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우우웅.
불길이 잠들고 마법진의 글귀가 빛났다. 잠시 기다리니 더 이상 반응이 없다.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이제 다 된 건가?”
중얼거리며 몸을 푸는데 유선이 말했다.
“인간. 시련의 탑을 얼마나 이용할 생각이지?”
시련의 난이도 설정은 사용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신 같은 존재는 개뿔. 개떡같이도 만들어놨네. 내가 말했다.
“최고 난이도로.”
“최고 난이도?”
“그래. 가장 어렵게. 가장 힘들게. 가장 빡세게. 고구마 5억 개쯤 처먹은 느낌으로.”
유선이 침을 삼켰다. 황당하다는 눈초리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시련이 어려울수록 그만큼 더 강해질 수 있잖아.”
“그건 맞지만···.”
시련의 탑은 한번 밖에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른다. 다만 시련을 어렵게 설정할수록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리스에게 들은 정보다.
“시련은 장난이 아냐. 게임 같은 게 아니라고. 실패하면 넌 죽게 될 거다.”
“죽으면 어쩔 수 없지. 어··· 잠깐만.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건가? 조금 감동인데.”
유선이 정색했다.
“아니.”
“아쉽군. 네가 이타적인 수인인 줄 착각했어.”
“넌 정말 미친놈이야.”
그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미친 걸까?
“흐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데 걱정이 안 된다.
‘글쎄···.’
사실 반쯤 놓은 것 같다. 지금 상황이 다른 사람의 일처럼 붕 뜬 느낌이니까.
‘생각해보면 지구를 벗어났을 때부터 그랬어.’
나는 이곳 천외지에 온 뒤로 깨달은 바가 있다. 나는 약하다. 강하지 않다. 우물 안에서 막 벗어난 개구리 신세일 뿐이다.
우물 안에선 왕이었지만 우물 밖에선 한낱 개구리일 뿐이다.
약한 개구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밟혀 죽기 십상이다. 누군가의 고의가 아니더라도 죽을 이유가 너무 많다. 그러니 성장해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언제?
기회가 왔을 때.
드래곤과 싸우면서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는데 단번에 강해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이란 걸 믿는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순전히 내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근거 없는 믿음일지도 모르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설마 함정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을 풀며 말했다. 방금 전 이 두 년 놈들이 귓속말로 속삭인 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 함정이면 흠씬 두들겨 패주리라.
“그건···.”
유선이 말을 꺼내려는데 드래곤이 그녀를 밀치고 대신 나서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시련의 탑이 맞으니까.”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 말하니 왠지 찜찜하다.
“어이, 도마뱀.”
“말해라. 인간. 이번만은 그 불쾌한 입의 무례를 용서하지.”
나는 문득 내 부하 휴지가 떠올랐다. 드래곤도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힘이 강한 만큼 책임도 강하다. 휴지를 굴복시킬 때도 썼던 수단이 있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고 네 드래곤 하트에 맹세하나?”
드래곤은 거짓말을 못 한다. 특히 심장에 맹세를 한 말은 절대적으로 진실이다. 내 물음에 드래곤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간단히 말하는데? 설마 마법을 모두 잃을 각오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조금 안심이다.
드래곤이 말했다.
“인간. 준비는 모두 끝났나?”
표정을 보니 날 빨리 보내고 싶은 눈치다. 걱정거리를 사뿐히 날려줬는데 빨리 사라져주는 게 예의겠지.
“잠깐. 성마검 좀 회수하고.”
나는 바닥에 꽂힌 성마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계약으로 이어져 있기에 물리적인 접촉 없이 소환과 해제가 가능하다.
드드득.
성마검이 막 바닥에서 흔들리는데 드래곤이 제동을 걸었다.
“인간. 잠깐 멈춰라.”
또 무슨 용무지?
“한 가지 충고하지. 시련의 탑을 정상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면 그 검은 두고 가라.”
드래곤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왜?”
“네 검은 천외천의 물건. 시련의 탑은 오직 천외지 이하의 존재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천외천의 물건은 가지고 갈 수 없다.”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또 의심이 꽃핀다.
“만약 가지고 간다면?”
“최악의 경우 시련의 탑이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오류?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이냐? 녀석이 말하니 의심스럽다.
“날 속이는 건가? 방금 그 발언 네 심장을 걸고 맹세할 수 있나?”
“맹세하지.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지만 탑이 오류를 일으키면 시련을 이용하기도 전에 넌 죽을 거다. 신에 필적하는 기술로 다진 고기처럼 으깨지겠지.”
드래곤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나는 따지려다가 말았다. 이 새끼 심장 겁나 팔아대네. 어쨌든 맹세하는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좋아, 네 말을 믿지. 어차피 검술은 내 주력이 아니니까.”
나는 성마검을 향해 뻗은 손을 거뒀다. 성마검이 우뚝 멈춰섰다.
드래곤이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천외천의 물건은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
“어···.”
그러고 보니 정보분석기도 천외천의 물건이다.
결국 그런 거였나.
“처음부터 목적은 정보분석기였나?”
“어차피 탑에 들어가면 밖에서 들고 간 물건은 어떠한 것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넌 죽게 되겠지. 네가 안에서 죽으면 모든 물건들이 사라진다. 정보분석기는 소중해. 너는 분석기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어.”
놈은 내가 죽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만약 이대로 들고 가겠다면?”
“강요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니다. 천외천의 물건을 가진 상태로 시련의 탑을 이용한다면 탑이 오류를 일으킬 거고···.”
놈이 또 다시 두 손을 오므렸다가 폈다. 폭탄이 폭발하는 것 같은 세밀한 연출이다.
“···넌 죽게 되겠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맹세하나?”
“내 심장에 맹세코 거짓이 아니다.”
자존심의 생물 드래곤이 자존심도 버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꼴이라니. 놈의 심장팔이 짓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괜히 찜찜하다.
“좋아. 후딱 끝내고 돌려받으러 오지.”
나는 놈에게 정보분석기를 던지고 대기했다. 잠시 후 발밑의 마법진이 빛나고 푸른 빛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세상이 깜깜했다.
* * * *
“어리석은 인간이군.”
“그러게요.”
홍미의 말에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속일 필요도 없었어. 스스로 시련의 난이도를 최고 난이도로 이용하겠다니. 네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군. 그들이 남긴 금제를 깰 필요가 없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유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탑의 권한을 가지면서 대신 얻게 된 금제다. 탑의 관리자는 사용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로 탑을 가용할 수는 없다. 금제를 깨면 본인을 희생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최고 난이도로 탑을 이용하면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 정도지?”
홍미가 물었다.
“이곳의 시간으로는 일주일 정도. 탑 안의 시간으로는 수천 년 정도 될 겁니다.”
유선의 대답에 홍미가 탄성을 흘렸다.
수천 년. 그야말로 억겁의 시간이다. 열등한 인간이 버틸 리 없다.
“정신이 열악한 놈들이니 시련을 극복한다 해도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겠군. 멍청한 놈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어. 과한 욕심은 언제나 자기파멸을 불러일으키는데 왜 그걸 모를까.”
“그걸 알면 인간들이 아니지요.”
인간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에 솔직하다. 천외지에서 인간 대신 드래곤을 이용해 구슬을 모으는 이유가 그것이다. 천외지를 대표하는 강자는 인간인 주리스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놈의 물건들을 구슬로 환산하지.”
드래곤이 옅은 웃음을 흘리고 마법진을 쳐다봤다. 바닥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폭풍처럼 소용돌이쳤다. 저 소용돌이가 잠들면 끝날 것이다.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어째서인지 불안하다. 범상치 않았던 놈의 모습 때문일까.
‘살아서 돌아올 리는 없겠지.’
드래곤은 문득 다른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 * * * * *
색깔은 저마다 상징과 의미가 있다. 빨간색은 에너지와 생명을 나타내고 파란색은 지혜와 고독을 의미한다. 나아가 하얀색은 신성하다는 뜻으로 쓰이거나 창조의 의미로 쓰이지만, 검은색은 불길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죽음의 색이다.
그게 내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눈을 떴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새까만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서 고개를 숙여도 내 몸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참, 불안하게 시리···.’
한참을 지나도 반응이 없다. 설마 속은 걸까. 드래곤이 자기 심장을 쉽게 팔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맹세를 남발하는 드래곤이라니. 반쯤 미친 게 아니라면···.
우우웅!
그때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상형문자였다. 글자는 이내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바뀌었다.
[로딩 중···.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반쯤 미친 게 맞았군.’
오류 얘기가 나올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시련의 탑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듯했다. 초고도의 과학력. 어쩌면 마법과 합쳐진 다른 무언가의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파앗!
잠시 후 주변이 밝아졌다. 눈이 아플 정도로 쨍쨍한 빛이 쇄도했다. 게슴츠레 실눈을 떠보니 어느새 공간도 바뀌었다.
<환영합니다. 시련의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의 손님이시군요.>
발랄한 인사말과 달리 감정의 기복이 없어서 냉정하게 들린다.
어라? 탑 안에 다른 인격체가 있었나?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누구···십니까?”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앞으로 오랜 시간 함께 할지도 모르는데 착하게 굴어서 나쁠 건 없다.
<탑의 관리 시스템. AI 지니입니다. 제게는 존댓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플레이어님을 케어해 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가상의 인격이니까요.>
어어, 눈치가 빠른데.
“좋아. 지니. 반갑다.”
<저도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지니에게 내가 생각했던 시련에 대해 물었다. 지금까지의 흘러가는 풍상을 보자면 게임과 비슷할 것이다. 토벌, 퀘스트, 특정한 조건의 달성. 딱히 거부감이 없고 익숙하다.
“좋아. 일단 뭐부터 해야 하지?”
지니가 말했다.
<가장 먼저 시련의 탑에 대해 설명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런 건 스킵할 수 없나?”
<의무 사항입니다.>
흠, 어쩔 수 없군.
잠자코 있으니 지니가 이것저것 떠들어 댄다. 천외천의 존재들이 탑을 만든 원인과 이곳 천외지에 탑을 세운 이유. 대부분 드래곤에게 이미 들었던 정보다.
<···주은성 플레이어님께선 탑에 존재하는 1000단계의 난이도 중 999단계를 설정하셨습니다.>
“999단계? 나는 최고 난이도로 설정했는데?”
<실제 개발단계에선 최고 난이도를 1000단계로 기획했지만, 마지막 시련은 시련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설정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좋아. 그래서 시련이라는 게 정확히 뭐지? 뭘 해야 강해질 수 있는데?”
슬슬 조바심이 난다. 중요한 것부터 말해줘도 될 것 같은데.
<처음은 수련입니다. 이곳은 다른 차원과 독립된 공간. 단순한 수련만으로도 상당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그럼 수련 다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