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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78화 (78/127)

# 78

웃기고 있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저 녀석을 속이겠다는 거냐?”

호인 족 대표가 물었다.

“속이겠다는 게 아냐. 저 녀석은 홍미님을 만나길 바라고, 우리는 보호세를 빼지 않고 내야하니 서로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거지.”

“저 녀석은 죽게 될 텐데?”

“그건 저 놈 사정이야.”

까마귀가 영리한 동물이라고 들었는데 수인화한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잔꾀를 부리다니.

“확실히 우리에게 손해되는 일은 아니군.”

“적당히 비위만 맞춰줘.”

유선이 말을 마치자 다른 대표들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들은 눈짓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일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유선이 다가왔다.

“좋아, 안내해줄게.”

그녀는 선심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건가?”

“보호세를 내는 날짜가 삼일 뒤야. 삼일 뒤에 출발하지.”

“삼일 뒤라고?”

“그래. 우리도 부족한 구슬을 준비해야지.”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험험.”

나는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빚을 지어놓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나를 이용해먹으려는 심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려.”

“그럼?”

“내가 너희들 쪽으로 일을 진행하려는 건 그편이 덜 귀찮고 빠르기 때문이야. 너희들 쪽의 진행이 더 느리다면 굳이 내가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지.”

목소리를 충분히 크게 했기에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수인은 없었다. 그들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말을 바꾸겠다는 거야?”

“협상의 여지가 더 있다는 거지.”

“협상의 여지?”

“그래.”

유선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빛과 팔짱을 껴서 부각되는 가슴이 보기 좋았다.

곁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알라샤가 내 팔을 툭 쳤다.

“분위기 좀 읽어.”

그녀는 쥐새끼처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표정들이 심상치 않아.”

알라샤의 말을 듣고 수인 족들의 얼굴을 뜯어보니 짜증이 가득해보였다.

“저 녀석들 표정은 원래 구렸어.”

“나는 드래곤들보다 저들이 더 무서워.”

“왜?”

“저들은 각 수인 족을 대표하는 이들이야. 자기 인종들 중에서 가장 강한 놈들이라고.”

“그래서?”

“그래서가 아냐. 사이가 나빠지면 좋을 게 없어. 네가 아무리 드래곤보다 강하다고 해도 저들이 힘을 합치면 너만 손해야.”

알라샤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걱정도 팔자네.

나는 아래로 축 쳐진 그녀의 귀를 매만졌다.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소곤거리고 있는데 다른 수인 족 대표가 다가왔다. 내가 죽였던 돼지 수인 족들의 우두머리인 돈인 족 대표였다.

“인간. 착각하는 게 있군.”

그는 내가 죽인 놈들보다 1.5배 정도 덩치가 더 컸다. 뱃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는데 배가 남산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놈은 처음 봤다.

“너는 우리 돈인 족 동료들을 죽였다. 그 죄를 물을 수도 있지만 참고 넘어가겠다는 거다. 그것만으로 협상은 끝이다.”

“그건 정당방위였어.”

“웃기는 소리하지마라.”

“웃으라고 한 소리가 아닌데.”

돈인 족 대표가 위압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같잖아서 웃었다. 그게 녀석의 비위를 거슬리게 만들었나보다.

“이 녀석 정말 강한 거 맞아?”

돈인 족 대표가 유선을 보고 물었다.

“우리보다 강해.”

“얼마나?”

“녀석의 정보 분석기로 확인했더니 내 전투력이 4천인데 녀석의 전투력은 6천이야.”

돈인 족 대표는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믿을 수가 없군.”

그리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렇게 작은 몸집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는 내 면전에 삿대질을 하며 침을 튀겼다.

덩치가 크다고 싸움 잘하는 건 아닌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덩치 큰 저팔계처럼 생겼다. 돈인 족들의 세계에선 덩치가 클수록 힘도 강한가보다.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지.”

나는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을 거칠게 내리쳤다.

“어, 어억!?”

그러자 삿대질 하던 손이 아래 방향으로 힘없이 꺼졌다. 급기야 땅바닥에 처박혔다. 힘을 조절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돈인 족 대표는 뜨거운 주전자에 데인 것처럼 끙끙거리며 박힌 팔을 움켜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광경에 수인 족들이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멀거니 쳐다보다가 내 눈치를 읽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돈인 족 대표는 온힘을 써서 겨우 바닥에 박힌 팔을 빼냈는데 팔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는 돼지족발을 같은 손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강하군.”

그걸로 끝이었다. 녀석은 더 이상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천외지는 강한 놈이 우선시 되는 세상이라더니 이런 건 참 편하네.

분위기가 훅 가라앉자 호인 족 대표가 물었다.

“그래서 뭘 더 원하는 거냐, 인간?”

역시 백 번 말로 떠드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게 낫다. 얼굴표정부터 갑자기 대령 앞의 중대장처럼 공손해졌다.

나는 내 팔에 걸린 팔찌를 찰랑거리고 말했다.

“마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이 필요해.”

* * *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감을 따는 게 좋다. 나는 그들을 달달 볶아서 마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을 세트채로 기부 받았다.

하지만 성능은 별로 좋지 못 했는데 주황색 구슬로 구매한 팔찌가 값어치를 하는 것인지 그들에게 받은 아이템들의 성능은 팔찌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마력을 올려주는 투구를 착용하고 갑옷을 착용하고 심지어 반지까지 양손 가득 꼈는데 마력 상승치는 미미했다. 휴지를 소환해보자 마력이 부족하다는 빛의 글귀가 또 다시 떠올랐다.

“각 종족 대표라는 것들이 좀 좋은 걸 줄 것이지. 쩨쩨하게. 구린 걸 주니까 안 되잖아.”

내가 툴툴거리자 아이템들을 들고 온 유선이 항변했다.

“수인 족 중에서 마법사가 드물어서 그래. 마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은 인간과 엘프들이나 쓰지, 우리들은 잘 안 써.”

“너는 마법사 아니었냐?”

“나도 주력이 마법은 아냐.”

결국 나는 거추장스런 장비들을 벗고 휴지를 소환하는 걸 뒤로 미뤘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드래곤을 협박해서 아이템을 구해도 된다.

나는 그들이 드래곤에게 보호세를 내는 날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죽였다.

그들은 나와 알라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도 경비를 삼엄하게 돌렸는데 내가 약속을 어기고 도망칠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주황색 구슬을 빼돌리는 걸 걱정하거나.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고 마침내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출발할 거야. 나와.”

이른 새벽녘 유선이 숙소를 찾아왔다. 미리 말을 전해 듣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짐을 들고 알라샤와 곧장 밖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드래곤에게 보호세를 내는 일이다보니 거창하게 출병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인원이 적었다.

“나뿐이야.”

“혼자라고?”

“응.”

“드래곤에게 보호세를 내는 일 아니었나?”

“나 하나로 충분해. 괜히 사람이 많으면 쓸데없이 일만 커져.”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인 족 중에서 사천왕이니 충분히 강하다. 별도의 경비인력은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보호세로 낼 주황색 구슬들은 그녀가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으니 짐꾼도 딱히 필요 없다.

“도착하기까지 오래 걸려?”

“포탈을 타고 금방이야.”

나와 알리샤는 유선을 따라 걸었고 곧 포탈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시련의 탑과 이어진 포탈은 포탈지구가 아닌 왕궁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곳에 포탈이 있다니 드래곤 눈치 많이 보겠어.”

“전혀. 보호세를 내는 날에만 포탈이 활성화 돼.”

우리는 포탈 안으로 들어갔고 곧 새로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강한 햇빛이 내리쬐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옥죄었다.

“여긴 사막이잖아?”

열기 탓에 숨이 막혔다. 포탈이 시련의 탑과 곧바로 이어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모래가 가득한 사막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돼.”

우리는 유선을 따라 한참을 더 걸었다. 심지어 몬스터도 튀어 나왔다. 나는 황당해서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이 길 맞아?”

“금방이야. 얼마 안 남았어.”

사막이라는 지형에 걸맞게 전갈을 닮은 몬스터가 있었는데 덩치가 사람만큼 컸다. 알라샤에게 물어보니 스콜바퀴라고 불리는 몬스터였다. 놈은 며칠을 굶주렸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공격해왔다.

“몸 비율이 개성적인 놈이네.”

나는 스콜바퀴를 감상하며 놈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집게를 간단히 피했다. 반격을 할 요량으로 강권을 내지르자 초록색 피가 튀면서 놈의 몸이 퍼즐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꼬리에 독도 있어?”

머리와 몸이 으깨졌는데도 놈의 꼬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스콜바퀴의 독에 쏘이면 웬만한 장정도 며칠을 앓아 누워.”

“사람 죽일 정도의 독은 아닌가보네?”

“너는 멀쩡할지 몰라도 난 죽을 지도 몰라.”

알라샤의 말을 듣고 나는 스콜바퀴의 독을 채취하려다가 포기했다. 내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독이니 나보다 강한 놈들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을 거다.

한 동안 스콜바퀴가 계속 나왔고 그때마다 내가 나섰다. 간간히 유선도 나섰는데 그녀는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나는 손도 근질근질해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육탄전으로 승부를 봤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귀찮아져서 탄지공으로 상대했다. 마력을 적당히 실어서 날리자 스콜바퀴가 낙엽처럼 우수수 죽어나갔다.

“얼마나 더 가야하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투덜거렸다. 앞장서던 유선이 나를 흘겨보고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참아.”

“날아서 가면 안 되나?”

“드래곤이 이 지역 전체를 마법으로 제한하고 있어. 불가능해.”

그녀의 말대로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거대한 킹코브라가 나왔다. 어찌나 몸집이 큰지 눈알 한 짝이 사람머리통보다 컸다.

“수인 족이 말하는 금방의 기준은 인간과 다르구나.”

“쟤만 유난스러운 거야.”

알라샤가 투덜거리는 걸 보고 나는 킹코브라를 상대하러 나섰다. 덩치에 비해 몸놀림이 잽쌌지만 내 상대는 아니었다.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갈기자 두개골이 쩌저적 갈라지며 절명했다.

한동안 킹코브라를 상대하자 다음에는 사막여우를 닮은 몬스터가 나왔고 여우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커다란 독수리가 나왔다.

“드래곤이 있는 주변이라서 그런가? 갈수록 몬스터가 많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내 추측을 묵살하고 유선이 앞장섰다.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

거대 독수리마저 모두 죽이자 알라샤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와 유선이 대부분의 몬스터를 상대했음에도 그녀는 우리 중 가장 약했기에 가장 먼저 지쳤다.

“힘들어. 쉬었다가자.”

“안 돼. 제시간에 맞춰서 가야해.”

알라샤의 요구에 유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그녀의 속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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