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그만둬.”
나는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신기했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주변지역 전체를 덮쳐서 무사하지 못 할 줄 알았다.
“용케도 안 죽었네.”
“운이 좋았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긁으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죽고 싶다는 건가?”
“이제 그만해.”
“그만하라고?”
“안 죽이기로 했잖아.”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확실히 이곳까지 안내를 받으면서 드래곤을 죽이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문제는 내가 드래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조건 내에서다.
“비켜.”
“싫어.”
“너도 죽고 싶은 거냐?”
내가 검을 들이대자 그녀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약속했잖아.”
“그건 내가 얻어터지기 전이지.”
“홍미님도 충분히 얻어터지셨어.”
그녀의 말에 드래곤을 살펴보니 멀쩡했다. 잠깐의 틈을 말미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회복마법을 쓴 것 같았다. 이래서 마법사와 싸울 때 빈틈을 주면 안 된다.
“마지막이다. 꺼져.”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시련의 탑을 이용하지 못할 거야.”
유선이 두 팔을 벌린 채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시련의 탑을 조종할 수 있는 건 오직 수인 족 뿐이다.
“치사하게.”
“약속의 이행을 바라는 것뿐이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치켜들었던 검을 내렸다.
“좋아, 그럼 대화를 시작하지.”
나는 성마검을 바닥에 꽂은 후 덤덤하게 말했다. 내 검에 얻어터지기 직전, 드래곤도 대화를 원하는 눈치였으니 전투는 이쯤에서 종결될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유선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력파동이 느껴졌다. 놀라서 쳐다보니 드래곤이 또 다시 거친 숨결을 들이키는 게 보였다.
이 새끼가 끝까지!
“미친.”
거대한 마력파동은 브레스의 징후가 분명했다. 지금 구도에서 브레스를 쏜다면 일직선상에 있는 유선도 맞게 된다.
이 새끼는 부하의 목숨에 관심도 없는 건가?
퍽!
“꺄악!”
나는 유선을 거칠게 밀치고 드래곤에게 달려갔다. 놈의 입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마력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또 당할 줄 알고.”
나는 마력을 실어 탄지공을 날렸다. 빛의 줄기가 날아가 놈의 입천장을 꿰뚫었다. 드래곤의 거체가 크게 뒤로 물러났지만 마력파동은 멈추지 않았다.
“어, 어!”
드래곤이 크게 입을 벌렸고 거대한 빛이 쓰나미처럼 몰아쳤다. 피할 틈은 분명히 있었지만 나는 피하지 못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면 몸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가끔 드라마에서 주연이나 조연배우가 자동차에 부딪혔을 때, 나는 피하지 않고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저게 말이 돼? 피하면 되지! 왜 멍청하게 안 피하는 거야.’
근데 말이 됐다. 드래곤의 술수 때문인지 몸이 잠깐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그 타이밍이 내 움직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나는 피하지 못했다.
나는 직격으로 놈의 브레스를 맞게 됐다.
“으아아아악!”
후춧가루로 세수를 하는 것처럼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옷이 누더기처럼 찢어지고 피부가 허물처럼 벗겨졌다. 겨우 실눈을 뜨자 누가 고춧가루를 눈에 부은 것처럼 너무 아파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미친 도마뱀새끼가!
나는 태풍에 맞서는 허수아비처럼 겨우 버티고 섰다. 손을 뻗어서 바닥에 꽂힌 성마검을 쥐자 손바닥이 쓰라렸다. 이제 피부가 모두 벗겨지고 그 아래의 지방과 근육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위험해.
나는 놈의 브레스에 대항하기 위해 성마검을 쥐고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검에 천마신공의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내력을 머금은 성마검이 곧게 서서 브레스에 대항했다. 검에 실리는 내력이 점차 많아지면서 브레스가 홍해가 갈라지듯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안도했다.
진짜 죽을 뻔했어.
허리춤에 다급히 손을 뻗자 아공간 주머니가 만져졌다. 다행히 아공간 주머니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구멍이 났지만 성능은 멀쩡했다.
나는 한손으로 성마검을 쥔 채 브레스에 맞서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힐링 포션을 꺼내 온몸을 치료했다.
정말 아낄 틈 없이 물 쓰듯이 힐링 포션을 썼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피부가 가라앉고 새살이 돋았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내 피부가 아기피부처럼 보송보송해졌다.
뚝.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밸브를 잠근 것처럼 브레스가 멎었다.
드래곤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회복! 네놈 회복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나!
나는 놈의 말을 묵살하고 즉시 녀석에게 달려갔다. 틈을 주면 놈은 또 다시 술수를 부릴 것이다. 틈을 주면 안 된다.
스슥!
검이 궤적을 그렸다. 드래곤이 발톱을 세워 내 공격을 막았다.
성마검이 놈의 발톱을 두부 자르듯 쉽게 자를 줄 알았는데 자르지 못했다. 단단한 바위에 막힌 것처럼 검날이 세차게 진동했다.
뭐야?
자세히 보니 은은한 빛이 드래곤의 발톱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러! 드래곤이 오러를 쓴다고?
신기하고 황당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 걸 다 익혔나보다.
슈웅!
그때 한줄기 빛이 놈의 손에서 뻗어 나와 유성우처럼 엄습했다. 나는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했다.
“이 따위 잔꾀 안 통해.”
그리고 즉시 성마검을 휘둘러 놈의 파충류 같은 눈을 노렸다. 검이 번개처럼 날아가 놈의 눈알을 향했다.
서걱!
눈알을 꿰뚫는 것엔 실패했지만 놈을 당황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드래곤이 크게 몸을 움찔거렸고 나는 그 틈을 먹이 삼아 즉시 은의검법을 펼쳤다. 검이 채찍처럼 거대한 몸을 쇄도했다.
서걱! 서걱!
칼끝이 붉은 비늘을 계속해서 훑고 지나갔다. 몸 전체에 오러를 둘러쌀 수는 없는지 이번에는 비늘이 갈라지고 피가 솟구쳤다.
-크악!
놀란 드래곤이 발악하면서 빛줄기를 쏘았다. 아까와 같은 디버프 마법인 듯했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렀는데 몸이 당연히 저항할 줄 알아서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빛이 몸에 흡수되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머릿속에서 몰아쳤고 나는 두통에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더 참지 못하고 내가 뒤로 물러서자 드래곤이 이죽거렸다.
-역시 먹히는 군.
“무슨 소리야?”
-즉사 마법은 안 먹혀도 다른 계통의 정신계 마법은 통한다는 소리다.
드래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 대화를 나누지.
“미친놈. 이제 와서 대화를 하자고?”
-난 네 놈이랑 더 싸우기 싫다. 그러나 지는 것도 싫다. 네 녀석에게 사용한 마법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기분을 향상시키는 정신계 버프 마법이다.
“어, 그러고 보니···.”
나는 적의가 사라지고 몸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 화가 가라앉고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 탓이었나?
-너처럼 강한 인간은 오랜만이군. 하마터면 내가 질 뻔했어.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럼 지금 상황은 네가 이겼다는 소리냐?”
-적어도 진 건 아니지.
나는 드래곤의 자존심에 대해 떠올렸다. 드래곤들은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지기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덧붙여 혼자동안 오래 살다보니 변덕이 심하고 성격도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냥 도마뱀이 아니라 사이코 도마뱀이었어.”
나는 어쩐지 김이 빠져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브레스에 당한 걸 생각하면 대화는커녕 백 번 갈아 마셔도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떠올렸다. 시련의 탑을 이용하는 게 먼저다. 놈에게 응징하는 건 시련의 탑을 이용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드래곤이 말했다.
-네 놈은 처음부터 탑을 이용하기 위해 내게 찾아온 건가?
“그래. 처음부터 말했잖아.”
-저기 있는 유선이 너를 안내해줬고?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흥미롭군.
드래곤은 파충류 같은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의문을 실어서 그 눈빛의 진위를 확인했다. 드래곤은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는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놈은 여전히 오만하고 방자했다.
내가 기습을 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전혀 없는 건가?
드래곤이 말했다.
“유선.”
“예, 홍미님.”
“나는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
“죄송합니다.”
유선이 고개를 넙죽 조아리자 드래곤이 웃었다.
“어떻게 보상할거지?”
“면목 없습니다.”
“이번에 바치는 구슬도 인간에게 빼앗겨서 허덕이고, 여러모로 문제가 크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유선이 어쩔 줄 몰라 하자 드래곤이 손가락을 딱 튕기고 나를 가리켰다.
“일단 저 녀석을 탑 안으로 쫒아낸 후 얘기하지.”
“예.”
나는 얘기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보고 잠자코 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드래곤은 나를 안내했고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시련의 탑은 겉모습도 후줄근했는데 안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바닥에는 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중간 즈음에 마법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다른 건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사용자의 능력치를 몇 배로 뻥튀기 시켜준다는 말과 달리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네. 이 마법진이 탑의 전부라고?”
내가 탑의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발로 툭툭 두들겼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모양은 단순하고 간단해진다. 이용가치에 딱 알맞은 모습인 거지.”
“발전한 문명일수록 효율을 내세운다는 건가.”
“일단 마법진 위에 올라가라.”
드래곤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이게 끝인가?”
“유선이 별도의 주문을 외워야지.”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시련의 탑은 정말로 수인 족들 밖에 운용할 수 없는 건가?”
“무슨 소리냐?”
“드래곤인 너도 모르는 건가 싶어서.”
“그래.”
내가 질문을 이었다.
“어째서지?”
“천외천의 존재들과 약속을 할 때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 다른 차원의 이주민들을 천외지에 기거하게 하는 대신 원주민들에게 강해질 수단을 만들어줬지.”
“그게 시련의 탑이고?”
“그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 다시 물었다. 확실히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시련의 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게 사실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제대로 말해라.”
“탑 안에서의 100년이 밖에서의 1분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드래곤은 즉시 대답했다.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외천의 괴물 같은 기술력에 침을 삼켰다.
그들은 사실 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런 탑을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는 마법진에 올라선 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있었다.
드래곤이 유선을 불러서 귓속말을 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감각을 집중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렸다. 아무래도 마법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드래곤이 말을 마치자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법진 앞에 서더니 마법진 위에 두 손을 얹었다.
푸른 불길이 그녀의 몸에서 솟구쳐 마법진 안으로 흡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