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81화 (81/127)

# 81

“주제 파악이 빠르네.”

조금 더 자존심을 세울 줄 알았는데 놈은 곧바로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10초 정도 지나자 놈이 다시 완전한 드래곤 상태가 됐는데 인간화로 변할 때는 금방이더니 드래곤으로 돌아가는 건 오래 걸리는 듯했다.

-내가 널 우습게 봤군. 제대로 상대해주마.

놈이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지하공동 전체가 붉은 날개로 가득 찼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거지만 몸 크기가 무식하게 커.

내가 이죽거렸다.

“아까는 인간 모습으로 충분하다며.”

-큭!

드래곤은 실연에 상처받은 여인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하찮은 인간이 겁을 상실했구나!

그는 내 말을 묵살함과 동시에 마법을 날렸다. 손끝에서 화염으로 감싸진 얼음의 구가 날아왔다.

“이건 뭐야? 얼음불꽃?”

처음 날린 화염구보다 크기가 컸는데 크기 탓인지 위력도 강할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쳐낼까 고민하다가 피하기로 결심했다.

화르륵!

재빨리 몸을 움직여 피하자 뜨거운 열기가 훅 느껴졌다. 얼음불꽃이 지나간 자리는 새빨갛게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맞아서 상처라도 나면 최상급 포션으로도 회복하기 힘들겠어.

-쥐새끼 같은 놈. 이렇게 해도 피할 수 있나보자.

놈의 마법을 평가하고 있는데 드래곤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커다란 덩치와 맞지 않게 그는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았다.

마력으로 하늘을 나는 건가? 날개는 장식이었군.

그는 내 근접공격을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해도 주먹에 몇 대 맞으니 확실히 그 고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면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리고서 소리쳤다.

-죽어라!

일갈과 함께 하늘에서 얼음불꽃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살벌한 위력과는 달리 하늘을 수놓은 불꽃들은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크기만 무식한 게 아니라 공격하는 방식도 무식해.”

나는 엄습하는 불꽃들을 번개같이 피했다. 탄막 피하기를 실제로 하는 것처럼 피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피할 수 없는 건 하는 수 없이 주먹으로 쳐냈다. 얼불노 컨셉인지 쳐낼 때마다 손이 그을렸다가 얼어붙었는데 통증 외에는 별달리 큰 타격이 없었다.

“그래도 찝찝하군.”

일반사람이었으면 맞은 부위가 잿더미로 변하는 동시에 꽁꽁 얼어붙었겠지.

새삼 괴물 같은 내 몸에 나 스스로가 놀라웠다. 드래곤도 마찬가지로 놀랐는지 비늘로 덮인 얼굴이 멈칫 굳었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괴물 같은 놈! 이것도 피할 수 있는지 보자!

그는 파충류 같은 눈빛으로 날 째려보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거대한 마력파동이 얼굴 앞에서 입김처럼 소용돌이쳤다. 이번에도 얼음불꽃을 날리는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놈의 눈앞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불현 듯 땅에서부터 마력폭풍이 몰아쳤다. 용오름처럼 솟구친 모래먼지가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

위기감 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땅을 밟고 있는 내 다리가 낙엽 쓸리듯 저절로 움직였다. 중력이 감소된 것처럼 몸 전체가 가볍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폭풍에 휘말리겠어.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몸을 최대한 숙였다. 폭풍에 먹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발이 묶이면 행동의 폭이 좁아지고 행동이 제한되면 샌드백처럼 얻어터지기 십상이다.

아까 같은 얼불노 컨셉은 질색인데.

나는 버티기 위해 잡을 걸 찾다가 주변에 잡을만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가 문득 성마검의 존재를 떠올렸다.

나는 즉시 품안에서 성마검을 꺼내들었다.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검을 고쳐 쥐고 땅바닥에 박아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이 수직으로 박혔다.

“과연 드래곤은 드래곤이네.”

휴지와 같은 반쪽자리 드래곤이 아니다. 전투력은 내가 우위에 있더라도 마법 같은 잔재주는 날 귀찮게 만들기 충분하다.

빠드득! 꽈드득!

마력폭풍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위협적이게 움직이더니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약한 바람마저 걷히자 드래곤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상처 하나 없다니. 너 정체가 뭐지?

나는 히죽 웃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나는 가볍게 대꾸하며 놈을 향해 탄지공을 점점이 날렸다. 빛의 줄기가 마력을 품고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팅! 팅!

팝콘 튀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놈이 만든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혔는데 일종의 방어마법인 듯했다.

방어마법도 단단하네.

그럼에도 내가 마력을 퍼붓듯이 실어서 탄지공을 날리자 장막이 손쉽게 뚫렸다. 유리조각처럼 부서지는 장막을 보고 드래곤이 경악해서 뒤로 물러섰다.

-이런 미친! 버러지 같은 놈이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놀란 드래곤이 마법을 산발적으로 날렸다. 아까보다 더 많은 얼음불꽃들이 산탄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내 머리 위에는 먹구름도 생겼다. 우박이라도 떨어질까 싶었는데 얼음 대신 번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무식한 놈. 잘못하다간 탑이 무너지겠어.”

나는 내 자신의 신체보다 초라한 생김새를 가진 시련의 탑이 걱정됐다. 놈의 무식한 공격은 내겐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다른 것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다.

그 증거로 드래곤의 부하격인 유선은 구석에서 번데기처럼 쭈그리고 앉아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하의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는 건가?

“더 이상 어울려주면 안 되겠어.”

나는 먹구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생각했다.

마법으로 상대할까?

내게도 메테오 같은 위력적인 마법이 있다. 마력 능력치도 수준급으로 올렸기에 놈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마법을 사용했다간 이곳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뒤통수가 선득했다.

“천외천 놈들이 만든 것이니 웬만해선 괜찮겠지만···.”

콰광!

그 순간 얼음불꽃이 탑의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서리가 잿더미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놀라서 살펴보니 시멘트가 부서진 것처럼 탑의 일부분이 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천외천 놈들도 부실공사네.

나는 성마검을 고쳐 쥐었다. 숙련도로 보면 맨손으로 상대하는 게 더 편하지만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에는 주먹보다는 검이 나을 것이라는 단순한 판단에서였다.

천마비행술로 번쩍 날아서 놈의 면전에 굳듯이 서자 놈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어!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했다.

-어떻게 날 수 있는 거냐?

“무슨 소리야?”

-이곳 일대 전체는 내 영향력으로 하늘을 날 수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유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곳에서 하늘을 날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모종의 꿍꿍이를 포함해서 그 탓에 이곳까지 오는데 더 애먹었다.

“문제가 있나?”

-내 마법을 저항하려면 나보다 마력이 높아야 하는데···.

“내 마력이 더 높나보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 군.

드래곤이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또 무슨 술수를 부릴 생각이지?

처음엔 단순한 외침인 줄 알았는데 거대한 마력파동이 느껴졌다.

나는 소모적인 상황을 이어가기도 귀찮아져서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은의검법 중 하나인 점형 초식을 펼쳐서 놈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팅!

어느새 만들어진 투명한 장막에 검이 가로막혔다. 장막이 더 두터운 걸로 보아 아까보다 더 공을 들여서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천마신공으로 내력을 끌어올려서 성마검에 실었고 내력을 품은 검날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는데 이번에는 점형 초식이 아닌 베는 형식의 초식인 선형 초식을 사용했다.

서걱!

검이 사선으로 궤적을 그렸다. 그러나 방어막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드래곤은 흠칫 놀랐다가 도리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계속해서 선형 초식으로 방어막을 베었고 한참이 지나도 방어막이 멀쩡하자 초식 중 가장 위력이 높은 폭발형 초식을 사용했다.

서걱! 서걱! 서걱!

검이 채찍처럼 쇄도해서 방어막을 난자했다. 방어막이 더 버티지 못하고 균열이 나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으로 쾌재를 외치는데 그와 동시에 드래곤이 뜨거운 입김을 훅 내뿜는 게 보였다.

뭐지?

아까와 같은 얼음불꽃 마법인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마력의 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드래곤의 쩍 벌어진 송곳니 사이에서 화염과 열기가 한 되 뒤섞여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어!”

설마 브레스를 내뿜는 건가?

화르륵!

다음순간 소용돌이치던 열기가 내 쪽으로 쏘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내가 다급히 방비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처음엔 바늘이 전신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는데 3초쯤 지나자 누가 펄펄 끓는 기름을 들이 붓는 것처럼 피부가 바삭바삭 익어갔다. 심지어 눈이 먼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고 뜨거운 열기 탓에 숨을 쉬기도 괴로웠다.

나는 두 손으로 호흡기를 가리고 즉시 천마비행술로 브레스를 피했다.

콰과광!

드래곤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쫒아서 계속해서 브레스를 내뿜었다. 한참의 몸부림 끝에 열기가 걷히자 내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미쳤군. 이거 잘못하면 흉지겠는데.”

나는 벌겋게 익은 피부를 보고 중얼거렸다. 겉피부가 치킨처럼 바삭바삭 익어서 하연 겉껍질이 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한낱 평범한 인간이 브레스를 버텼다고!

드래곤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버틸 수도 있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 해봤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담담하게 말했지만 타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 맛이었다.

열상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몸이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가공할 체력 능력치로 겨우 살아남았지만 체력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단숨에 녹아 문드러지고 말았을 거다.

어쨌든 예정에도 없는 박피시술을 다 하네.

나는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한 올 벗겨내며 무심코 성마검을 쥐었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검은 뜨겁지 않았다.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는 건가?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천마비행술로 다시 날아서 드래곤에게 근접했다. 드래곤은 기겁하며 슬쩍 뒤로 피했다. 그러나 내가 더 빨라서 금방 거리가 좁혀졌다. 드래곤이 소리쳤다.

-실드!

다시 놈의 거대한 몸에 투명한 장막이 생겨났다.

쩌저정!

나는 성마검을 휘둘렀고 5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방어막이 칼에 베인 두부처럼 두 동강이 났다.

-잠깐 멈춰!

드래곤이 손사래를 쳤다.

“싫어.”

나는 틈을 비집고 놈에게 근접해서 즉시 은의검법을 펼쳤다. 그리고 초식 중 가장 위력이 높은 폭발형 초식을 사용했다.

서걱! 서걱! 서걱!

검이 동물의 발톱처럼 드래곤의 비늘을 긁었다. 굵은 피가 비처럼 사방을 적시고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여세를 몰아 성마검에 내력을 실어 휘두르자 드래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놈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마지막 처리를 하려는데 유선이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