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걷혔다.
“음.”
지구에 도착한 가이즐러 버켓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천외천에서 외부차원까지 포탈을 함부로 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공관의 허락이 떨어진 이번만은 특별했다.
“일단 흔적을 따라서 무작정 오긴 왔는데 막막하군.”
날개달린 드워프 족 나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버켓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포탈을 연 것이다.
천외천의 존재가 쉽게 죽을 리는 없었다. 설령 침략담당자의 페널티로 본신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 한다하더라도 자살 외의 죽음은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렇다면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찾아서 쥐어짜면 쉽게 해답을 얻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놈이 범인일 수도 있고.
“이 근처에서 유난히 특출난 기운이 느껴지는데.”
코를 찡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밑에는 거하게 판이 벌어져 있었다. 참상의 한 가운데에는 주은성과 크림슨이 버켓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성체가 사는 차원답지 않게 난폭한 곳이군.”
부서진 버스와 오토바이들을 보며 저급한 기계문명을 한껏 비웃어주고 버켓은 등에 멘 가방을 뒤적거려 기계장치를 꺼냈다.
천외천 문명의 산물, 정보 분석기 MK2.
무려 초록색 구슬을 10개나 주고 산 신형 기계장치였다. 안경과 비슷한 생김새의 장치는 착용을 하면 상대의 정보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는데 버켓이 관심을 가진 것은 전투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구슬 값을 하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아봐야지.”
버켓은 장치를 착용하고 주은성과 크림슨을 스캔했다. 안경의 테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글라스에 수치가 떠오르며 그들의 정보를 분석했다.
띠리리리릭!
먼저 크림슨의 전투력을 파악한 버켓이 크큭 하고 웃었다.
“전투력 667··· 완전 갓 걸음마를 뗀 아기 수준이군. 이 정도면 아무리 담당자의 페널티가 있다 해도 나달이 이 녀석한테 죽었을 리는 없지.”
그는 이어서 주은성의 전투력도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글라스에 수치가 떠올랐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 어어!?”
일순 눈이 한껏 치켜떠지고 현기증이 났다. 글라스에 떠오른 수치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뭐야? 이상한데··· 기계 고장인가. 시련으로는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전투력이···.”
버켓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글라스에 비쳐진 전투력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1000을 넘어서 2000··· 2000을 넘어서 3000··· 3000을 넘어서 4천과 5천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다.
“미친, 이거 고장인가?”
하계의 존재주제에 자신보다 전투력이 높게 나오다니. 이건 기계 고장이 확실했다.
“아기 수준의 놈은 분명 제대로 나오는데······.”
자신의 전투력과 크림슨의 전투력을 다시 비교하고 버켓은 고개를 갸웃 숙였다.
특정 인원의 정보만 제대로 읽지 못 하는 고장인가.
초록색 구슬 10개면 작은 값어치가 아니다. 정보 분석기를 구매하기 위해 꽤 많은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데 초기불량이라니. 운이 나빠도 단단히 나빴다.
“개봉 씰을 뜯어서 환불도 안 되는데. 돌아가는 즉시 교환을 받아야겠군. 흐음.”
오감을 확장해서 기운을 느껴보면 분명 주은성으로부터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시화했을 때 하계의 존재가 자신보다 전투력 수치가 높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특이사항으로 기록해두고······.”
태블릿 같은 장치를 꺼내서 조사기록에 기록을 해두고 버켓이 다시 몸을 돌렸다. 천천히 땅으로 내려가는데 그의 동공에 땅바닥에 꽂힌 검이 보였다.
“잠깐. 저건 성검이잖아.”
* * *
나는 하늘에 나타난 남자를 가리키고 물었다.
“네 친구냐?”
크림슨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뭐지. 저거 입고 있는 거 내복 아냐?”
나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검정색 쫄티와 쫄바지 같은 것을 입은 채 등산가방 같은 걸 메고 있었는데 굉장히 촌스러웠다. 특히 쫄바지의 가운데에는 특정물건이 툭 튀어나와있어서 속으로부터 역겨웠다.
정신병자로 보이진 않는데, 대체 뭐지? 노출증 환자?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사이즈가 작잖아.
“자신감이 과한 사람인가.”
그때 남자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가 적아구분을 파악하기 위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성검이 말했다.
-천외천의 존재에요!
“천외천?”
-네!
그러고 보니 요정에게서 느꼈던 것과 동일한 마력파동이 살짝 느껴졌다.
벌써 날 찾아오다니 이 새끼들 생각보다 일처리가 빠른데.
천외천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탐색스킬을 사용해서 녀석의 정보를 파악해보니 요정과 마찬가지로 정보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과연 천외천의 존재가 맞구나.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네가 이 차원에서 가장 강한 존재냐?”
“뭐?”
“성검도 가지고 있고, 기운도 제일 강하고. 맞는 것 같은데.”
나는 받아쳤다.
“그럼 네가 천외천에서 온 놈?”
“호오, 역시 나달을 죽인 건 네 녀석이었나. 나달에게 뭔가 들은 게 있나보지? 얘기가 빨라지겠네.”
“나달?”
나는 총을 버리고 땅바닥에 꽂아둔 성검을 뽑아 허리에 찼다.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게. 그리고 물었다.
“나달이 누군데? 설마 요정의 이름이 나달인가?”
“요정?”
“그래.”
“요정이라고? 아아, 나달이 그런 모습을 하긴 했었지. 가만··· 그러고 보니 너는···.”
그는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어쩐지 낯이 익다했더니 그 녀석이었군. 아르카디아의 문제로 우리가 공관에 결재를 받고 소환했던 놈이었구나. 그래서 정보 분석기가 오류를 일으킨 건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는 흥미로운 존재를 보는 사람처럼 나를 관찰했다.
내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알 필요 없다.”
그럼 말을 꺼내지 말든가.
내가 한숨을 쉬고 물었다.
“왜 왔냐? 날 죽이러 온 건가?”
“그래.”
“왜?”
“네가 나달을 죽였으니까.”
나는 그의 단호한 말을 정정했다.
“나는 녀석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녀석은 혼자서 피를 토하고 죽었거든.”
“혼자서 피를 토하고 죽어?”
“그래.”
녀석은 눈에 쓰고 있는 안경 같은 것의 테두리를 몇 번 누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박동 정상에 눈동자 떨림도 전혀 없고, 확실히 진실일 확률이 높군.”
“그건 뭐야?”
“이건 정보 분석기란 거다.”
“정보 분석기?”
“네 녀석의 모든 정보를 수치화해서 알 수 있지. 키, 몸무게, 시력, 청결도, 건강, 심장박동수와 거짓말의 여부, 게다가 최근 자위행위 횟수나 성행위의 횟수도 알 수 있다. 성행위의 횟수를 보니 너 얼마 전에 엄청나게 했군.”
나는 서리 엘프 족의 기쉬네를 떠올렸다.
성행위 횟수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그 외에도 전투력 같은 것들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네 전투력은 오류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인 게 아쉽구나.”
“신기하네. 혹시 통역기능 같은 것도 있나?”
나는 이마에 쓰고 있는 수은 장식 띠를 만지며 물었다.
“통역 같은 건 기본적인 기능이다. 너와 내가 말이 통하고 있는 것도 이 분석기 때문이지.”
“굉장한데.”
천외천은 정말 굉장히 발달한 문명이었구나.
아, 그러니까 차원을 넘나들면서 차원을 도둑질하고 팔 수 있는 건가.
녀석이 말했다.
“어쨌든 다시 묻지. 그래서 나달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정확한 건 구슬을 먹고 죽었어. 구슬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거든.”
“구슬?”
“새하얀 구슬인데 녀석은 그걸 근원이라고 불렀어.”
“근원!”
놈이 손뼉을 짝 치고 놀랐다.
“근원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녀석이 소원석에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요정도 소원석을 노리다가 죽었었다.
“궁금해?”
“그래.”
“맨입으로는 가르쳐줄 수 없는데.”
나는 정보를 알아낼 요량으로 협상의 여지를 던졌다. 하지만 녀석은 내 부처님 같은 성의를 무시했다.
“그래? 그럼 널 죽이고 알아내야겠다.”
놈이 배낭에서 구부러진 쇠막대를 꺼냈다. 가래떡 같은 모양새의 철봉 세 개가 떡처럼 붙어서 나왔는데 놈은 그것을 만져서 조립하더니 금세 긴 철봉 하나를 만들었다.
“신기하네.”
철봉도 신기했지만 그 커다란 게 들어가 있던 가방도 신기했다.
저 등산가방도 아공간과 비슷한 건가.
“근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알아내려고?”
“그건 걱정마라. 그 편이 훨씬 수월하니까. 어차피 너는 나달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것도 같고.”
놈은 내 가슴 쪽으로 철봉을 휘둘렀다. 내가 가뿐히 피했는데 그때까지 멀거니 지켜보고 있던 크림슨이 궤도에 있다가 엄하게 목이 잘렸다. 그는 단말마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죽었다.
“되게 뭉텅해 보이는데 칼처럼 예리하구나.”
“주인!”
“오지 마. 거기서 구경하고 있어.”
뒤에서 휴지가 소리치자 내가 말렸다. 이거 보통 놈이 아닌 것 같다. 괜히 휴지가 말려들면 일이 더 귀찮아진다.
파앙!
놈이 철봉을 수평으로 세우자 길이가 훅 늘어났다. 마치 손오공이 쓴다는 여의봉 같았다. 내가 피하자 놈이 그걸 무작정 휘둘렀는데 길어진 봉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놀라운 금속이었다.
파앙!
탄지공을 쏴서 대항하자 놈이 철봉으로 쳐냈다. 천마신공을 끌어올려 내력을 실었음에도 녀석의 철봉은 멀쩡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더 많은 마력을 탄지공에 실었는데 그제야 철봉이 잘려져 나갔다.
“어! 어어! 뭐야!”
놈이 놀란 숨을 훅 들이켜며 소리쳤다. 하지만 철봉은 자가수복 기능이 있는지 금세 복원되어 제 원형을 갖췄다.
이거 완전 황금 고블린이네.
탐나는 물건을 많이도 들고 있잖아.
녀석은 발정난 개처럼 봉을 휘둘렀는데 내가 몸을 피하면 피할수록 뱀처럼 잘도 따라붙었다. 철봉이 휘둘러지는 곳엔 어김없이 푸른색 기류가 따라붙었다. 나는 몸을 피하면서 그 푸른색 기류가 검기 같은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파앙!
성검을 휘둘러 엄습하는 철봉을 쳐냈다. 천마신공을 끌어올려 성검에 주입하자 놈의 철봉에 팽팽히 맞설 수 있었다.
씁, 검술도 하나 배워놓든가 해야지. 검술 스킬이 없으니 검기도 제대로 못 사용하다니.
아니, 애초에 무공스킬의 부재가 문제다. 능력치는 좋은데 그럴 듯한 스킬이 없다.
“야, 성검!”
-네?
“너는 뭐 없냐?”
내가 철봉을 쳐내고 물었다. 변화무쌍한 철봉에 비해 성검이 너무 초라했다. 이거 명색이 성검인데 능력치 차이가 너무 심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참회하고 참회하고 또 참회하셔야···. 아니면 연참 공격을···.
“후, 됐다. 연참 얘기는 꺼내지 마라.”
철봉을 막아서고 다시 검을 휘두르는데 그 순간 놈이 허점을 비집고 다른 손으로 공격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