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파앙!
빛의 섬광이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뭔가 날아온다!”
눈치 빠른 천사 하나가 급히 방어막을 사용했다.
파지직!
파공음이 일고 허공에서 탄지공과 방어막이 맞부딪혔다. 탄지공은 장막을 뚫고 날아가 그대로 천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꽥!”
천사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비명이 참 저렴하네.
동료 한 명이 죽자 놈들이 소란스러워졌는데 그들은 광원의 흔적을 따라 내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저기다! 저기에 놈이 있다!”
내가 성마검을 들고 놈들을 향해 도약하니 그들 중 하나가 내 앞을 가로 막고 섰다.
“누구냐! 어디서 행패야!”
나는 말 대신 검으로 대답했다. 검이 궤적을 그리자 놈의 머리가 갈라지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요정헌터 주은성이다!”
뒤늦게 자기소개를 해줬더니 뒤에서 다른 천사가 엄습해왔다.
새끼들이 예의를 모르네.
“죽어라!”
놈은 갈고리 같은 낫을 휘둘렀는데 생긴 게 꼭 서양식 저승사자풍의 거대한 낫이었다.
“어딜.”
나는 엄습하는 낫을 피하고 반원을 그려서 그대로 놈의 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두 명이 죽자 남은 천사들이 단번에 덤비지 못 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저 녀석이야! 저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야!”
한 천사가 나를 가리키고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내게 두들겨 맞은 놈인 듯했다.
역시 구분이 안 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어.
천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는데 뜯어보니 아직도 숫자가 많아서 열 명쯤은 됐다.
나는 피가 튈 것을 염려해 탄지공을 날리기로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다섯 개의 탄지공이 날아가자 표적으로 찍힌 몇몇 놈들이 방어막을 사용했다.
처음에 방어막이 뚫리는 걸 못 봤나.
감상하고 있는데 두 명은 죽고 세 명은 살았다.
다 안 죽었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정보 분석기로 알아보니 놈들의 전투력에 차이가 있었다. 죽은 놈들과 달리 살아있는 놈들은 전투력이 3천대 후반이었다.
마력을 더 아낌없이 쏟아 부어야겠는데.
그때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천사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과과광!
순간 내 발밑에서 불기둥이 훅 솟구쳤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하늘을 날아서 단숨에 화염에서 벗어났다.
마법사 셋에 궁수 둘, 전사 셋인가.
눈대중으로 남은 수를 파악하고 몸을 움직이니 놈들도 저마다 행동을 개시했다.
푸스스슥!
숱한 발길질에 모래 먼지가 흩날렸다. 앞에서 화살 세례가 날아오고 밑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몸을 비틀어 피하니 커다란 낫 두 개가 내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카강!
주먹으로 창을 부수고 검을 휘둘렀다. 성마검이 근접한 녀석의 목을 가르니 후발대로 달라붙은 놈이 기겁을 했다.
“히이이익!”
“겁 많네. 네가 베인 것도 아닌데 왜 비명을 질러.”
나는 검을 휘둘러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천사의 몸이 연두부가 잘리듯 수직으로 잘렸다.
서거걱!
내장과 장기가 튀어나오고 초록색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윽, 역겨워.
화르륵!
검을 고쳐 쥐는데 그 순간 앞에서 한 녀석이 불덩이를 날렸다. 지옥에서 막 퍼 담은 용암처럼 불덩이의 핵은 잿빛으로 반죽돼 있었다.
나는 검의 풍압만으로 불덩이를 없앴다. 마법을 부린 놈이 뺨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도대체 어떻게 없앤 거지?”
“뭐긴.”
나는 녀석의 명치에 칼을 박아줬다. 은의 검법 1초식인 점형 검법을 펼쳤는데 놈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응기이잇!”
놈은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코와 입에서 초록색 피거품을 머금은 채 죽어있었다.
“은의 검법이 위력이 좋네.”
나는 성마검을 쳐다보고 만족했다. 내가 강한 건지 검법의 효율이 좋은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은의 검법은 점형과 선형, 폭발형의 초식으로 분류돼 있었다.
점형은 한 곳을 밀집하는 찌르기식의 공격이고 선형은 베는 형식의 공격, 폭발형은 폭발하듯이 검을 연속으로 휘두르는 연초식의 공격이다.
그런데 고작 점형의 찌르기가 이런 위력이라니.
“검법 수련에 더 힘을 써야겠어.”
검에 묻은 피를 털고 고개를 드니 이제 여섯 명밖에 안 남았다. 놈들은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섰는데 나는 탄지공을 날려 한 명을 더 죽이고 만족했다. 숫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보기 좋았다.
“이, 이익!”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놈들은 어정쩡한 자세로 밀집해서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감각을 확장해서 들어보니 ‘이길 수 없다.’, ‘증원 요청을 해야 한다’, ‘도망가자’ 같은 말들이 오갔다.
한두 명이 죽었을 때부터 알 수 있는 걸 지금에서 고민하다니.
머릿수를 믿는 놈들이 이래서 문제다.
“살고 싶나?”
내가 먼저 자비의 손을 뻗었다.
“침입자, 살려줄 거냐?”
천사들 중 가장 강한 놈이 나섰다. 아까 정보 분석기로 전투력들을 파악해뒀더니 놈들이 대충 구분이 갔다. 전투력 3590의 나한테 얻어터진 놈은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었다.
“하는 것 봐서 살려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지.”
“용건이 뭐냐?”
강한 천사가 물었다.
“거기 저 녀석을 이쪽으로 넘겨.”
나는 전투력 3590의 천사를 가리켰다.
“그럼 살려줄 거냐?”
“그래.”
놈들은 일체의 고민도 없이 동료의 등을 떠밀었다.
역시 요정과 같은 종족이야.
염치가 없고 양심이 빻은 건 날개 달린 드워프 족의 종족 특성인 것 같았다.
“시, 싫어! 난 죽기 싫어!”
전투력 3590의 천사가 소리쳤다.
“살려줘! 저 녀석은 미친놈이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충은 더 이상 우리의 동료가 아니다!”
강한 천사가 딱 잡아뗐다. 누가 누구를 욕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는 행동을 보면 다 그 나물에 그 밥인 것 같은데.
나는 저항도 포기한 3590을 넘겨받고 그 즉시 탄지공을 쏘았다.
팟! 파밧! 팟!
빛의 섬광들이 표적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미간을 관통당한 천사들이 반항도 못 하고 피거품을 문 채 절명했다.
“모, 모두 죽였어! 이 거짓말쟁이! 살려준다며!”
3590이 소리쳤다.
“거짓말은 아니지. 널 살려줬잖아.”
일종의 사형집행 연기지만.
내 말에 놈의 동공이 커졌다. 살았다는 안도감인지 녀석은 떨리는 시선으로 날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얘기를 나누지.”
나는 녀석을 앉히고 맞은편 바위에 앉았다.
“얘기?”
3590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
“무슨 얘기?”
나는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이 녀석을 죽이는 건 정보를 캐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내가 물었다.
“여긴 천외천의 시민권을 따기 위한 시험장이냐?”
“그, 그래.”
성검이의 말이 맞았군.
-지금까지 제 말을 의심하고 계셨던 거예요?
내면에서 성검이가 따지듯이 소리쳤다.
-크큭.
마검이도 한 마디 했다. 웃음뿐이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천사에게 물었다.
“아까 귀환자라고 했는데 귀환자가 뭐지?”
3590은 잠깐 나를 노려보더니 성마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사람처럼 꼴깍 침을 삼키며 말했다.
“다른 차원에 파견을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을 귀환자라고 해.”
“역시 너랑 닮은 나달 같은 놈을 말하는 건가.”
“너, 나달님을 아는가!”
3590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 새끼 생각하면 치가 떨려. 죽었지만.”
녀석의 눈이 커졌다.
“나달님이 죽었다고?”
“그래.”
“어, 어떻게 나달님이···. 그럴 리가···.”
“어쨌든 귀환자는 확실히 다른 차원에 파견되는 요정 같은 존재를 말하는 거였군.”
나는 다른 의문사항을 물었다.
“그럼 천외천으로 가는 건 시민권을 따는 게 유일한가?”
“시민권이 없으면 천외천에 출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생긴 건 어떻게 생겼는데?”
놈이 손등을 내밀었다. 내가 성검과 마검의 계약을 끝낸 후 얻은 표식처럼 놈의 손등에도 뭔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점은 색깔이 초록색에 상품의 라벨처럼 특정한 숫자가 붙여있다는 것뿐이다.
“내 시민권도 만들어 줄 수 있냐?”
“나는 권한이 없어.”
“그렇군.”
아쉽게 됐다. 놈을 닦달해서 시민권을 바로 얻을 수 있다면 귀찮은 일이 줄어들 텐데.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뭘 물어보지?
“음.”
아는 게 있어야 물어볼 것도 떠오를 텐데 딱히 아는 게 없어서 묻는 것도 한정적이었다.
때마침 바닥에 떨어진 빨간 구슬이 내 시선을 스쳐 지나갔다. 아까 이 녀석을 상대한다고 바닥에 내버려둔 거였다.
“구슬은 뭐지?”
“구슬? 무슨 말이야?”
질문을 좁힐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빨간 구슬을 쥐고 와서 다시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아까 보니 누구는 이 구슬을 먹고, 누구는 품에 챙기더라고. 너는 내 정보 분석기를 보며 초록구슬 10개의 값어치라고 했고. 구슬은 여기서 화폐 같은 건가?”
3590의 눈이 밝게 트였다.
“구슬을 모른다고? 너 설마 하계에서 온 사람이야?”
“그래.”
나는 숨길 것도 없어서 대충 대답했다. 그게 녀석을 놀라게 만들었다.
“맙소사! 성검과 마검을 보고 설마설마 했는데, 하계의 존재가 자발적으로 천외천에 온 것이었다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내 윽박질에 놈이 찔끔했다. 녀석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대답했다.
“구슬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자 화폐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수단?”
“천외천은 전투력이 높은 존재가 법인 세상이야. 구슬을 먹으면 경험치를 얻을 수 있어. 그래서 구슬이 화폐로 이용되기도 해.”
나는 의문이 풀렸다. 그래서 누구는 먹고 누구는 품에 챙겼구나. 나는 생각을 곱씹다가 놈의 말에서 정보를 뽑아냈다.
“그럼 아까 내가 자발적으로 천외천에 왔다고 놀란 건 뭐야?”
“제 정신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를 놈이 없으니까. 여긴 하계의 개념으로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야. 너 같으면 지옥에 제 발로 오겠니?”
“지옥?”
“약한 사람은 무조건 죽어. 법도 없어, 완전히 무법지대야. 구심점이 없어서 수많은 하계의 이주민들이 상계로 가려고 하지.”
나는 입술을 매만졌다.
법이 없는 것 치고는 시스템이 제법 잘 갖춰져 있는데.
그래서 다시 물었다.
“시민권도 있으면서 무법지대라고?”
“천외천은 상계와 하계로 나눠져 있어. 상계는 천외천, 하계는 천외지. 넓은 개념으로 둘 다 천외천이라고 부르지. 두 세계는 극명하게 달라. 천외천이 천국이라면 천외지는 지옥이야. 내가 말한 건 천외지를 말한 거였어.”
결국 천외천 자체는 살기 좋다는 거였군. 납득이 갔다. 나는 아까 전의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다시 묻지. 천외천에 자발적으로 오지 않는 존재도 있냐?”
내 물음에 천사는 시선을 돌려 사람들 쪽을 쳐다봤다. 시험을 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겁을 먹은 아이처럼 멀거니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들이 왜?”
“폐기 처분이 확정된 차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야.”
“살아남은 사람들?”
설마 이 녀석들 차원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서 그쪽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기까지 하나.
생각을 하는데 그 순간 정보 분석기에서 경고음이 났다.
삐익! 삐익!
나는 신경질적인 소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직 정보 분석기의 기능을 완전히 파악한 건 아니었다.
“뭐야.”
분석기의 스크린을 확인하는데 저 멀리 하늘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었다.
“날개 달린 드워프 족은 아니네.”
안심하고 정보 분석기를 조작하는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뭐야.
여성의 전투력이 내 전투력을 뛰어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