갈라지고 성검의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어어어! 에, 엑스칼리버를 뽑았다!”

관리자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성검을 이렇게 단숨에 뽑을 줄은 몰랐을 거다.

보고 있던 관광객들도 탄성을 내질렀는데 목소리들이 어찌나 큰지 협곡 사이의 돌무더기들이 몇 개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뭐야, 이거?”

나는 손잡이를 쥐고 흔들었다. 성검이 다 뽑힌 줄 알았는데 검날의 끝 부분이 단단히 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이제 손바닥 길이 정도만 더 뽑으면 완전히 다 뽑게 되는데 끝 부분이 문제다.

-그만 두세요! 당장 그 더러운 손을 치워주세요!

그 순간 성검에서 섬광이 번쩍하더니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따끔한 통증에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오.”

나는 순수하게 놀랐다. 성검에 자아가 있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내 이름은 아자젤 솔리스. 성검 클리브 솔리스에 깃들어 있는 정령입니다.

내가 다시 손을 뻗어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자 금제가 발동됐는지 공간이 일그러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직!

따끔따끔한데.

-당신은 조건은 갖췄지만 자격은 없는 자입니다. 당신처럼 악한 자는 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검은 오직 선하고 질서적인 존재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난 착하고 선해.”

내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당신의 천성이 악하지는 않지만 당신은 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나는 성검에 깃든 정령의 권한으로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 하지 않습니다.

성검이 분노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되게 깐깐한 놈이네.

성검의 목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숨을 죽인 채 내 행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흔들었다.

“누가 네 인정 따위 받고 싶대?”

순간 스파크가 온몸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는데 고통은 전혀 없었다. 견딜만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따끔따끔한 정전기 수준이었다.

“얌전히 뽑혀라.”

내가 힘을 주고 다시 성검을 뽑았다. 성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검이 박힌 땅바닥은 달랐다.

쩌저적!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지 마력이 훅 뿜어져 나오면서 바닥이 갈라졌다. 그리고 성검이 땅바닥에 박힌 채 내 손에 들렸다. 검의 끝 부분은 여전히 땅과 합쳐진 모습 그대로였다.

-괴, 괴물! 말도 안 돼! 마법진이 파괴됐어!

“말 돼.”

내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 끝에 손가락을 딱 튕기자 붙어있던 바위덩이마저 다 떨어졌다. 성검의 새하얀 검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검은 놀랐는지 울먹거리면서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짓거리를 하다니! 나는 당신을 주인으로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바락바락 소리쳤는데 나는 대수롭지 않아서 콧방귀를 흥 끼었다.

“어차피 널 제대로 쓸 생각은 없어. 천외천으로 갈 때 열쇠로 쓸 생각이야.”

그러자 성검이 놀랐다.

-다, 당신이 어떻게 천외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죠?

나는 무시했다. 그때 따끔한 통증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이 새끼가 아직도 주제 파악 못하고 귀여운 발악을 하네.

성검이 한 짓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었다.

“뭐야, 저 녀석들은.”

나는 감각을 확장하고 두 눈을 치켜떴다. 멀리서 헌터들이 보였다.

일단의 무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고 있었는데 그랜드캐니언을 배경으로 모래먼지를 나부끼고 있어서 굉장히 멋있었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중에는 화살을 들고 있는 놈도 있었는데 녀석이 내게 따끔함을 선사해준 장본인인 듯했다.

“저, 저 사람들은 대체!”

내 옆에 있던 관리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관광객들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데 화살과 총알세례가 난데없이 빗발쳤다.

“사장님, 도망가셔야 합니다!”

“전 괜찮아요. 먼저 도망가세요.”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버스로 도망가고 나와 휴지만 덩그러니 남았다.

“KTM? 무슨 뜻이지?”

헌터들은 뭐라고 써진 백색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꼭 세기말 폭주족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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