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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72화 (72/127)

# 72

어찌나 늙었는지 삐쩍 마른데다 눈가죽이 축 쳐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하면서 정보 분석기로 확인하자 그제야 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일반 사람들보다 전투력이 현저하게 낮았다.

오래 사는 것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니군.

“누구야?”

내가 드워프를 가리키고 물었다.

“우리의 희망. 대현자님.”

주리스가 대답했다.

“대현자? 우리의 희망? 저 사람은 드워프잖아.”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다. 보통 인간들은 드워프와 함께 살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과 생리적으로 공생하지 못 한다.

“맞아. 드워프.”

주리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설마 드워프가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거냐?”

“드워프뿐만이 아냐.”

“그럼 엘프나 수인족도?”

“갈 곳을 잃은 뒤로 종족 구분이 옅어졌어. 천외지에 둥지를 틀고 나서 우리는 서로 공생하며 살고 있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위기가 부닥치자 어떻게든 안면 있는 이들끼리 뭉치게 되더라고.”

종족 간의 갈등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기라니. 어떤 수준의 위기일지 짐작도 안 갔다.

그보다 대현자라니.

“이 사람이 대현자라고? 드워프 대현자라니 엄청 안 어울리는데.”

“말조심해. 널 살려두는 것도 이분의 예언 때문이니까.”

주리스가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괜히 잘 풀어진 관계를 다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드워프의 늘어진 눈두덩이 꿈틀거렸다. 피부 아래에 묻혀 있던 푸른 눈망울이 빛을 발했는데 늙은 육체와 달리 눈빛이 살아있어서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울만 대현자는 아니네.

드워프가 빗자루 같은 눈썹을 움직이고 말했다.

“그 사람을 데려왔구나.”

“예.”

주리스가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여왕이 가장 높은 계급이 아니었구나.

나는 학창시절 때 배웠던 제정분리 사회를 떠올렸다. 제정분리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분리된 사회형태를 말했는데 이곳은 종교 세력이 정치 세력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현실보다 미신을 우선시 하는 건 별로 좋은 행태가 아닌데.

멀거니 서 있는데 드워프가 날 보고 말했다.

“맞구나.”

“맞아?”

맞긴 뭐가 맞아.

드워프는 상점가에 진열해 둔 물건처럼 날 뜯어봤다.

“확실해. 그 사람이다.”

“그 사람?”

내가 궁금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드워프는 그 대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용사님.”

나는 놀란 숨을 훅 들이켜고 뒤로 물러섰다.

“무슨 소리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영원한 안식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나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옆에 서 있던 주리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는데 나는 드워프의 말에만 신경이 쓰였다.

“용사님이라고?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훌훌훌훌.”

드워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드워프 노르만입니다. 예언을 받고 오랜 기간 당신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예.”

“왜?”

“그보다 여기에 오셨다는 건 제가 준비한 선물을 받으셨다는 증거겠지요.”

“선물?”

“유적 말입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노르만이라는 이름은 분명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 발견한 유적지 중에 그런 게 있었다.

“아이템들이 모여 있던 유적!”

내가 손뼉을 짝 치고 소리쳤다. 가장 처음 발견한 유적의 암호 문구가 내 이름이었다.

그게 이 드워프가 준비한 거였다니.

“예언이 제대로 실행됐군요.”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아주 오래된 유적인데.”

나는 중얼거리다가 스스로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회귀자들로 인해 지구의 시간이 꽤 많이 역행됐다. 지구에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이들에겐 아주 오래된 과거의 흔적이란 것이다.

깊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아서 나는 간단히 납득하고 그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 뭐야? 너희들 설마 아르카디아에서 온 거야?”

내가 생각의 끝에 떠오른 추측을 물었다.

“예.”

노르만이 대답했다. 가벼운 어조의 대꾸였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순간 시야가 뒤흔들리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맙소사. 정말로 아르카디아에서 왔다고?”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사님.”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아르카디아의 존재들이 멸망했다더니 이 사람들은 아르카디아에서 이주해 온 생존자들이었어.

순간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리스에게 닿았다. 동시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하길 그녀의 조상 중에 지구인이 있다고 했었다.

“너는 설마···.”

“나도 믿기지 않았지만 대현자님께서 확신하시는 것 같으니 맞는 것 같아.”

“내 후손이라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주리스를 보고 경악했다. 동시에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럴 리가.”

“왜?”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당신 후손이 맞아.”

“분명 아내와 애첩들이 숱하게 있었지만 피임은 확실하게 했어.”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피임을 확실하게 했다고?”

“그래.”

침대 위의 기억이라서 그런지 지금도 뇌리에 선명했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내가 막 마왕을 봉인했을 당시 아르카디아엔 제대로 된 피임법이 없었다. 동물의 내장을 이용해 피임을 하기도 했었는데 느낌도 별로였고 징그러워서 나는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익힌 기술이 마나사정법이었다. 질외사정법보다 피임률이 훨씬 높은 기술이었는데 마나를 이용해 정자의 운동성을 줄이는 획기적인 피임법이었다. 피임률도 높고 부가적인 효과로 정력도 고강해져서 매일 밤마다 아내와 애첩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마나사정법에 문제가 있었나?”

“무슨 소리야?”

“아냐.”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이마를 되짚었다. 내 후손이 눈앞에 서 있는 지금의 상황이 기묘했다.

이름이 주리스라고 하더니, 성씨가 주씨에 이름이 리스였구나.

“괜찮아?”

주리스가 물었다.

“아니, 안 괜찮아.”

나는 정신적 충격을 잠재우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참 만에 내가 진정하자 노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건 예언대로 흘러가는군요.”

“예언?”

“그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오랫동안 버텨왔습니다. 오직 당신과 만나는 날을 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날 왜?”

내가 되묻자 노르만이 토해내듯이 말을 이었다.

“부디 아르카디아를 되찾아주세요. 용사님.”

나는 황당해서 목을 세웠다.

“뜬금없어. 아르카디아를 되찾아달라니.”

그리고 물었다.

“아르카디아는 이미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팔린 거 아냐?”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들로부터 아르카디아를 되찾아줘? 뒤에는 천외천이 서 있는데?”

나는 천외천의 괴물 같은 전투력을 추측하고 물었다.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기 버거운 실정이다.

“예언에 따르길 용사님이 오셔서 저희 세계를 되찾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천외천의 모든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고 하셨습니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노르만의 푸른 눈빛이 점점 바래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도리어 예언의 내용이 궁금해져서 그를 몰아세웠다.

“내가 천외천을 붕괴시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 거냐?”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김이 팍 샜다.

“몰라?”

“예.”

노르만은 뻔뻔하게 대답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그와 내 시선이 교차했다.

“마지막 예언이 말하길 모든 건 용사님의 본심대로 행동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언이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본심대로 행동하라고?”

“예.”

나는 순간 소원석이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것마저 녀석이 준비한 일이었구나.

“잠깐만··· 그러면···.”

뭔가 더 물어보려는데 노르만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콜록!”

“의무관! 당장 의무관을 불러!”

주리스가 동굴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을 불렀다.

곧이어 시종들이 와서 노르만을 부축하고 노르만이 동굴의 한쪽 편에 있는 침상에 누웠다.

나는 그에게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주리스가 몸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닦달하며 나를 동굴 밖으로 이끌었다.

* * *

“수명과 맞바꾼거야.”

“뭐를?”

“자신의 모든 것을. 노르만은 평생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동굴에만 마법진이 있거든.”

“마법진?”

“그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계약한 곳이야. 그마저 마법진이 차츰 옅어져서 이제는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날이 드물지만.”

나는 주리스를 따라 그녀의 왕궁을 돌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물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아르카디아인들이야?”

“반은 아르카디아인들이고 반은 아냐. 우리가 천외지에 온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아르카디아를 빼앗기고 이곳에 이주했거든.”

“얼마 안 됐네.”

“40년이나 흘렀어.”

나는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

“너 마흔 살이나 되는 거야?”

“응. 정확히는 마흔 세 살.”

“굉장한 동안이네.”

빈말은 아니었다. 찬찬히 뜯어봐도 그녀는 나와 동갑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상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한데.”

“얼굴도 예뻐.”

“실없는 말은 그만둬.”

주리스가 얼굴을 붉히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괜히 그 반응이 재밌어서 더 놀리고 싶어졌다.

“심지어 몸매도 좋아.”

주리스가 정색했는데 나는 멈추지 않고 한동안 계속 놀렸다.

내 후손이라니까 이상하게 정이 간다.

혈육의 정이란 게 이런 걸까.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왕궁을 나와 시장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주리스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밝아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는데 나는 문득 천외지가 지옥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도 살만한 것 같은데. 꼭 아르카디아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여긴 살만한 곳이 아냐.”

“충분히 평화로워 보이는데.”

“바람 앞의 등불이지. 우리는 커다란 문제를 허공에 두고 있는 것뿐이야.”

“커다란 문제를 허공에 두고 있다고?”

주리스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로워 보이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우리는 시장을 지나서 골목 어귀로 갔다. 골목을 지나치자 막다른 성벽이 보였는데 성벽의 끝에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포탈과 굳건한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포탈 안으로 들어갔고 곧 넓은 돔 경기장을 보게 되었다.

“여긴 뭐야?”

주리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장비가 필요하다고 했지?”

“맞아.”

“장비는 여기서 비싸. 빨간 구슬로는 수준 높은 장비들을 구할 수 없어.”

“그러면?”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되물었다.

“그 대신 마력을 증폭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마력을 증폭시키는 방법?

“내공심법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

“스킬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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