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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74화 (74/127)

# 74

수인 족들의 성은 성벽도 컸지만 건물도 웅장하고 화려했다. 다양한 족속들이 모여 산다고 들었는데 교회와 절을 한 곳에 모은 것처럼 꼭 건축물 크기로 서로 경쟁하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곳과 별반 다를 게 없구나.”

그럼에도 아르카디아인들이 사는 곳과 비슷했다. 마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외국에 온 것 같았다.

도시로 막 상경한 촌뜨기처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안내원이 내 소매를 당겼다.

“인간. 잠깐 멈춰서봐.”

그녀는 알라샤라는 이름의 토끼 수인 족이었는데 키가 내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몸집과 달리 겁이 없고 굉장히 활발한 성격이었다.

“왜?”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알라샤의 토끼 귀가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섰다.

“무슨 할 말?”

“수인 족들은 힘을 중요시 해.”

“그래서?”

“보통의 인간은 수인 족보다 약해. 그래서 무시당하기 쉬워. 여기서 어깨와 목을 세우고 돌아다니면 곤란한 일을 자주 겪게 될 거야.”

그녀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고 말했다.

시장 통 같은 작은 골목길 사이로 다양한 수인 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뱀이나, 돼지, 사자나 호랑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곰이 인간화한 웅인 족까지 있었다.

정보 분석기를 사용해서 전투력을 확인해보니 그들은 평균적인 아르카디아인들보다는 강했지만 내가 신경 쓸 정도의 전투력은 아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조심하라는 거야?”

“응. 네가 강하다고는 들었어. 하지만 함부로 나대다간 큰일 날지도 몰라.”

그녀는 드래곤의 레어 근처까지 여정을 안내하기로 했다. 드래곤을 설득하는 여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설득이 아니라 협박하러 간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전투력을 알면 까무러칠 텐데.

“네가 생각하는 큰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야. 일어나도 나한테는 작은 일이 분명하고.”

“절대라는 건 없어. 항상 조심해야해. 눈에 띄면 우리만 손해니까 일단 후드부터 눌러써.”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는데 토끼처럼 앞니 두 개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 귀여웠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로브의 후드를 눌러 썼다.

“좋아. 되도록 인간이라는 걸 들키면 안 돼.”

“들키면?”

“견인 족이나 묘인 족은 인간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수인 족도 많아. 상대가 똑똑한 수인 족이면 얌전하게 시비를 걸어올 거고, 멍청한 수인 족이면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올 거야.”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시비를 걸어온다는 거네.”

“대부분의 수인 족이 착하고 괜찮은데 일부가 문제야.”

그 놈의 일부 타령. 지구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일부가 아니라 대다수겠지.”

“몰라. 일단 배고파. 밥부터 먹으러 가자.”

열심히 걸었더니 배가 고픈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이끌어 단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지났기에 식당 안은 손님이 적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북적거렸다. 알라샤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는데 돼지 수인 족인 돈인 족들이 하루 열 끼니를 넘게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시 돼지는 돼지네.

우리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곧 켄타우로스 소녀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점심 식사로 빵과 스프, 그리고 돼지구이를 주문했는데 주문을 받은 켄타우로스 소녀가 몸을 돌릴 때 나는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다른 수인 족들과 달리 켄타우로스는 온전한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의 하반신과 인간의 상반신을 가졌기에 켄타우로스 소녀는 확실히 관심을 끌만했다.

아르카디아에서도 켄타우로스는 보지 못 했는데.

“너 시선이 더러워.”

그때 알라샤가 테이블 밑으로 내 정강이를 발로 툭 건드렸다.

“내 시선이 뭐가 어때서.”

“너 혹시 특이 취향이야?”

“특이 취향?”

“말박이냐고.”

“말박이가 뭐야?”

내가 물었는데 알라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꼴이 얄미워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 했는데 문득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참았다.

조심하자. 아직 힘 조절이 잘 안 돼.

그녀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며 앞으로의 여정을 설명했다.

“여기 수인 족의 왕궁에서 포탈을 한 번 더 타야해.”

“그러면 끝이야?”

우리는 여정을 단축하기 위해 지금까지 포탈을 계속 타고 왔다. 포탈이 없었다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을 것이다.

“아니. 그러면 남쪽에 있는 엘프들의 땅에 도착하는데 거기를 지나서 또 다시 걸어야해.”

“엘프들을 지나쳐서?”

“응.”

“걔네들 엄청 폐쇄적이잖아.”

나는 아르카디아에서 겪었던 엘프들을 떠올리고 말했다. 그쪽의 엘프들은 타 종족을 시기하고 배척하기 바빴다. 이곳의 엘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수인 족에겐 친절해. 인간이 문제지.”

“인간이 왜.”

나는 목을 세우고 항변했다.

“만만하잖아.”

“만만하다고?”

“수많은 종족 중에 인간이 제일 약해. 천외지에서 약한 건 죄야.”

뜻밖의 말이었다.

여기의 인간들은 엄청 약세구나.

“관리장은 인간이잖아?”

주리스를 떠올리고 물었다.

“관리장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 게다가 그녀를 제외한 인간들은 약한 편인 걸. 그녀도 자기네들의 혜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리장을 맡고 있는 거야.”

나는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엘프들이 수인 족들에겐 왜 친절해? 수인 족이 강해서?”

“아니. 엘프들이 더 강해.”

“그럼 뭐야? 수인 족들이 땅의 본래 주인이라서 그런 거냐?”

“뒤에 드래곤이 있어서 그래. 엘프들도 드래곤보단 약하거든.”

알라샤의 완벽한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여긴 힘이 전부인 세상이구나.

나는 지도로 시선을 돌리고 여정에 대해서 물었다.

“혹시 드래곤이 사는 곳으로 포탈을 타고 직접 갈 수는 없나?”

“드래곤의 집 근처에 포탈을 지을 멍청이는 없어.”

“수인 족과 드래곤은 친하다며.”

“일방적인 관계야. 수인 족들은 드래곤을 왕이나 신처럼 섬겨. 난 아니지만.”

결국 걸어가거나 날아가야 하는군.

아쉬워하고 있는데 켄타우로스 소녀가 주문했던 음식들을 들고 나왔다.

완두콩이 들어간 야채 스프와 굵고 기다란 바게트 빵, 그리고 다이아몬드 칼집을 낸 돼지고기 구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빵과 스프를 다 먹고 뒤늦게 돼지고기를 먹는데 나는 문득 돈인 족의 존재가 떠올랐다.

가만 보니 이거 돼지고기잖아.

식당에 돈인 족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을까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티 나지 않게 살짝 그들을 관찰하자 나와 같은 음식을 시켜서 돼지고기를 먹고 있는 돈인 족이 보였다.

돈인 족도 돼지고기를 먹는 구나.

어쩐지 김이 팍 샜다.

“킁!”

그 순간 돼지고기를 먹는 돈인 족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시선이 따끔따끔 느껴졌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눈빛 한 번 매섭네.

나는 시선을 거둬들이고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계산대가 있는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소리의 근원지를 살피니 켄타우로스 소녀와 돈인 족 하나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지갑을 안 들고 왔다, 킁. 외상 좀 부탁한다.”

“안 돼요. 절대 안 돼! 벌써 빨구 70개치나 먹었잖아요!”

빨구는 빨간 구슬의 준말이었다.

우리가 먹은 식사가 빨구 7개의 값어치라고 할 때 70개치면 우리보다 10배나 더 먹은 셈이다.

과연 돼지 수인답네.

“빨리 계산하고 나가자.”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알라샤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주리스에게 받은 경비를 꺼내 계산을 했고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배도 든든히 채워서 이제 포탈을 이용하기 위해 다시 걷는데 골목길을 지났을 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뭐야?”

돈인 족 몇 마리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뜯어보니 아까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이 대장격으로 있었는데 덩치가 다른 놈들보다 1.2배 정도 컸다.

“밥을 굉장히 빨리 먹네.”

놈은 배꼽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동탁의 배꼽이야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배꼽에 심지를 꽂고 불을 붙이면 반년은 족히 탈 것 같았다.

“너희 둘만 다니는 거냐?”

그가 물었다.

“우리?”

내가 확인 차 손가락으로 알라샤와 나를 가리켰다.

“그래. 여기 너희 둘밖에 없다.”

그는 뒤뚱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쿵! 쾅! 쿵! 쾅!

걸을 때마다 바닥이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땅이 무너져 싱크 홀이 생기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됐다.

“용건이 뭐야?”

“우리와 함께 가자.”

“어디를?”

“우리는 용병이다. 너희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줄 수 있다.”

돈이라도 뜯으려는 줄 알았는데 생긴 것 답지 않게 신사적인 놈이었다.

“괜찮아. 호의는 고맙지만 필요 없어.”

손사래를 치고 피하려는데 갑자기 주변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돈인 족들이 앞길을 막고 놈이 선두에 나섰다.

“아까 식당에서 드래곤 어쩌고 하는 걸 들었다.”

뉘앙스가 묘했다. 그 말에 알라샤의 귀가 뾰족하게 섰다. 마치 위험을 감지한 고슴도치 같았다.

“그래서?”

“외부인이 드래곤님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특히 거기 토끼 귀. 토인 족 주제에 드래곤님을 욕하다니. 굉장히 화가 난다.”

표정과 달리 화가 난 어조는 아니었다. 다분히 억지스러웠다.

“네가 화났는데 어쩌라고?”

“아까 봤다. 너희들은 구슬이 많다. 들고 있는 구슬을 우리에게 주면 봐줄 수 있다.”

그게 본래 용건이었나.

결국 돈을 뜯고 싶다는 거였다.

“돈인 족들은 감정 조절이 잘 되나보네.”

내가 이죽거리자 놈이 눈을 부라렸다.

“토인 족들은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한다. 약한 주제에 겁을 상실했다.”

놈은 콧김을 씩씩 뿜었는데 어찌나 뜨거운지 몇 걸음 떨어져 있음에도 더운 열기가 훅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하기 싫어서 놈을 향해 돌멩이를 찼다.

후두둑!

내 힘을 버티지 못 하고 돌멩이가 가루가 됐다.

이크, 힘 조절.

“뭐 하는 거냐?”

그게 놈의 신경을 거슬린 듯했다. 놈은 가루가 된 돌멩이는 보지 못 하고 땅을 박찬 내 행동에만 관심을 가졌다.

“난 토인 족이 아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네가 구슬이 많다는 것만 중요하다.”

“구슬을 줄 생각도 없어.”

“그럼 줄 마음이 생기게 만들어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데없이 놈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내게 쇄도했다. 나는 가볍게 피하고 그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

뻐걱!

뼈 부서지는 소리가 골목구석까지 울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 주먹은 놈의 두개골까지 건드렸는데 정수리를 뚫고 나가 하늘 방향을 향해 뻗어 있었다. 놈은 한 방에 절명해서 축 늘어졌다.

“꾸, 꾸이이익! 대장이 죽었다!”

“꾸이익!”

지켜보던 남은 돈인 족들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놈들에게 다가갔다. 알라샤도 토인 족을 욕하는 것에 화가 났는지 나를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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