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울음소리는 진짜 돼지 같네.”
내가 대치하자 놈들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놈들은 그 대신 허리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커다란 대검이 햇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뭐야? 도망 안 가?”
“전사는 도망가지 않는다.”
두 번째로 덩치가 큰 놈이 소리쳤다. 놀라서 자빠진 것치고는 설득력 없는 말인데 놈은 꽤나 당당했다.
스윽!
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놈이 대검을 휘둘렀다. 검이 무척 커서 휘두르는 속도가 느릴 줄 알았는데 빨랐다. 내게는 대검이지만 덩치가 큰 그들에겐 장검인 것이다.
부숴서 놀라게 해줄까? 피해서 놀라게 해줄까?
생각은 길었지만 판단은 빨랐다. 나는 상체를 숙이는 것으로 공격을 가뿐히 피했다. 놈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랐는데 나는 틈을 주지 않았다. 멍청하게 서 있는 놈의 명치를 발로 찼다.
뻐억!
살짝 쳤는데 가슴뼈가 완전히 함몰됐다. 박힌 발을 뽑아내자 피와 함께 붉은 뼈가 후두둑 떨어졌다.
“역시 아까 놈보다 약하네.”
발에 묻은 피를 털고 얼굴을 확인하니 파랗게 질린 채 죽어 있었다. 남은 놈들이 공포에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 세 놈밖에 남지 않았다.
“꾸이이익! 강하다.”
“강한 토인 족이다!”
“인간이라니까.”
나는 툴툴거리고 발목을 돌렸다. 이상하리만치 감흥이 없었다. 사람을 죽일 때는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는데 왜 이놈들을 죽이는 건 기분이 나쁘지 않지.
“어!”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놈들을 같은 지성체로 보고 있지 않구나.
돈인 족의 외형은 사람의 몸에 돼지의 머리를 얹은 듯 기괴했다. 심지어 손가락도 족발과 비슷하게 생긴데다 머리에는 머리카락도 없다. 때문에 같은 지성체인 건 알지만 나는 이들을 돼지와 동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놈들도 나를 원숭이 비슷하게 보고 있을까.”
나는 중얼거리고 앞으로 나가 붕권으로 오른쪽 놈을, 강권으로 왼쪽 놈을 후려쳤다. 놈들이 피하려고 뒤뚱거렸는데 내 주먹이 더 빨랐다.
퍽! 뻐억!
강렬한 타격음이 울리고 거대한 체구들이 쓰러졌다. 덩치가 크고 지방질이 많으니 타격감이 좋다. 후려칠 때마다 느낀 건데 품질 좋은 샌드백을 치는 기분이다.
“꾸이이익! 분대장과 부분대장이 죽었다!”
하나 남은 돈인 족이 꽥 소리를 질렀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으니 꼭 고사를 지낼 때 쓰는 돼지머리 같았다.
분대장과 부분대장은 또 뭐야?
나는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이놈들도 군대처럼 계급체계가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놈이 말했다.
“인간!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지?”
“내가 강한 게 아니라 니들이 약한 거야.”
“말도 안 돼! 인간 주제에!”
“그보다 여기 죽은 너희 친구들 말고 다른 동료들이 더 있나?”
물었는데 놈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에효,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나는 손을 털고 마지막 놈을 향해 탄지공을 발사했다. 빛의 줄기가 날아가 정수리를 꿰뚫었다.
푹!
놈은 단말마 비명도 없이 절명했다.
“험험.”
나는 피로 물든 골목길을 보고 헛기침을 뱉었다. 전투가 소강되자 비로소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시체를 치워야 하나? 여기에도 경찰 같은 게 있을까?
물론 법 같은 걸 지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거슬린다. 되도록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미끄러지듯 일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초장부터 문제가 생겼다.
“우악!”
그때 알라샤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내 초월적인 감각을 의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매복이 있었던가.
“인간 주제에 엄청 강하잖아!”
알라샤가 갑자기 손뼉을 짝 치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때문에 놀란 거였나. 나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도 그저 놀라서 벙찐 탓인 듯했다.
공중제비를 도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문득 휴지가 생각났다.
“그놈의 인간 타령 좀 그만해.”
“우와우와···!”
알라샤는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아공간에서 1.5L 생수를 꺼내 몸에 묻은 돈인 족의 피를 씻었다.
이것도 휴지가 있었으면 정령을 소환해 간단히 해결했을 텐데.
있다가 없으니까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굉장해! 돈인 족은 꽤 강한 편인데! 쉽게 죽였어!”
알라샤가 계속해서 탄복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내가 전투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몬스터와의 조우를 피해 포탈로 안전하게 온 탓이다.
나는 돈인 족을 가리키고 물었다.
“얘네들이 강하다고?”
“수인 족 중에서 호인 족이나 웅인 족 다음으로 강해.”
“돼지인간이?”
“덩치가 있잖아.”
놈들의 시체를 쳐다보니 납득이 갔다. 돈인 족들은 덩치가 컸다. 체급으로 판단해 보건데 인간이 라이트급이면 돈인 족들은 슈퍼헤비급으로 판단됐다.
어쨌든 수인 족도 별거 아니네.
실망하면서 몸에 뿌리던 생수를 입가로 들이 대는데 내 시선에 뭔가 걸렸다. 놈들 중 작은 놈이 메고 있던 가죽가방이었다.
“얘네들 강하다고 했지?”
“응.”
“그럼 얘네들이 입고 있는 장비들도 비쌀까?”
“글쎄.”
나는 생수를 꿀꺽 삼키고 시체에 다가가 보았다. 인간의 시체였으면 거부감이 컸을 텐데 수인 족이라서 거부감이 없었다.
가방을 들어보니 뭐가 많이 들었는지 묵직했다. 가방의 묶인 줄을 풀고 안을 살펴보자 주황색 구슬이 보였다.
“구슬?”
그것도 수가 꽤 많았다.
“뭐야? 안에 뭐가 있는데?”
알라사갸 관심을 보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가방안의 주황색 구슬을 보고 놀라서 두 눈을 치켜떴다.
“우와! 주황색 구슬이 엄청 많잖아!”
“주황색 구슬이 비쌌던가?”
“주황색 구슬 하나가 빨간색 구슬 100개의 가치야.”
그렇게 말해줘도 확 체감이 되지 않았다. 적당한 식사 한 끼가 빨간 구슬 3, 4개 정도였으니 주황색 구슬 하나가 식사 30끼니 정도의 가치인가.
눈대중으로 보면 주황색 구슬이 족히 마흔 개는 넘어보였다.
1200끼니 값이네.
“이 녀석들 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를 노린 거지?”
“글쎄.”
나는 내친 김에 놈들의 시체도 뒤져봤다. 부하들의 시체는 별 게 없었다.
그런데 대장의 시체를 살펴보니 허리춤의 주머니가 볼록했다. 나는 주머니를 낚아채고 손바닥 위에 탈탈 털었다.
데구르르.
주황색 구슬 와 이상한 마패 같은 게 나왔다. 꼭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생긴 동그란 패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은색으로 반짝인다는 것과 말 대신 돼지 세 마리 그려져 있다는 거다.
말 대신 돼지가 그려져 있으니 이건 돈패인 건가.
“이게 뭐지?”
나는 주황색 구슬을 품에 챙기고 돈패를 흔들었다.
“어!”
알라샤가 놀라서 소리쳤다.
“왜?”
“이 녀석들 용병이 아니었어!”
“용병이 아니었다니?”
“그거 군인 표시야!”
“군인 표시?”
“군인의 계급장 같은 거야.”
나는 돈패와 알라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일이 귀찮아진다는 것을 느꼈다.
“군인이 왜 엄한 사람 돈을 뺏어?”
“수인 족은 힘을 중요시해. 선군정치를 우선시하고 있어.”
“선군정치? 그게 엄한 사람 돈 뺏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군인들이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자주 부린다고 들었어.”
나는 문득 멸망해서 사라진 지구의 북한이 생각났다. 북한의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자주 괴롭혔다. 극심한 기아에 민간인을 위협하고 식량을 약탈해가기 일쑤였다.
여기도 비슷한 건가. 하지만 기아와는 거리가 먼데.
“얼른 도망쳐야 해.”
알라샤가 심각해져서 말했다.
“들키면 큰일 날 거야. 단순한 수인 족을 죽이는 건 괜찮아. 하지만 군인은 아냐.”
“왜?”
“군인을 죽이면 우르르 몰려와. 게다가 그거 패에 새겨진 돼지가 세 마리나 있잖아.”
알라샤가 돈패를 가리키고 말했다.
“돈인 족 중에서 계급이 꽤 높은 사람이야.”
“이놈이?”
내가 시체를 발로 툭툭 찼다.
남의 삥을 뜯으려는 놈이 높은 계급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호랑이가 그려진 게 가장 높고 그 다음이 곰이야. 그리고 마지막이 돼지 그림이고.”
“그럼 세 번째 아냐?”
“보통의 사병은 패 자체가 없어. 장교나 부사관 계급부터 있지.”
“그럼 얘가 최소한 간부급이라는 거네.”
“어쨌든 이럴 게 아냐. 포탈부터 빨리 타자. 되도록 수인 족의 영역에서 빨리 벗어나야해.”
알라샤가 내 소매를 잡고 이끌었다.
“급할 필요가 있나?”
내가 물었다.
“응.”
“왜?”
“네가 아무리 강해도 군인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야.”
“귀찮긴 하겠다만 역부족은 아닐 텐데.”
“글쎄.”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볼일 좀 보고 가자.”
“볼일?”
알라샤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상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주황색 구슬이 많으니 적당한 아이템을 구매 할 수 있을 듯했다.
* * *
수인 족의 왕궁에는 토인 족을 제외한 수인 족들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원탁을 사이에 두고 회의를 진행 중에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바칠 구슬의 양은 충분한가?”
호인 족 대표가 물었다.
“이번 분기 수량은 거의 다 모았어. 이제 돈인 족 쪽에서만 내면 돼.”
웅인 족 대표가 말했다.
“매 분기 때마다 전쟁이야. 망할 드래곤들.”
돈인 족 대표가 끼어들자 다른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매 분기 때마다 드래곤에게 구슬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드래곤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보호세인 것이다.
천외지의 원주민인 그들이 규합을 했다지만 동일한 위치를 누릴 순 없었다. 드래곤은 괴팍하고 고고하며 자존심이 높았다.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수인 족들은 살기 위해 구슬을 바치고 드래곤 밑으로 몰려갔다. 그것은 고육지책이었지만 효과가 좋았고 드래곤 덕에 그들은 안정적인 터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두터운 성벽을 비롯해 천외지의 각 부족들에 설치된 포탈도 모두 드래곤의 힘이었다.
“돈인 족 쪽에선 아직 멀었는가?”
호인 족 대표가 물었다.
“으음···. 영 연락이 없군.”
돈인 족 대표가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 했다. 이제 돈인 족이 모은 구슬만 오면 이번 분기의 보호세는 모두 모인다.
“덩치가 크니 행동도 굼뜬 것 같군.”
호인 족 대표가 비난했지만 돈인 족 대표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늦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저번 분기때 돈인 족 파견단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보호세로 낼 구슬까지 손댔었다.
그때는 정말 곤란했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러지는 않겠지?
돈인 족 대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불안해졌다. 회의장에 있는 시계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따라서 두근거렸다.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초조해져서 족발 하나를 물어뜯었다. 굳은 살점을 뜯어먹으니 씹는 맛이 좋았다. 애타게 회의장의 출입구를 쳐다보는데 돈인 족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왔구나!”
돈인 족 대표는 기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돈인 족이 다가올수록 뭔가 이상했다. 추리고 추려서 뽑은 대장 놈이 아닌 말단 병사 놈이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돼지새끼는 어디가고 왜 네가 있는 거냐?”
설마 또 밥 먹는데 보호세를 쓴 것은 아니겠지.
불안해져서 묻는데 병사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죽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누가 죽었단 거냐?”
“간부급이 모두 죽었습니다.”
돈인 족 대표가 황당해서 멀거니 섰다.
“혹시 또 보호세를 쓰고 도망간 거냐?”
정말 믿을 수 있는 놈을 시켰기에 배신감이 더 컸다.
“시체까지 있습니다.”
“시체?”
그제야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다. 돈인 족 대표가 사태를 파악하고 나서는데 다른 수인 족들도 팔을 뻗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