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스킬 같은 게 아니라고?”
내가 그녀를 쳐다봤다. 그때 시녀가 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주리스를 따라 돔 경기장의 관객석을 지나 중앙에 따로 마련된 호화로운 좌석에 앉았다.
꼭 콜로세움을 내려다보는 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시녀가 와서 마실 것을 건네주는데 주리스가 말했다.
“천외지엔 시련의 탑이란 것이 있어.”
“시련의 탑?”
“천외천의 존재들이 만든 탑이야.”
나는 음료를 홀짝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 참 시련이란 단어를 좋아하네.
이름에서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하계차원에 부여하는 일반적인 시련과 마찬가지로 이용자를 성장시키는 시스템일 것이다.
“그럼 시련의 탑을 이용하면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거지? 당장 거기로 가자.”
“얘기를 끝까지 들어. 마력뿐만이 아냐.”
그녀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모든 능력치를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어.”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모든 능력치를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다고?”
“몇 배가 아니라 수십 배를 증폭시킬 수도 있어. 아니, 어쩌면 수백 배, 수천 배도 가능할지 몰라.”
수천 배!
나는 더운 숨결을 훅 내뿜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주리스가 손을 들어 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정해.”
나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탑 안은 이곳 천외지와 시간이 다르게 흘러.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삼십년이든 밖에서의 1분이 탑 안에선 수백 년이야.”
“여기서의 1분이 탑 안에서 수백 년이라고?”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야. 실제로 수백 년이나 탑 안에서 생존한 사람은 없어. 지금까지 가장 길었던 사람이 삼십년 정도야.”
주리스는 목이 타는지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시련은 어려워. 멀쩡하던 사람이 죽어서 나오기도 해. 아니, 대부분이 죽어. 탑 안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야. 원하는 대로 시련을 부여 받아서 성장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해.”
“하지만 그 대신 어마어마하게 강해질 수 있다는 거 아냐?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데?”
“단점도 있어.”
“뭔데?”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탑에는 단 한 번 밖에 들어갈 수 없어.”
“한 번?”
“그래, 한 번. 어떤 사람이든 일평생 딱 한 번만 입장이 가능해. 그래서 처음 난이도를 잘 선택해야해.”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제야 이곳에 있는 아르카디아인들의 전투력이 이해가 됐다.
천외지의 시험장에서 봤던 그들은 전투력이 1천 내외로 지구의 헌터들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 간혹 평균을 넘어서 1천대 후반의 전투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도 시련의 탑을 거친 이들이었군.
내 옆에 앉아 있는 주리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너도 탑에 들어갔다 왔구나.”
“응.”
“그럼 아까 최장기록이 30년이라는 건―.”
“내 기록이야. 그 이상의 기록은 없어. 그것도 마력 능력치만 상승시켰을 뿐이야. 만약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킬 생각이었다면 난 여기 없었겠지. 아마 탑 안에서 죽었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떨렸는데 나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도대체 시련의 난이도가 얼마나 지랄 맞길래?
생각을 정리하며 음료를 홀짝거리는데 내 잔이 비자 시녀가 와서 음료를 더 부어줬다. 쪼르륵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천외천 놈들은 무슨 꿍꿍이인걸까.
“궁금한 게 있어.”
“말해.”
“천외천의 존재들이 왜 여기에 시련의 탑을 만들었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제 3국을 돕기 위한 유니세프 같은 걸까.
간혹 잘 사는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들을 딱하게 여겨서 구원의 손길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천외천의 존재들은 그런 놈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계의 존재들을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개돼지 보듯이 한다. 그래서 궁금했다.
“설마 여기도 하계차원들처럼 시련의 성공 여부로 종족을 멸족시키는 뭔가가 있나?”
“그런 건 아냐.”
“그럼?”
“그들은 하계의 존재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알아.”
주리스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그들이 우리를 왜 살려주는 것 같아?”
나는 음료수 잔을 톡톡 두들겼다. 그러다가 가장 단순한 답안을 꺼냈다.
“어디에 쓸모가 있어서?”
“맞아.”
그녀는 고드름이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눈매로 돔 경기장을 쳐다봤다.
“그들은 우리를 이곳에 적응시켰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
고개를 돌리니 경기장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검투사 복장을 한 전형적인 아르카디아식 용병이었다.
끼이이익!
또 다시 쇠창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돔의 맞은편에서 고릴라 같은 몬스터가 나왔다. 천외지의 시험장에서 봤던 바로 그 몬스터였다.
“평범한 수준의 아르카디아 용병이 저 칼레드를 죽일 수 있을까?”
고릴라 같은 몬스터의 이름이 칼레드였나 보다.
“평범한 수준의 아르카디아 용병이라면 불가능하겠지.”
내가 기억 속의 아르카디아인을 떠올리고 대꾸했다.
“그래서 이곳에 시련의 탑을 만든 거야.”
“너희들을 강하게 만들려고?”
“적응하게 하려고.”
“적응시켜서 뭐에 쓰려고?”
“구슬을 얻으려고.”
“구슬? 구슬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대화를 하는 사이 검투사가 칼레드를 죽였다. 폴짝 뛰어서 검으로 일격을 가했는데 그 일격에 칼레드가 죽었다.
역시 강해졌어.
그때 주리스가 시선을 거둬들이고 물었다.
“너 여기서 구슬이 화폐를 대신한다는 거 알아?”
“그건 천사에게 들었어.”
“천사는 무슨.”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잔을 들이밀었다.
“다 이유가 있어.”
우리는 잔을 치고 음료를 마셨다. 가만 보니 음료에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마실수록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이유?”
내가 입가를 훔치고 물었다.
“궁금해?”
“응.”
나는 뭐든지 스펀지처럼 흡수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가 내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이곳 세계의 신비로움에 대해 한층 더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그들은 구슬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구슬을 필요로 한다고? 누가? 천외천의 존재들이?”
“그래. 전부 내 추측이지만.”
추측이라니.
“그럼 그 추측의 근거는 뭐야?”
“이곳 천외지에 있는 모든 아이템들과 생필품들은 전부 천외천의 존재들이 만든 것들이야. 이상한 건 그런 물품들을 오직 구슬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단 거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래서 구슬이 화폐의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아무리 섭취 시에 경험치를 올려준다지만 그것만으로는 화폐의 기능을 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 물물교환의 대상이 되거나 대중적으로 쓰일 만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천외천의 놈들이 구슬의 가치를 인정하고 신용을 보증해준다면 납득이 간다. 그들이 구슬을 모은다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다.
“구슬에 뭐가 있나?”
나는 그러다가 천사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고 물었다.
“혹시 구슬이 경험치를 올려줘서?”
“그건 아냐. 경험치가 오르고 레벨 업을 하는 것 자체가 천외천에서 만든 시스템이야. 그러니까 당사자인 그들은 레벨 같은 것에 구속 될 필요가 전혀 없지.”
“그럼 어째서 구슬을 필요로 하는 거지?”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그들이 구슬을 모으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해. 아르카디아도 초록색 구슬에 팔렸거든.”
그녀는 지나가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는데 나는 눈이 커졌다.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아르카디아가 구슬에 팔렸다고?”
“응. 몇 개에 팔렸는지는 잘 몰라. 하지만 초록색 구슬에 팔렸다고 들었어.”
차원 하나가 초록색 구슬에 팔렸다니!
내가 놀라고 있는데 주리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서 강렬한 마력이 뿜어져 나와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부탁이 있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들이밀었다. 입술에서 달콤한 분 냄새가 맡아져서 기분이 오묘했다.
“뭔데?”
“너 시련의 탑을 이용하고 싶지?”
나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주리스는 뜨거운 숨결을 훅 내뿜고 말했다.
“수인 족들이 시련의 탑을 독점하고 있어.”
“수인 족?”
“원래 이 땅에 살던 종족들이야. 우리가 시련의 탑을 이용하기 위해선 그들에게 입장권 명목으로 빨간색 구슬을 수백 개씩 바쳐야했어.”
“그럼 빨간색 구슬을 수백 개 구한 다음 이용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정보를 종합해서 물었다.
주리스가 손사래를 쳤다.
“얘기를 끝까지 들어.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그들이 폭리를 취하기 시작했어. 빨간색 구슬 대신 노란색 구슬을 달라는 거야.”
“노란색 구슬?”
“빨간색 구슬을 백 개 모으면 주황색 구슬 한 개로 바꿀 수 있어. 마찬가지로 주황색 구슬을 백 개 모으면 다시 노란색 구슬 하나로 바꿀 수 있어. 그러니까 입장료가 수백 배나 비싸진 셈이지.”
“이용하지 말라는 거네?”
“그래, 맞아.”
주리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구슬은 색깔 별로 가치가 다르구나.
나는 순간 강한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원석도 구슬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색깔은 흰색이었던가.
“그래서 곤란해. 전쟁을 일으키기엔 잃는 게 너무 많고 빨간색 구슬로 노란색 구슬을 만드려니 답이 없어. 특히 수인 족 뒤에 있는 드래곤들이 문제야.”
“드래곤?”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드래곤이라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드래곤도 있나?”
“응.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우리가 똘똘 뭉친 것처럼 천외지의 원주민인 그들끼리도 똘똘 뭉쳤어. 내가 아무리 강해도 수인 족들의 뒤에 드래곤들이 있으니 섣불리 나설 수 없어. 나는 여왕이자 천외지의 관리장이니까. 괜히 내가 나서서 들켰다간 천외천에서 시비를 걸어 올 거야.”
권력에 책임이 뒤따라온다더니, 어중간한 권력이 문제다.
나는 빈 찻잔을 만지며 고민했다.
“그럼 나보고 드래곤들을 처리해달라는 거냐?”
“맞아. 드래곤들을 박살내줘.”
“몇 마리인데?”
“세 마리.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늙은 놈 하나만 처리해도 나머지 두 놈은 겁에 질릴 거야.”
그녀의 얼굴표정이 세뱃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조마조마해졌다. 내 비위를 맞추며 긴 서두를 깐 것도 이걸 부탁하기 위함이었나.
“좋아. 박살내주지.”
나는 쉽게 승낙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련의 탑이란 것에 호기심도 있었다.
“그런데 그냥 몰래 탑에 입장하면 안 되나?”
얘기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내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드래곤을 처리하기 전 탑을 먼저 이용해서 강해지면 더 수월할 것이다.
“우리는 탑을 개방하는 방법을 몰라. 수인 족들의 허락 없이는 힘들어.”
“그렇군.”
역시 문제가 있었나.
다음 날 나는 주리스가 소개한 안내원과 함께 길을 떠났다. 안내원은 특별히 고용된 토끼 귀를 가진 수인 족이었는데 수인 족들의 왕궁은 폐쇄성이 짙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중천에 걸릴 때 쯤 수인 족들의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