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77화 (77/127)

# 77

“시키는 걸 하는 것뿐이라고?”

“그래.”

“누가 너희를 시킨다는 거야?”

해답은 금세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 깨닫고 다시 물었다.

“설마 드래곤?”

떠오르는 대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드래곤이 시련의 탑을 소유하고 있구나.”

침묵은 긍정이 되었고 그녀의 눈이 꿈틀거리는 걸 보자 확신이 들었다.

“드래곤이 너희를 핍박하고 있나?”

“네게 너무 많은 걸 알려줬어.”

“더 알려줘도 돼.”

“아니, 싫어.”

그녀는 강하게 말했고 나는 생각했다. 주리스가 말하길 시련의 탑을 이용하려면 수인 족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빚을 지어놓으면 좋겠지.

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도 있어.”

그녀의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나는 숨길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드래곤을 죽일 생각이야.”

유선은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고 그 바람에 턱밑으로 굵은 침이 흘렀다. 뒤늦게 소매를 올려 침을 닦았지만 속마음이 드러난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역시 수인 족은 드래곤에게 핍박받고 있어.

생각해보면 힘세고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수인 족과 대등하게 있을 리 없다. 외부세력에 대항해 원주민끼리 규합했다고 해도 차별은 존재한다. 힘의 차이는 언제나 차별을 낳으니까.

“너 미쳤구나.”

그때 옆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내 허리에 찰떡처럼 붙어있던 알라샤가 말했다.

“혼자서 드래곤을 설득하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그런데 드래곤을 죽이겠다니.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난 드래곤보다 강해.”

“자신감이 강하겠지. 과한 자신감은 저승행 지름길이야. 젊은 날의 객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나는 알라샤의 말을 묵살하고 유선에게 다가갔다.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접근하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억지로 내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시련의 탑을 이용하게 해줘. 그럼 그 대가로 드래곤을 죽여줄게.”

드래곤을 죽이려는 이유가 시련의 탑을 원활하게 이용하기 위함이다. 조삼모사 격이지만 시련의 탑을 이용한 다음 드래곤을 죽이면 문제가 훨씬 간단해진다.

“헛소리 하지 말고 주황색 구슬이나 내놔.”

하지만 그녀는 내 요구를 간단히 날려버렸다.

단호하네. 단호박 같은 여자야.

“헛소리가 아냐.”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녀의 눈이 한껏 치켜떠졌다. 내 신형을 전혀 파악하지 못 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주변을 돌면서 오른손 검지를 세워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찔렀다. 몰래 젖가슴도 찔러봤는데 아기피부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흑인의 검은 피부가 다른 인종보다 부드럽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어.

“꺄악!”

유선이 아파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찔러!”

엄살이 심하잖아.

그녀의 요청에 나는 팔을 거두고 우뚝 멈춰 섰다.

“지금 건 정말 힘 조절을 잘 한 거야. 더 강하게 힘을 주면 네 몸에 구멍이 뚫렸을 걸.”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완전히 힘을 빼서 찔렀기에 망정이지, 힘을 조금이라도 더 줬다면 그녀의 몸은 걸레짝이 됐을 거다.

유선이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련의 탑은 함부로 이용할 수 없어.”

“너희들이 운영하고 있잖아.”

“우리는 시키는 대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야. 관리감독은 드래곤이 하고 있어. 드래곤 중 하나가 탑 근처에 거주하면서 항상 감시하고 있어.”

나는 드래곤이 세 마리라는 걸 기억해냈다.

“아! 삼룡이였지, 참. 그 놈은 할 짓도 없는 놈인가 보네. 그냥 믿으면 되지. 서로서로 귀찮게 그런 걸 감시하고.”

“말 함부로 하지 마. 아무리 구슬을 뜯어가도 드래곤은 우리의 희망이야.”

“희망?”

“너 같은 변종들 때문에 천외지는 박살이 났어. 요즘은 몬스터보다 이세계인들이 더 문제야.”

“이세계인들이 왜? 전쟁이라도 일으키나?”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녀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하계 차원에서 온 주제에 가끔 너처럼 말도 안 되게 강한 놈들이 있어. 그런 놈 중에는 성격이 이상한 놈들도 많아. 그래서 애꿎은 우리만 피해를 보고 있어. 지금처럼.”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이들에게 드래곤은 양날의 칼이지만 한편으로는 유일한 버팀목인 듯했다.

“원래 우리 수인 족들은 수도 많고 강했어. 하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도시 하나 수준 밖에 안 돼. 이게 다 천외지로 이주해 온 너희 이세계인들 때문이야.”

“너희들은 이세계인들보다 강하잖아.”

나는 아르카디아인과 이들의 전투력 차이를 떠올리고 말했다.

“그 대신 수가 적어. 우리는 너희처럼 밥 먹듯이 교미를 하지 않아. 임신이 가능한 기간도 너희보다 짧고, 그러다보니 자식도 적게 낳고 세대교체 기간도 길어.”

근본적인 문제는 이곳에 이세계인들을 데려오는 천외천 놈들이 문제지만 그녀는 그것까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보다 수인 족들의 세력이 다채로운 인종에 비해 수가 적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문제를 파고 들었다.

“드래곤에게 구슬을 안 바치면 재앙이 일어난다고?”

“우리는 정기적으로 드래곤에게 구슬을 바치고 있어. 일종의 보호세야. 네가 빼앗은 주황색 구슬들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드래곤이 크게 화를 낼 거야. 그러니 어서 돌려줘.”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이미 써버렸는데.”

“···뭐?”

유선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흔들어보였다. 휴지를 소환하려고 구매했던 마력을 10퍼센트 올려주는 팔찌였다.

“벌써 주황색 구슬을 네 개나 썼어.”

세 개는 팔찌를 사는데 썼고 하나는 알라샤의 목걸이 값으로 나갔다.

“네 개 정도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돌려줘. 이제 보호세를 내는 날 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어.”

“싫어.”

“드래곤들이 재앙을 내릴 거야. 우리도 피해를 보겠지만 너도 살아남기 힘들 거야.”

그녀는 협박을 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가 드래곤보다 강하다는 걸 아직도 체감하지 못 하는 듯했다.

직접 보여줘도 믿지 못 하다니. 이래서 편견이 문제다.

“드래곤 마케팅 한 번 잘 해놨네.”

생각해보면 드래곤은 항상 강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어느 세계를 가든 그 전제가 통용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강하다는 걸 보여주지?

“험험.”

저기 멀리 보이는 산을 날려버릴까? 아니면 아까보다 더 세게 몸을 콕콕 찔러줄까?

일단 산을 날리는 건 안 된다. 근처에 엘프가 있다고 했으니 괜히 산을 없애서 척을 지게 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까마귀 수인 족인 유선을 두들겨 패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힘 조절을 잘 못하는 순간 그녀는 걸레짝이 될 테고, 그럼 일이 더 커지겠지.

“어떻게 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안경처럼 쓰고 있는 정보 분석기가 떠올랐다. 나는 정보 분석기를 톡톡 두드렸다.

“이게 뭔지 알아?”

“그게 뭔데?”

“정보 분석기야.”

“정보 분석기라고?”

유선이 화들짝 놀랐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정보 분석기는 천외천의 이름 있는 존재들이나 사용하는 물건이야. 너처럼 하계차원에서 온 존재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라고.”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정보 분석기를 벗어 그녀의 얼굴에 씌워줬다. 버튼을 조작해서 전투력이 나오게 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어!”

그녀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 정보 분석기잖아!”

“내 전투력이 보여?”

“···헉!”

그녀가 내 전투력과 그녀 자신의 전투력을 확인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너 정말 강하구나!”

“험험.”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정보 분석기를 다시 뺏었다.

“나는 드래곤보다 강해. 나를 시련의 탑에 있는 드래곤에게 안내해주면 보호세를 사라지게 만들어주지.”

“그래도 네가 드래곤보다 강하다는 건 좀······. 그리고 네가 드래곤을 죽이겠다는데 내가 순순히 안내해줄 것 같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는 방향을 틀어서 말했다.

“그럼 드래곤을 죽이지 않고 협박만 할게. 나는 탑의 이용이 주된 목적이고, 탑의 이용금액조정이 부가적인 목적이야. 드래곤을 죽이는 건 겉치레 같은 행동이라서 생략할 수 있어.”

“형편 좋은 소리하네.”

말은 퉁명하게 내뱉었지만 그녀는 벌써 머리를 굴리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이 그 증거다.

한참 만에 유선이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네 의견을 따를게.”

“그럼 당장 출발하자. 안내해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다른 대표들의 의견도 들어야해.”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아.”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착지했고 수인 족 병사들과 대면했다. 병사들이 나를 포위했는데 유선이 손을 들자 금방 물러났다.

4천왕이라더니 정말 계급이 높잖아.

그녀를 따라서 수인 족들의 대표가 있는 회랑으로 향하는데 알라샤가 내 허리를 팔로 툭 쳤다.

“그거 진짜 정보 분석기야?”

“그래.”

“어떻게 얻었어?”

“주웠어.”

대충 둘러대니 다른 걸 묻는다.

“너 어쩔 생각이야? 진짜 드래곤을 죽일 생각이야?”

“협박만 할 거야.”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철없는 아이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 귀가 쫑긋 서서 그녀의 호기심을 알렸는데 문득 귀를 깨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죽을지도 몰라.”

“드래곤 따위 겁 안나.”

“드래곤 얘기가 아냐. 수인 족들은 드래곤과 한통속인데 너를 반기기보단 배척할 거야. 순순히 따라가도 괜찮을까?”

“걱정도 많네.”

나는 알라샤의 말을 묵살하고 유선을 따라 걸었다. 다른 수인 족들의 대표를 만나는데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왔던 포탈로 다시 들어가서 5분쯤 걸으니 여러 수인 족들이 맞은편 길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유선! 그 녀석들은 누구냐?”

유난히 덩치가 큰 호인 족 하나가 물었다.

주변에는 다른 수인 족들도 여럿 있었는데 나는 옷차림을 보고, 분위기를 읽고, 그들이 각 수인 족의 대표들이란 걸 알아챘다. 소란을 피우니 호기심을 품고 버선발로 달려온 것이다.

여긴 수뇌부가 직접 행동하네.

내가 잠자코 서 있으니 유선이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내 요구사항과 지금의 상황을 알리는 듯했다.

유선이 말을 전할수록 호인 족 대표와 웅인 족 대표의 얼굴 낯빛이 시시각각 변했고 돈인 족 대표도 표정이 험악했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들 중 웅인 족 대표는 내 얼굴을 노려봤는데 유선이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오감을 확장해서 그들의 대화를 엿 들으니 재밌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정보 분석기를 착용하고 있어.”

“우리보다 강한 이세계인을 데려오다니. 어떻게 할 생각인가, 유선?”

웅인 족 대표와 호인 족 대표가 힐난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전투력은 우리보다 강한데, 모르는 게 많고 어리숙한 것 같아. 마침 저 녀석도 시련의 탑에 있는 홍미님께 용무가 있으니 그냥 안내하면 해결될 것 같아. 주황색 구슬을 내놓을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지가 어쩌겠어. 죽으면 뱉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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