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80화 (80/127)

# 80

“나는 겁쟁이가 아니거든.”

-무슨 소리냐?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보고 누가 겁을 먹겠어?”

내 말이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렸나보다. 드래곤은 콧등을 찡그리고 뜨거운 콧김을 훅 내뿜었다. 숨을 좀 세게 쉬었을 뿐인데 강렬한 열기가 땅바닥을 검게 그을렸다.

콧김 한 번 굉장하네. 삼겹살을 구워도 금방 익겠어.

생각해보니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 했다. 배가 고파서 입맛을 다시는데 드래곤이 말했다.

-가끔 너 같은 놈이 있지. 세상 물정 모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착각하는 놈.

“자기소개 같은데.”

-혓바닥도 건방진 놈이군.

드래곤은 파충류 같은 눈을 반짝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거지.

드래곤이 말을 마치자 그의 몸이 빛났고 눈부신 광원이 바늘처럼 내 동공을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를 쳐다보니 몸이 작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빛이 걷히자 드래곤은 어디가고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청년이 나타났다.

변신마법이군.

내가 물었다.

“인간보다 드래곤의 모습이 더 강하지 않나?”

“너 정도는 인간화한 상태로 충분해.”

“후회할 짓을 하는 것 같은데.”

“네 긴 혓바닥을 후회하게 해주지.”

드래곤은 내 말을 묵살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두 갈래의 나뭇가지를 뿔처럼 장식하고 있는 지팡이가 날아왔다.

염력이 수준급이네.

그는 지팡이를 쥐고서 유선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인간에게 구슬을 맡겼지?”

“맡긴 게 아닙니다. 홍미님.”

“그럼?”

“빼앗긴 겁니다.”

드래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이 너희 수인 족들보다 강한가?”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보다는 월등히 강했습니다.”

“너보다 월등히 강했다고?”

“예.”

유선은 쩔쩔매며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할 때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머리를 조아렸는데 나를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다지 강해보이지는 않는데 놀랍군.”

“원래 강한 사람은 강한 티가 안 나.”

“솔직히 말해서 멍청하고 약해 보여.”

드래곤은 겁도 없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뱀 같은 시선으로 내 위아래를 슥슥 훑어봤다.

골동품을 확인하는 전당포 주인처럼 눈을 빛내던 그는 내 귀에 걸린 안경 같은 정보 분석기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상한 걸 가지고 있군.”

내가 말했다.

“정보 분석기야.”

드래곤은 일순 못 본 걸 본 사람처럼 놀랐다가 표정을 되찾았다.

“생긴 건 비슷한데 틀렸어. 가짜를 만들어서 속이려면 제대로 만들었어야지.”

“신형이거든. 마크 2야.”

내 말에 드래곤이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 웃긴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재밌나보다.

혼자서 지하구석에 오래 있다 보니 미쳐버린 건가.

측은한 마음이 드는데 드래곤이 한참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재밌는 놈이군. 네 헛소리에 좀 더 어울려주도록 하지.”

그는 염력을 이용해 정보 분석기를 내게서 빼앗았다. 나는 언제든 다시 가지고 올 수 있기에 가만히 놔뒀다. 기왕이면 유선처럼 내 전투력을 보고 놀라서 문제가 쉽게 풀렸으면 싶었다.

드래곤이 물었다.

“내게 낼 보호세로 시련의 탑을 이용하고 싶다고?”

“그래.”

“그걸로는 안 돼.”

“내게 뭘 더 바라지?”

그는 손가락을 말아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었다.

“구슬.”

“무슨 구슬? 주황색 구슬이 더 필요하다는 건가?”

“사용료는 노란색 구슬이야. 에누리는 없어.”

지금까지의 정보로 판단하면 구슬은 무지개색깔 순서로 가치가 달랐다. 노란색 구슬은 주황색 구슬보다 100배나 비쌌다.

“내가 가진 구슬은 주황색 구슬뿐이야.”

내가 아쉬워서 말했다.

“그럼 시련의 탑을 사용할 수 없어.”

단호하군.

드래곤은 정보 분석기를 착용하더니 버튼을 누르며 조작했다. 사용에 익숙하진 않은지 같은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다.

“이게 진짜 정보 분석기라면 이걸 팔면 될 텐데, 많이 아쉽군. 그럼 노란색 구슬 따위 수백 개는 얻을 수 있을 테지.”

갑자기 그의 말에 흥미가 생겼다.

“정보 분석기가 그렇게 비싼가?”

“그래. 비싼 건 차원 하나와 맞먹을 정도니까.”

차원 하나랑 맞먹는다고!

나는 정말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은연중에 비쌀 것이라고 가늠했지만 그 정도로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좋아, 저걸 팔아서 구슬을 모으면 되겠어.

“흠.”

드래곤은 콧등을 찡그리더니 주변을 둘러보면서 정보 분석기를 천천히 파악했다. 머리가 영리해서 그런지 사용방법을 금방 알아챈 것 같았다.

“가짜치고는 정말 잘 만들었군. 짝퉁으로 되 팔아도 되겠어.”

그는 주변 지형지물을 보고 뒤쪽의 탑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전면을 바라봤다. 유선을 쳐다보고 알라샤를 관찰한 뒤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전투력 확인 기능도 있는 건가?”

그러더니 나를 마주보고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어어!”

그는 한차례 놀라더니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소주 한 컵을 원샷한 사람처럼 얼굴표정이 심각했다.

드디어 내 전투력을 확인했나?

나는 웃음을 지었다. 내 전투력을 보고 자기분수를 파악했으면 앞으로의 얘기는 쉽게 흘러갈 거다.

“큭큭큭.”

그런데 그가 갑자기 웃었다.

“정말 잘 만들었군.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 했어.”

“무슨 소리야?”

“전투력을 임의 조작해서 나타내게 했군. 관찰대상이 인간이면 강해보이게 만들었나? 영리해.”

그는 정보 분석기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정보 분석기가 가짜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내가 이죽거렸다.

“드래곤이라길래 영리한 줄 알았는데 멍청하네.”

“수작 부리지마라.”

“에효.”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을 헛 살았어. 멍청한 도마뱀이야.

드래곤이 말했다.

“좋아. 이 가짜 분석기를 내게 주면 시련의 탑을 이용하게 해주지.”

“싫어.”

나는 곧장 거절했다. 재고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였다.

팔면 노란색 구슬을 족히 수백 개나 얻을 수 있을 텐데, 입장료 치고는 비싼 요구다.

내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거절하자 드래곤의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이제는 고량주 한 사발 정도 들이킨 것 같은 얼굴이 됐다.

“건방지게 혓바닥을 놀린 대가도 포함된 것이다. 거절하면 너는 죽게 될 거야.”

“그럼 거절하지.”

“목숨에 가치를 두지 않는 놈이군.”

더 이상 얘기를 나눠봤자 시간만 소모될 것 같았다.

나는 땅을 박차고 팔을 뻗어서 그가 착용하고 있는 정보 분석기를 다시 들고 왔다. 드래곤이 놀라서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나는 가볍게 피했다.

“내 자비심을 시험하고 있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넌 지금 살 기회를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너도 마찬가지야, 도마뱀.”

도마뱀이라는 말에 드래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 같은 건가.

그는 화통 삶아먹은 사람처럼 고함을 쳤고 지하전역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더니 급기야 온몸을 화염처럼 새빨갛게 만들었다. 꼭 사람 모양의 거대한 불덩이처럼 타올랐는데 그 자신이 화염으로 변한 것 같았다.

우와, 더워. 찜질방 같네.

놈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기가 기류를 만들어서 공동전체를 뜨겁게 달궜다.

나는 충분히 견딜만했고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유선은 겨우 버티고 서 있었고 알라샤는 괴로운지 무릎을 꿇고 땅바닥과 인사하고 있었다.

“괴로워. 숨을 쉴 수가 없어.”

알라샤와 나는 여정을 출발하기 전 충분히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안내는 드래곤을 만나기 전까지였으므로 그녀가 이곳에 올 강제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여정에 호기심을 느꼈고 그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여정을 함께 했다. 내가 그녀를 지켜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간의 정을 봐서 알라샤를 도와주기로 했다. 숨을 쉬지 못해 목을 벅벅 긁어대는 그녀를 움켜쥐고 나는 계단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복도를 지나치고 계단입구에 그녀를 눕히니 그제야 살 것 같은지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녀에게 일갈하고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정보 분석기를 아공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두었다.

가치를 모를 때는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소중히 다뤄야 한다. 괜히 부서져서 중고 값도 못 받게 되면 나만 손해다.

“조심해. 상대는 드래곤이야.”

“걱정하지 말고 얌전히 쉬고 있어.”

준비가 끝난 후 나는 다시 드래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드래곤은 되돌아온 나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움직이는 꼴이 꼭 쥐새끼 같구나!”

그는 불호령 같은 외침과 함께 거대한 화염의 구를 던졌다. 사람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활활 타면서 내게 날아왔다.

아직도 날 무시하고 있는 건가?

“이 정도쯤이야.”

불덩이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느려서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내가 피하자 애꿎은 땅바닥이 혹사당했는데 얼마나 뜨거웠는지 불덩이가 지나간 자리엔 화염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심지어 땅바닥의 흙과 모래가 불타고 있었다.

엄청난 열기야.

나는 반격을 가하기 위해 즉시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돌연 빛의 줄기들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게 보였다.

불덩이는 미끼였나? 이건 무슨 마법이지?

빛의 줄기들은 여러 갈래로 날아와서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불가피하게 몇 개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매스꺼웠다.

정신계 마법이구나.

차가운 음식을 급하게 먹은 사람처럼 골이 띵했다. 나는 천마신공으로 내력을 끌어 올려서 마법을 저항했다. 3초쯤 지나자 정신이 뚜렷해지면서 이질적인 마력이 땀처럼 몸 밖으로 배출됐다.

같잖은 수작을 부리네.

나는 주먹을 고쳐 쥐고 놈에게 달려갔다. 번개 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근접하니 놈이 귀신을 본 사람처럼 크게 놀랐다.

“뭐야! 어째서 죽지 않고 멀쩡한 거냐!”

정신계 마법이 아니라 즉사 마법이었군.

나는 대답대신 강권으로 놈의 면상을 갈겼다. 코뼈가 으스러지면서 굵은 피가 튀었다.

“커헉!”

놈은 뒤늦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는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맞고 나서 방어를 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뒤이어 왼발을 회전축 삼아서 로우킥을 날렸고 놈은 허리를 맞고 빈 깡통처럼 저 멀리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드래곤은 드래곤인지 감촉이 달랐는데 꼭 무거운 쇳덩이를 찬 것처럼 묵직했다.

“더럽게 단단하네. 통뼈냐?”

인간화 상태로도 이 정도면 드래곤으로 변신하면 더 단단하겠지.

“어!”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머릿속에서 손익 계산이 떠올랐다.

인간화 상태로 죽이면 손해야. 본래 모습으로 변신시킨 후 죽여야겠어.

인간으로 변신한 드래곤을 죽이면 드래곤 본이나, 드래곤 하트, 고기부터 가죽과 비늘까지 각종 재료들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설마 방금 그걸로 죽지는 않았겠지?”

노심초사하면서 놈이 쓰러진 곳을 쳐다보는데 그곳에서부터 갑자기 붉은 광원이 훅 뿜어져 나왔다.

건조한 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태울 듯이 뜨거워서 나는 눈을 가리고 실눈으로 정황을 파악했다. 붉은 빛으로 잠식된 놈의 몸이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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