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79화 (79/127)

# 79

내가 지치길 바라고 있어.

나는 확신했다.

다른 수인 족들은 내가 드래곤에게 패배할거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지만 유선은 다르다. 그녀는 나와 겨뤄봤고 내 전투력을 대강 가늠할 수 있다.

드래곤과 만나기 전에 내 힘을 최대한 빼놓을 생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의아했던 점이 밧줄 풀리듯 풀렸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여정을 출발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을 거다.

괜히 까마귀 수인 족이 아니네. 아주 영악해.

“까마귀. 너 음흉한 속셈이 있구나.”

거대 독수리의 잔해를 팽겨두고 내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무슨 소리야?”

“왜 제대로 가지 않고 뺑뺑 돌아서 가지?”

“난 제대로 안내하고 있어.”

말과는 달리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가진 초인적인 감각은 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거짓말이 아냐.”

“표정관리를 전혀 못 하네. 얼굴에서 다 티가 나.”

내 말에 유선이 바보처럼 눈을 껌뻑였다. 단순히 넘겨짚었을 뿐인데 알아서 반응해준다.

“날 믿지 못 하겠다면 제대로 안내해줄 수 없어.”

“제대로 안내를 해줘야 믿지.”

그 뒤로도 우리는 유선을 따라 걸었고 또 다시 몬스터를 만났다. 온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한 거대 도마뱀이었는데 전에 만났던 독수리보다 강했다. 비늘은 단단했고 입에선 산성 액을 뿜었다. 갈수록 강한 몬스터가 출현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나는 지친 알라샤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헥헥거리며 용케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쉬고 싶어.”

“기다려봐.”

나는 알라샤를 앉혀 두고 유선에게 다가갔다. 몬스터의 시체가 발에 채였는데 밟아서 터뜨렸다.

푹.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서 내 얼굴을 적셨다. 그렇지 않아도 더워서 짜증났는데 더 짜증이 났다.

“까마귀. 대화 좀 하지.”

“대화 할 시간 없어. 서둘러 움직여야 해.”

“그럼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주지.”

나는 그녀의 뺨을 때렸고 그녀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급기야 회전력을 이기지 못 해 몬스터의 시체가 있는 모래 바닥을 굴렀다.

“으악!”

유선이 턱밑의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여자를 함부로 때리다니! 야만인!”

“너와 난 종족이 달라.”

“무슨 소리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내가 널 두들겨 패도 문제가 없다는 거야. 종족이 다른데 무슨 상관이야.”

내가 무심한 얼굴로 손바닥을 들자 그녀가 경기를 일으켰다.

“그만둬!”

“싫어.”

“갑자기 왜 그래?”

“네 속셈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어울려주기 귀찮아.”

내가 한발 다가서자 유선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위협을 가하자 유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말 할 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안내해.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끄는 거 나한테는 무의미해.”

내가 몬스터의 시체를 걷어차며 말했다.

“이런 놈들과 싸운다고 내가 지칠 것 같아?”

유선은 내 눈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그래, 지칠 것 같아.”

단호하네.

“죽고 싶나?”

“내가 죽으면 누가 시련의 탑까지 안내해줘?”

“좋아. 그럼 죽기 직전까지만 때려주지.”

나는 짧은 순간 판단을 내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막 주먹을 뻗으려는데 유선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그만! 내가 잘못했어!”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속여서 미안해. 이제부터 제대로 안내할게.”

“왜 우릴 속였지?”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녀는 공포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불안하다고? 뭐가?”

“네가 홍미님을 죽일거라고는 생각 안 해. 그래도 불안해. 어젯밤 꿈을 꿨는데 꿈자리가 안 좋았어.”

“무슨 꿈을 꿨는데?”

“까마귀가 나오는 꿈이었어.”

“네 친척들이 꿈에 나왔는데 왜 불안해?”

내 말에 유선이 얼굴을 구겼다.

“그거 차별적인 발언이야.”

“너 까마귀 수인 족 맞잖아.”

“누가 너보고 원숭이와 친척이라고 하면 좋겠어?”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다.

“험험.”

나는 헛기침을 하고 본래 주제로 돌아왔다.

“결국 드래곤 때문인가?”

“드래곤을 죽여선 안 돼.”

“죽일 생각은 없는데.”

“드래곤이 크게 다쳐서도 안 돼.”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드래곤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해.”

“어째서?”

물었는데 대답이 없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드래곤이 우리의 희망이야.”

뻔한 대답이 나와서 나는 실망했다.

“보호세를 뜯어 가는데 희망이라고?”

“우리는 천외천으로부터 독립할거야.”

“독립?”

갑자기 흥미가 확 솟구쳤다.

“드래곤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가 있어. 차원을 구매하는데 구슬이 많이 필요해. 드래곤은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우리 대신 구슬을 모아주기도 해.”

나는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자발적인 노예군.”

“무슨 소리야?”

“구슬을 바치는 건 너희들인데 드래곤까지 우상숭배하고 있잖아.”

유선이 항변하듯 말했다.

“드래곤이라는 구심점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야. 상징적인 대상이 없었다면 우리 수인 족들은 결코 화합할 수 없었어. 다른 수인들로부터 구슬을 모으는 일도 지금보다 더 힘들었겠지.”

확실히 종족도 다른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화합하기란 쉽지 않다. 공동의 목표가 있거나, 적이 있거나, 지금처럼 넘볼 수 없는 대상이 윗자리를 꿰차고 있어야 밑에 있는 놈들이 서로 어울리기 편하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구슬이 있으면 행성을 살 수 있다고?”

“너 하계 차원에서 온 인간이잖아. 그것도 몰랐어?”

아르카디아가 초록색 구슬에 팔렸다고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구슬이 있다고 차원을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천외천 놈들이 상도덕이 있는 놈들이었나.

“구슬만 있으면 차원을 구매할 수 있나?”

“그래.”

“정말 구슬에 미친놈들이군.”

나는 턱을 쓰다듬고 머리를 굴렸다. 놈들은 지구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구슬을 구해서 지구의 안위를 두고 협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선이 말을 이었다.

“드래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시련의 탑까지 제대로 안내해줄게.”

나는 단서를 붙였다.

“먼저 공격하진 않겠어. 하지만 드래곤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드래곤이 크게 다치는 것도 안 돼.”

“뭐, 그 정도는 좋아.”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동의했다.

팔다리 하나 분질러 놓고 뇌사상태나 식물인간 정도만 아니면 되겠지.

내가 수락하자 유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곧 앞장섰다. 우리는 다시 걸었고 이번에는 몬스터와 조우하지 않았다.

* * *

“여기야.”

그녀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풀 한포기 없는 광활한 사막이었다.

“탑이 안 보이는데?”

황량한 것은 여전했다. 인적도 드물었고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모래 둔덕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여기 지하에 있어.”

“지하?”

지하라는 말에 정보 분석기를 조작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3D 홀로그램으로 지형지물이 파악되기 마련인데 특수한 방법으로 숨겨져 있는 듯했다.

주도면밀하네.

알라샤가 말했다.

“이래서 다른 종족들은 탑을 이용할 수 없다고 했구나.”

“단순히 숨겨져 있는 거 아냐?”

“엘프들을 제외하곤 탑을 찾는 것도 힘들다고 들었어.”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엘프들은 왜? 우리와 뭐가 다르지?”

“이렇게 숨겨져 있어도 정령을 이용해서 알아낼 수 있다고 했거든.”

“그렇군.”

초인적인 내 감각으로도 파악이 불가능한데 정령을 이용하면 가능하다니.

나도 정령술을 한 번 배워볼까.

문득 나는 휴지가 물의 정령으로 몸을 씻겨주던 기억이 났다. 귀찮아서 배울 생각은 없었는데 여유가 된다면 정령술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유선이 앞으로 나섰고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땅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모래가 소용돌이치고 모래바람이 용오름처럼 솟아올랐다. 메뚜기 떼 같은 모래바람은 폭풍처럼 금방 지나가버렸고 모래가 걷히자 땅에 붙은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이쪽이야.”

유선이 문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밖에서는 깜깜했는데 안에서는 밝구나.”

우리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통해 내려갔고 알라샤가 뒤따라 들어오며 감탄했다. 내가 물었다.

“까마귀. 드래곤은 지하에 있나?”

“탑의 옆에 레어를 두고 살고 있어.”

“어둠침침한 곳을 좋아하는 놈이군.”

어쩌면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전에 탑을 숨겨서 갈등을 원천봉쇄하는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기왕이면 드래곤이 대화가 통하는 놈이길 빌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지면에 발을 내딛자 영화처럼 횃불이 차례대로 타오르며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는 드문드문 몬스터를 닮은 석상이 보였는데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경비용 골렘인 듯했다. 우리는 별 다른 문제없이 다음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게 시련의 탑이야.”

유선이 넓은 공동에 삐죽 솟은 탑을 가리켰다. 공동은 넓었는데 지하 깊숙한 곳임에도 어둡지 않았다. 천장에 박힌 종유석에서 밝은 빛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짧네. 그리고 작아.”

나는 탑을 보고 실망했는데 시련의 탑이 생각보다 너무 초라했다. 커다란 접시에 고깔 콘 하나를 얹어둔 것 같았다. 넓은 공동에 비해 보잘 것 없어서 공간을 비효율적으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왔느냐.

그때 탑의 뒤편에서 드래곤이 나타났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구슬을 바치러 왔나이다.”

유선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넓은 공동은 저 거대한 체구를 위한 거였군.

드래곤은 황금으로 물든 파충류의 눈을 번뜩였다.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여섯 개나 있었고 몸은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녀석의 흉흉한 생김새와 커다란 덩치에 압도당했다.

-저 놈들은 처음 보는 놈들이군. 너흰 누구냐?

내가 나서려는데 유선이 막아섰다.

“홍미님께 용무가 있는 놈들입니다.”

-용무?

내가 말했다.

“시련의 탑을 이용하기 위해서 왔다.”

드래곤은 웃었고 목청이 좋아서 공동전체가 울렸다. 알라샤가 귓속말로 존댓말을 하라고 칭얼거렸는데 나는 무시했다.

-배짱이 두둑한 인간이군.

드래곤도 격식을 신경 쓰지 않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아.

-유선. 구슬은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홍미님.”

유선이 드래곤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건네자 드래곤이 주머니를 열어서 확인했다.

-구슬 수가 부족하군.

“나머지는 저 인간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드래곤의 눈빛이 바뀌었다.

-구슬을 내놔라.

“시련의 탑을 이용하게 해주면 구슬을 주지.”

내 말에 드래곤은 또 다시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배짱이 두둑한 게 아니라 겁을 상실한 미친놈이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