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64화 (64/127)

# 64

* * *

“대장. 위에서는 놈을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부하가 오토바이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조용히 처리하는 것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KTM의 은밀한 행동대장 크림슨이 말했다.

“그게 뭔가요?”

“하나는 우리가 들키지 않고 조용히 행동하는 것.”

“네. 다른 하나는요?”

“다른 하나는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는 거다.”

부하가 손바닥을 짝 쳤다. 덕분에 오토바이가 크게 휘청거렸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후자인건가요?”

“그래. 너는 애들을 데리고 가서 저기 도망가는 관광버스의 인간들부터 죽여라.”

“대장은요?”

“나는 저 새끼가 도망 못 가게 해야지.”

그들은 두 무리로 나눠져서 행동을 개시했다. 부하가 이끄는 무리는 관광버스로 향했고, 크림슨이 이끄는 무리는 관광지의 펜스를 넘어서 주은성과 휴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 *

더 이상 날아오는 총알과 화살이 없다.

“두 쪽으로 나눠졌다, 주인.”

“그러게.”

한 쪽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다른 쪽은 버스 쪽으로 향했다. 놈들이 뭘 할까 궁금해서 잠자코 보고 있는데 성검의 정령 아자젤이 소리쳤다.

-사람들을 구해야 해요!

“뭐가?”

뜬금없네.

-저들의 대화를 들었어요! 우두머리격의 인물은 당신을 죽일 거라고 말했지만, 다른 쪽의 부하들은 사람들을 죽인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성검의 정령이 나보다 능력치가 높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못 들었는데 아자젤이 들었을 리가 없다.

-정말이에요! 저들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에요! 막아야 해요!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마의 수은 장식 띠를 매만졌다.

이거 꽤 멀리 있는 건 통역을 못 하는 구나.

그 탓에 내가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사람들을 죽인다고?”

-네! 어서 가서 막아야 해요! 벌써 놈들이 버스의 근처까지 도착했어요! 사람들이 모두 죽을 거예요! 빨리 구해야 해요!

나는 심드렁해져서 되물었다.

“내가 왜? 왜 사람들을 구해줘야 하는데?”

-네?

아자젤이 얼이 빠진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저들을 도우면서 내가 다칠지도 몰라. 아니면 여기 있는 휴지가 다칠 수도 있고.”

-당신은 제 봉인을 부술 정도로 강하잖아요! 저들을 구한다고 해서 결코 다치지 않을 거예요! 죽지도 않을 거고요!

“싫어. 귀찮아.”

내가 완강히 거부하자 아자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악마! 당신은 그렇게 힘이 있으면서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구하지 않는 건가요!

“응.”

나는 내 가치관에 확고했다. 받은 대로 갚지만, 받은 게 없으면 베풀지도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인류애가 있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을 위해 나설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자젤의 성미를 건드리고 싶었다.

아자젤이 소리쳤다.

-역시 당신은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성검의 정령이라더니, 확실히 고리타분하군.

나는 생각을 하다가 대가를 아자젤에게 돌려보기로 했다. 성검의 위력과 능력이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렇게 걱정이면 네가 직접 나서면 되잖아.”

-나는 혼자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아, 그런가.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내가 너의 주인이 되는 조건으로 저들을 구해줄게. 그건 어때?”

그러자 아자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어···.

“그건 싫지?”

-아니,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 같은 녀석을 위선자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착한 척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만 정작 자기가 희생을 해야 할 때는 희생을 하기 주저하거든.”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나의 힘을 사용하게 됐을 때 일어날 일들을 걱정해서···!

“그럼 잠자코 사람들이 죽는 걸 구경하든가.”

아자젤이 울먹거렸다.

-당신은 악마에요! 어째서 이런 선택을 저한테 강요하는 거죠. 그냥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 되나요.

나는 무심한 어조로 쇄기를 박았다.

“선택권은 너한테 달렸어. 난 분명히 기회를 줬고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어. 저 사람들이 죽으면 모두 네 탓이야.”

-으으···.

아자젤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 사이 멀리서 쾅 소리가 났고 폭주족들의 공격을 받은 버스 한 대가 폭발했다. 화염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불탔고 석유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동시에 났다.

-으, 으으으···!

아자젤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녀석은 생리적으로 사람들이 죽는 걸 견디질 못 하는 것 같았다.

거참, 오지랖이 넓다 못 해 피곤한 성격이네.

“이제 버스도 네 대 남았다. 45인승이니까 대충 200명쯤 되려나. 모두 다 죽으면 볼만하겠어.”

내가 손가락을 들어 버스를 세고 빈정거렸다.

아자젤이 참지 못 했는지 버럭 소리쳤다.

-좋아요! 당신을 내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키셔야 해요!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굿. 잘 선택했어.”

순간 따끔한 정전기의 고통이 사라지고 빛의 문구가 눈앞에 떠올라 계약을 알렸다. 내가 계약을 승낙하자 손등에 마법진이 생겨났는데 푸른색으로 그려진 원형의 마법진이었다.

“성검의 위력을 확인해볼까.”

각종 금제가 사라져서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됐는데 성검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역시 에픽 무기라 이건가.

“아, 내가 체력 능력치가 높아서 그렇군.”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커다란 대검을 한 손으로 쓰고 다녔다. 롱소드 정도의 성검이 가볍게 여겨지는 건 당연했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버스 쪽으로 날아갔다. 폭주족들은 무차별적으로 버스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지척에 다가가도 몰랐다.

가장 후미에 있는 버스의 위에 올라타서 놈들을 보니 저번처럼 새하얀 얼굴에 스포츠 컷의 머리를 한 덩치들이었다.

새끼들, 개성이 없어.

“설마 혐오주의자들의 잔당들은 아니겠지.”

나는 번개 같이 몸을 움직여 놈들을 죽였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놈들이 낙엽 쓸리듯 쓰러졌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있어도 내가 훨씬 빨랐다.

확실히 잘 베이는데.

성검은 날이 잘 들고 가벼워서 휘두르기가 딱이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며 신나서 소리쳤다.

“날휘딱!”

아자젤이 물었다.

-날휘딱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날이 잘 들어서 휘두르기 딱이라고.”

그런데 스킬 같은 건 없나.

“야.”

-왜요.

“명색이 성검인데 휘두르는 것 밖에 없어? 휘두르기만 하면 밋밋하잖아.”

-당신이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는 연참 공격이 있어요.

“연참 공격? 그게 뭔데?”

-연속 베기요!

“아.”

연참이라··· 이름부터 소름 돋는 기술이군.

내가 실망해서 입맛을 다시자 아자젤이 말을 이었다.

-물, 불, 바람, 땅 4원소의 속성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아직 당신이 사용하기엔 무리에요.

“왜?”

-당신은 악하니까요. 착한 사람만이 성검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어요. 참회하고 참회하고 또 참회하셔야 돼요.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악하고 선하고가 어딨어.

들이대는 잣대마다 다른 거지.

피잉!

버스 쪽의 놈들을 모두 죽이고 몸을 돌리는데 휴지가 있는 쪽에서 파공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내 쪽으로 향하고 있던 우두머리 무리가 휴지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놈들에게 달려가서 오토바이를 차례대로 때려 부쉈다. 오토바이가 펑하고 터질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역시 펑하고 터지는 건 영화적 연출이었나.

“으악!”

“컥, 뭐야!”

너무 빨리 움직였더니 놈들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하고 우왕좌왕했다.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히자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역정을 냈다.

“누구냐!”

“남에게 누구냐고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

내가 놈 앞에 서서 말했다.

“나는 KTM의 행동대장 크림슨이다!”

“KTM? 그게 뭔데?”

“킬 더 몽키의 약자다! 원숭이!”

“아, 너희들 누군지 알겠다.”

놈의 말을 듣고 출처가 대강 파악 됐다.

이 새끼들 역시 인종혐오조직의 끄나풀들이었군.

그때 다 죽은 게 아니었었나.

생각하고 있는데 크림슨이 소리쳤다.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볼 일을 좀 보고 왔지.”

나는 손가락을 들어 버스가 있던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놈들의 부하들이 오토바이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맙소사! 언제 내 부하들을 죽인 거야!”

“아까 전에.”

“이럴 수가, 그 짧은 시간에! 원숭이 주제에 그런 게 가능하다고!?”

놈은 정말로 놀랐는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는데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질려서 마치 못 생긴 석고상 같았다.

“나한테는 너희들이 원숭이로 보여.”

나는 단숨에 탄지공을 쏴서 크림슨의 남은 부하들에게 일일이 날렸다. 내 손에서 빛의 섬광이 번쩍한 직후, 주변에 있던 덩치들이 덩칫값 못 하고 볼품없이 쓰러졌다.

“어! 어어어! 뭐야! 이거 농담이지?”

크림슨이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너 말고 끄나풀이 또 있냐?”

“너 정체가 뭐야···! 말로만 듣던 인간형 보스 몬스터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 끄나풀이 또 있냐고.”

“역시 동양인들은 몬스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어!”

내가 다가서자 놈이 뒷걸음질 쳤다.

“오지 마! 괴물아!”

놈의 손에서 번개가 몰아쳤는데 살짝 따끔할 뿐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거 얘기가 안 통하는 놈이네.

나는 단숨에 놈에게 엄습해서 로우킥으로 정강이를 때렸다. 뼈 부서지는 소리가 뿌두둑 울리고 놈의 다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끄아아아아악!”

“아, 나 힘 조절.”

조금 더 살살 쳤어야 했는데 생각처럼 힘 조절하기가 어렵다.

크림슨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섰다.

“히, 히이이이익! 살려줘!”

“쉽게는 안 죽일게. 끄나풀이 어디에 더 있는지만 말해. 그럼 편히 죽을 수 있어.”

나는 공격수단을 바꿔서 근처에 있던 총을 주웠다. 놈들이 들고 있던 총이었는데 헌터용으로 개조가 된 총이라 그런지 생김새도 예쁘고 멋있었다.

피융!

방아쇠에 손을 넣고 발사했더니 내 마력이 감소하면서 플라즈마 같은 게 발사됐다.

“우와. 대단한데. 요즘엔 이런 총도 만드나?”

내가 총구를 겨냥한 채 웃자 크림슨이 벌벌벌 떨었다.

덩치는 소처럼 큰놈이 왜 이렇게 겁이 많아, 마음 아프게.

그냥 휴대폰을 빼앗아서 최근 전화목록이나 확인하고 이대로 죽여 버릴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전신을 강타했다.

“어!”

소름끼치는 기운을 따라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블랙홀 같은 소용돌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멀거니 섰다.

뭐야?

이거 말로만 듣던 토네이도인가?

미국과 유럽 같은 지역에 가끔 토네이도가 생겨난다고 들었다. 발생 조건은 뇌우와 유사하다고 하지만 아직 수수께끼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신기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사람이 튀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