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 * *
생체반응이 또 끊겼다. 퍼시픽 림은 황당해서 손목시계 모양의 인식표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미쳤군.”
다른 차원으로 파견을 간 인원은 인식표를 통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식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인원의 건강상태나 보고사항, 특이사항 등을 알 수 있는 장치였다.
“나달에 이어서 버켓까지 죽었다고? 진짜 돌았나, 이게.”
퍼시픽 림은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동기화된 보고사항을 확인했다. 전투력이 높은 특이존재를 파악했다는 보고가 끝이었다. 그 뒤로 얼마 뒤 버켓의 생체반응은 사라졌고 사망한 걸로 추측됐다.
“답이 없어. 답이···. 지구라는 행성은 대체 뭐지? 뭐가 문제인거야?”
오랜 작업 경력 중에 이토록 지긋지긋한 차원은 처음이었다.
보통 공관으로부터 침략차원을 결재 받고 부여할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받는다. 시련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일어나 해당 차원에 ‘회귀자’ 같은 놈이 생기기도 하지만 무척 드문 일이다.
그도 지구가 있는 차원을 맡기 전에는 회귀라는 걸 귀동냥눈동냥으로만 들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회귀로 지구가 수차례 시간 역행을 하고 담당자인 나달이 죽자 신경이 거슬렸다. 온 관심이 지구 차원에 쏠렸다.
“와중에 조사관으로 파견한 버켓마저 죽다니.”
특히 버켓이 남긴 마지막 보고사항이 걸작이다. 하계 차원에서 전투력 6000대의 존재를 식별했다는 보고는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 정도면 단순한 하계 차원의 존재가 아냐.”
전투력 6천대면 그가 가진 작업장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함이었다. 지구 같은 차원에 파견을 보낼 수준의 놈이 아니라 이곳 천외천에서 작업을 해야 할 놈인 것이다.
“설마 다른 쪽 그룹에서 뒤통수를 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고급 인력을 하위 차원 공략에 쓰는 건 인적자원 낭비다. 소 잡는데 닭 잡는 칼을 쓰지 않듯이 머리가 있다면 그런 일은 누구도 벌이지 않는다.
게다가 퍼시픽 림은 지금까지 딱히 원한을 산 일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전투력 6천대의 존재는 정말로 갑자기 튀어나온 뜨거운 감자였다.
“이제 어떻게 한다.”
퍼시픽 림은 한숨 같은 숨을 토해내고 머리를 싸맸다.
이제 남은 수는 얼마 없다. 공관에 보고를 하고 다시 조사관을 파견하거나, 지구라는 차원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경력에 흠집이 갈 사항이다. 누구도 그와 같은 입장이면 포기하기 보단 어떻게든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리를 비울 수 없고 다른 놈을 시키는 것도 마음에 걸려.”
그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판단을 내렸다.
“일단 유예하자.”
* * *
미헌협의 밥 말라리에게 찾아가 크림슨의 휴대폰을 건네자 그가 반색했다. 나는 미국의 정보력에 감탄했는데 그들은 크림슨의 휴대폰을 통해 관련자들의 휴대폰을 실시간으로 도청하는 것이 가능했다.
도청!
비단 도청뿐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움직여 몰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말라리는 함구를 당부하며 ‘사실 모든 휴대폰에 백 그라운드 작업으로 감시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럼 연예인들의 사생활도 훔쳐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헌협 차관급 이상의 특별권한이죠. 이용의 승인을 받을 때는 업무를 근거로 권한의 허락을 받지만, 뭐··· 마음만 먹으면 모든 사람의 휴대폰을 훔쳐보는 게 가능합니다. 주은성 헌터님도 요청 시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말라리는 웃으면서 도청하고 있는 휴대폰을 예시로 보여줬는데 카메라 렌즈를 통해 어떤 예쁜 여자가 헐떡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유명한 영화에 출연한 여자배우였다.
캐릭터 이름이 검둥이 과부였나?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녀는 외설적인 말을 하면서 자기 위로를 하고 있었다.
“이런 건 약과지요. 가끔 보면 정부에서 큰 사건을 은폐하거나 날치기 법안을 통과할 때 연예계 스캔들 기사가 같이 뜨죠?”
“그거 음모론 아닌가요?”
“음모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 이걸 통해서 하는 겁니다. 정보를 다 알고 있으니 필요할 때 푸는 거지요.”
“우와. 치사하네요.”
“물론 그런 짓은 사적인 용도로 하지 않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 이용하죠.”
말라리는 대번에 크림슨의 휴대폰을 통해 KTM 단체의 정보를 모두 알아냈다. 그는 이번에도 내 도움을 간절히 부탁했는데 나는 단호박을 먹은 사람처럼 거절했다. 그것보다 천외천의 일이 더 중요했다.
“아쉽군요.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주은성 헌터님의 위업은 저희 쪽에서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저도 블랙카드 잘 썼습니다. 앞으로도 잘 쓸게요.”
그러면서 말라리는 내게 상자를 건넸다. 쓸 만한 아이템이라도 넣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미국 헌터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명예의 훈장과 대통령 감사패입니다. 주은성 헌터님께 큰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받아주십시오.”
“뭐, 이런 걸 다···.”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거나 저희 측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미헌협 전체가 발밑에서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느낀 거지만 미국 측은 고급인력을 핥는 수준이 굉장하다.
이러다간 똥꼬가 다 헐겠어.
나는 그걸 받고 미헌협 본관을 나섰다. 휴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천외천의 존재가 입던 방탄 타이즈를 입고 한손에는 광선창을 쥐고 있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대비해서 내가 챙겨준 것이었다. 몸매가 부각되자 인물이 확 살아나서 보기 좋았다.
“결국 천외천으로 가야하는 건가.”
나는 소원석이 했던 말과 쫄쫄이 맨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이 귀에 걸렸다. 특히 쫄쫄이 맨은 자신보다 강한 놈이 나를 죽이러 온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들의 규칙을 잘 몰랐다. 정말 강한 놈이 와서 다짜고짜 지구를 멸망시켜버린다면? 잘못하면 내 덕에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피하기보단 부딪혀야지.”
나는 서리 엘프족에게 받았던 메자이의 부적을 사용해서 단숨에 서리 엘프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휴지는 소환해제 했다가 다시 소환하는 방법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천외천으로 떠나기 전 가족들을 만나고 마지막 준비를 하기로 했다.
* * *
오랜만에 집에 들러서 부모님을 만나 뵙고 길드 사무실에 들러서 동생 주아랑과 박은애를 봤다. 길드는 여전히 무탈했고 큰 이변은 없었다.
유지미의 일기장을 살펴봤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고 했던 때가 앞으로 10년 쯤 후니까 아직은 시간이 남은 것이다.
나는 동생 주아랑에게 말해서 길드서고를 이용했다. 성마검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쓸모 있는 검술 스킬 하나가 필수였는데 길드 서고에는 예전부터 내가 모아둔 스킬 북들이 많았다.
간단한 기초마법서적부터 각종 무공서적까지. 다양한 종류들의 서적이 있어서 흡사 대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서고의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며 무공서적을 찾다보니 검법 무공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내 눈에 차는 검법이 딱히 없었다.
내 눈이 워낙 높은 것도 있었지만 유지미와 그 측근들이 죽은 이후로 무법지대의 토벌사업이 지체되어 스킬 북의 발견이 뜸해진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천외천에 가기 전, 하나쯤은 익혀둬야 했기에 나는 타협을 해서 은의검법이라는 걸 익혔다. 등급도 탄지공처럼 유니크였고 무엇보다 내 이름 가운데 글자가 들어가 있어서 묘하게 마음이 갔다.
“검법은 오랜만이네.”
나는 익힌 검법초식을 성마검으로 몇 번 펼치고 그대로 길드건물을 빠져나와 다시 서리 엘프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 편의점과 마트를 들러서 식량을 사두는 걸 잊지 않았다. 천외천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만큼 대비는 부족함 없이 충분히 해야 한다.
대형마트를 들러서 침낭세트마저 구매하고 해가 질 무렵쯤에 봉인석이 있던 백두산 부근에 다시 도착했다.
천외천의 포탈이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는데 근처의 나무초소에는 휴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그 앞에는 기쉬네와 엘프족의 여왕 레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가 사는 곳으로 갈거냐?”
여왕이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요정을 악마로 알고 있었다.
“응.”
“죽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가야지.”
나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긴장은 조금 됐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주은성!”
그때 기쉬네가 달려왔다. 그녀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가는 구나.”
“그래.”
“죽으면 안 돼. 알았지?”
“안 죽어.”
그녀는 울먹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정이 많은 성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예상 외였다.
역시 누구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보고 싶을 거야.”
“나도.”
“다시 돌아올 거지?”
“당연히 돌아와야지.”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날 껴안았다. 키가 나보다 작아서 정수리의 시큼한 냄새가 맡아졌는데 그것마저 사랑스러웠다. 침대 위의 정이 이래서 무섭나 보다.
“야야, 일어나.”
“쓰읍. 왔냐, 주인.”
나는 휴지를 발로 툭툭 깨우고 포탈 앞에 섰다.
성검과 마검을 얻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포탈 안에 손도 안 들어가던데 지금은 될까?
성마검을 쥔 채 손을 뻗자 손이 포탈에 먹혔다. 빛의 글귀가 떠오르거나 극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성검과 마검을 얻음으로써 포탈의 출입조건을 만족한 것 같았다.
날 쳐다보며 휴지도 손을 뻗었는데 그녀는 투명한 장막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져 나왔다.
“나는 안 들어가지는데.”
“흐음.”
이러면 소환을 해제하고 도착한 후 다시 소환을 해야 하나.
모든 게 불확실해서 확신을 할 순 없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소원석이 말하길 내 본심대로 행동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했었나.”
나는 생각의 끝에 휴지를 소환해제하고 마지막으로 여왕과 기쉬네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포탈에 진입하기 전 최종 점검을 했다.
“메자이의 부적, 수은 장식띠, 천외천의 쫄쫄이 맨에게 받은 정보 분석기··· 고밀도로 압축된 아공간, 성마검··· 좋아, 빠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점검을 끝내고 단숨에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포탈은 굶주린 생물처럼 나를 한 입에 집어삼켰다.
슈우웅!
포탈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는데 마치 엄마 캥거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아기 캥거루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졸립다.’
나는 수마에 먹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는데 한참 만에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땐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강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