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나는 알라샤를 데리고 상가지구를 거닐었다. 자금은 충분했다. 마력과 관련된 장비들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는데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다.
의류점과 대장간을 들르고 귀금속점에 이르러서야 마력장비를 찾을 수 있었다.
지구의 아이템보다 효율이 좋아서 마력을 무려 10퍼센트나 올려주는 팔찌였다.
가격이 주황색 구슬 세 개 값이라 알라샤가 입을 떡 벌렸는데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너 돈 씀씀이가 헤퍼.”
“어차피 내 돈도 아니잖아.”
“그럼 나도 구슬 한 개만 주면 안 돼?”
알라샤가 간절히 물어왔다.
한 개쯤이야.
“받아.”
“오예!”
주황색 구슬 하나를 건네주자 그녀가 아이처럼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렇게 좋은가.
알라샤가 웬 목걸이를 구매하고 우리는 귀금속점을 나왔다. 가게 앞에서 휴지를 소환하는데 또 마력이 부족하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뭐야, 또 소환이 안 되네. 도대체 마나가 얼마나 필요한 거야.”
“무슨 말이야? 소환?”
“그런 게 있어.”
우리는 다시 방향을 틀어 포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포탈지구는 상가를 벗어나 왕궁본관의 뒤편에 있었다.
상가를 지나고 모퉁이를 몇 번 돌자 사원 같은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여러 개의 포탈이 있었는데 꼭 버스 터미널을 보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고 줄의 끝에는 제복을 입은 수인들이 여행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 군인들이야.”
알라샤가 소곤거렸다.
“군인? 쟤네들이?”
“군복을 입었잖아.”
그러고 보니 웬 초록색 제복을 걸치고 있다.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군인들이 왜 여기 있을까? 내가 군인들을 죽여서 복수하러 찾아왔나?”
“확실한 건 몰라. 하지만 그런 것 같아.”
이거 일이 커졌군.
현실을 부정하면서 내가 다시 물었다.
“혹시 소지품 검사는 원래 하는 거 아냐?”
“보통은 군인들이 저렇게 많지 않아.”
알라샤가 손가락을 들어 포탈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방향을 살피니 군복을 입은 수인들이 각 포탈마다 위치해 있었다. 수도 많았는데 족히 수십은 돼 보였다.
“그리고 소지품 검사도 안 해.”
그녀는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이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 보니 되게 깐깐하게 검사를 하네.”
군인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여행객들의 소지품을 집중해서 검사하고 있었다. 견인 족 수인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고 가방을 뒤지는데 마약검사를 하는 경찰견의 실루엣이 언뜻 엿보였다.
개 같네, 진짜.
“어떡하지?”
알라샤가 손톱을 깨물고 안절부절 했다.
“되돌아갈까?”
내가 물었다.
“지금 도망가면 의심을 살지도 몰라.”
몸을 돌려보니 과연 출입구 쪽에도 군인들이 많았다. 군인들은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닌 듯했다.
“주황색 구슬을 보면 네가 죽인 걸 알거야.”
“그러게. 돈패도 들고 있는데.”
내 말에 알라샤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불장난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커다란 귀가 축 늘어지니 더 귀엽네.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알라샤가 두 눈을 치켜뜨고 경기를 일으켰다.
“무슨 짓이야.”
귀도 쫑긋 서네.
“우리가 들어가야 할 포탈이 저 중에 어느 거야?”
“저 쪽에 있는 포탈이야.”
알라샤가 가리킨 곳은 가장 멀리 있는 포탈이었는데 지키는 군인들도 뭔가 특별해보였다. 전원이 호인 족들이었고 입고 있는 제복들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고급스러웠다.
엘프들과 이어져 있는 포탈이라 그런가.
그래도 별 걱정은 안 됐다.
“꽉 잡아.”
나는 그녀를 허리에 감싸 쥐고 천마비행술로 포탈을 향해 날았다. 상대하기도 귀찮고 괜한 살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어, 어어!”
“뭐야! 저거 잡아!”
“거기 서라!”
곳곳에서 불호령 같은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봐야 늦었어.
우리는 바리게이트를 지나 포탈 안에 들어왔고 새로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울창한 수풀지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까와 같은 사원건물이 나왔다.
“여기 맞아?”
“응.”
이거 생각해보니 양방통행이었군.
포탈의 건너편에도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빽빽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고 건물에 창문도 하나 없어서 출구는 멀리 떨어진 문 하나가 유일했다.
이쪽 방면의 포탈은 인기가 없었는지 여행객이 우리뿐이었는데 그 탓에 더 집중이 됐다.
“국방 인력을 엄한 곳에 쓰네.”
툴툴거리고 도주로를 확인하는데 군인들 대 여섯이 포탈을 타고 나를 따라왔다. 놈들은 내 생각보다 반응이 더 빨랐다.
“그 새끼 잡아!”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앞에 있는 군인들이 칼과 창을 겨눴다.
우리는 순식간에 샌드위치처럼 앞뒤가 가로 막혔다. 뜯어보니 앞에 있는 놈들도 전부 호인 족들이었는데 문득 호인 족이 수인 족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정보 분석기로 전투력을 확인해보니 평균 2500정도로 다른 수인 족들보다 200에서 300정도 더 높았다.
“망했어.”
알라샤가 내 허리에 몸을 밀착한 채 귀를 늘어뜨렸다.
“아직 안 망했어.”
나는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꽉 움켜쥐고 몸을 움직였다. 돈인 족들과 달리 호인 족들은 죽일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데 외형이 사람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문신 같은 검은 무늬와 긴 꼬리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나는 탄지공을 날려 군인들의 무기를 부수고 경계를 돌파했다. 그들은 탄지공의 위력에 한 번 놀라고 번개 같은 내 속도에 또 다시 놀랐다.
“너 정체가 뭐야!”
신경질적인 외침이 고막을 찔렀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어!”
그런데 그 순간 출구 쪽에서 다른 군인들이 몰려왔다. 군인을 우선시한다더니 개나 소나 군인인가보다. 견인 족과 우인 족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몇몇은 활을 들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화살을 쏘기도 했다.
자기네 동료들도 화살에 맞을 텐데?
화살세례를 피하면서 주변을 살펴보자 수인들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잠자코 화살을 쳐내면서 뜯어보니 화살이 나한테만 따라오고 있었다.
유도화살이잖아!
나는 탄지공으로 놈들을 날려버리고 이동을 멈췄다. 그리고 벽을 부수는 쪽으로 계획을 틀었다.
쾅!
일격에 벽이 부서지고 도주로가 확보됐다. 나는 단숨에 부서진 벽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오니 짜증났다. 건물 난관에 붙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탁 트인 평야지대가 보였다. 지평선 너머로 철조망과 초소들이 많았는데 사원 밖에도 군인들이 몰려 있었다.
“개떼 같네.”
나는 천마비행술을 사용해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고도를 높이니 화살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못 했다.
“얘네들 하늘을 못 나는 구나.”
안심하고 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색 화살이 날아왔다. 손을 움직여 낚아채니 화살이 아니라 커다란 깃털이었다.
“깃털?”
그때 수인 족 하나가 하늘을 날아서 다가왔다. 흑인처럼 피부가 새까맸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영복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네가 돈인 족을 습격한 놈이구나!”
그녀가 일갈했다.
“너는 누군데?”
내가 물었는데 대답 대신 깃털이 날아왔다. 뾰족한 깃털을 피하자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 피한 게 기우가 아니었구나!”
나는 탄지공을 날렸고 그녀는 깃털로 대응했다.
파직!
허공에서 탄지공과 깃털이 맞부딪혔다. 하지만 내 탄지공이 더 강해서 그녀의 깃털을 먹어치웠다. 그녀는 깃털로 몇 번 더 대응하다가 결국 몸을 틀어 탄지공을 피했다.
“단순한 마력탄에 어떻게 이런 위력이!”
그녀는 놀라면서도 검은 깃털을 연속해서 뿌렸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깃털을 가뿐히 피하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몸이 터질 줄 알았는데 그녀는 멀쩡했다. 대신 뒤로 밀려나면서 검은 피를 토했다.
강한 녀석이구나.
그녀는 피를 닦고 나를 노려봤다. 그제야 대화가 물꼬를 트고 질문이 날아왔다.
“너 정체가 뭐야? 엘프냐?”
“엘프?”
나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 바로 엘프가 튀어나오는 건 그만큼 수인 족과 엘프 족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가.
“이곳에서 하늘을 날 정도면 평범한 엘프는 아닐 텐데···.”
그녀는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대답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는 듯했다. 나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떡 벌리고 놀랐다.
“인간! 인간이잖아!”
“그럼 너는 뭐야? 누군데 그렇게 새까매?”
“까마귀 수인 족의 대표 유선이다.”
그녀가 가슴을 탕 치고 호탕하게 소리쳤다. 수영복 같은 갑옷 아래에서 젖가슴이 크게 흔들거렸는데 시각적으로 몹시 보기 좋았다. 내가 가슴에 팔려 멍하게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 어째서 우리 일에 훼방을 놓는 거지?”
“내가 훼방을 놓는다고?”
“돈인 족들을 죽이고 구슬을 빼앗았잖아.”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건 오해야.”
“오해?”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
내 항변에 유선이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끼었다.
“그래서 돈인 족 군인들을 모두 죽이고 구슬을 빼앗았다고?”
“놈들도 내 목숨을 노리고 구슬을 빼앗으려 했으니 인과응보지.”
내가 당당하게 나오자 그녀는 팔짱을 풀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좋아. 그럼 구슬을 돌려줘. 그럼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봐줄게.”
“싫어.”
“왜?”
“너 같으면 기껏 얻은 걸 순순히 돌려주겠니?”
내 말에 그녀는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줄 것 같아. 그 구슬들이 없으면 큰일 나거든.”
“무슨 큰일?”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드래곤들이 화를 낼 거야.”
“드래곤? 그게 큰일인가? 별로 큰일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도발하며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더 이상 정보를 줄 생각이 없는지 말을 아꼈다. 그리고 다른 말을 꺼냈다.
“나를 포함한 수인 족 4천왕들이 너를 찾고 있어. 지금이라도 구슬을 건네주면 살려는 줄게.”
“구슬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해.”
나는 역한 냄새가 나는 동그란 덩어리에 이들이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꾹 참고 주황색 구슬을 하나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경험치가 너무 적게 올라서 실망한 참이었다.
“구슬을 건네주면 너흰 뭘 줄 건데?”
내가 한발 양보해서 물었다.
“살려줄게.”
“그건 협상의 여지가 될 수 없어. 난 너희들보다 강하니까.”
나는 위압감을 심어주기 위해 손으로 총을 만들고 탕! 하고 외쳤다. 그녀의 어깨가 파도처럼 크게 들썩거리다가 제 위치를 찾았다.
“원하는 게 있나?”
그녀가 물었다.
“나는 시련의 탑을 이용하고 싶어.”
“시련의 탑?”
“그래.”
내 요구에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시련의 탑을 이용하기 위해선 노란색 구슬이 필요해.”
“주황색 구슬로는 안 되나? 에누리해주면 되잖아.”
내가 뻔뻔하게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뒤 닦고 버려진 휴지처럼 구겨졌다.
“시련의 탑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아. 그래서 에누리해줄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너 여기 세계의 인간이 아니구나. 정보에 상당히 어두운 걸보니. 우리는 단순히 시키는 걸 하는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