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시련의 탑을 알게 된 후로 항상 탑의 원리가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 사용자를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 걸까. 몬스터를 잡아서 레벨 업을 할 때처럼 어느 순간 번뜩 강해지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이건 구식이잖아.”
첨단 문명의 도움을 받아서 수련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모래주머니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무쇠 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나? 생김새는 투박한데 엄청 무겁다.
<불평하지 마십시오. 성장의 길에 왕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노력이 곧 지름길이자 왕도입니다.>
“이건 노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에효, 됐다. 전지전능도 별거 없구만.”
나는 샌드백 앞에 멍청하게 섰다. 수련의 방식이 이렇게 단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동네에 있을 법한 허름한 태권도장 같은 곳에서 각종 기구들과 함께 서 있었다. 눈에 보이는 운동기구들은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업로드 된 지구의 정보를 토대로 최대한 효율적인 성장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효율적인 성장환경은 개뿔.
“정말 이런 걸로 강해질 수 있어?”
<시련의 탑은 완벽한 성장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퀄리티와 디테일은 완벽한데, 결과물이 완벽하냐 그거지. 자꾸 의심이 드는데.”
나는 왼발을 내딛고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을 있는 힘껏 때렸다.
쾅!
폭발음이 났다. 천장과 이어진 쇠줄이 철렁거리고 샌드백이 좌우로 흔들렸다.
확실히 운동을 한다는 느낌은 있는데.
평범한 샌드백이었다면 구멍이 뚫리다 못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힘이 어떤 제약을 받는 걸까? 아니면 이 샌드백이 특수제작된 걸까?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련의 탑은 하계의 존재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발판. 결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검증되어 있습니다.>
“좋아. 방식이 구닥다리라서 좀 깨지만, 결과를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언제든, 무엇이든 질문하십시오.>
스스럼없이 말하니 신뢰가 든다. 나는 가장 의심스러웠던 질문을 꺼냈다.
“천외천의 존재들이 왜 이런 성장 프로그램을 천외지에 제공한 거지? 그들과 이곳의 원주민들이 약속을 했다고 했잖아. 하지만 천외천의 힘이라면 굳이 약속을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드래곤이 말하길, 다른 차원의 이주민들을 천외지에 기거하게 하는 대신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시련의 탑을 줬다고 했다. 탑의 AI지니도 별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그 옛날 16세기 초 지구의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무분별한 악행을 자행했다.
원주민들과 협상은 없었다. 흑인들은 가축으로 취급되거나 노동력을 강요당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천외지는 식민지치고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자치권을 인정받고 생존권도 보장받았다. 시련의 탑 같은 성장 시스템으로 성장도 시켜준다.
의심이 든 것은 이 때문이다.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행성을 판매하거나 파괴하는 놈들이 손해 보는 행동을 한다고?’
말이 안 된다.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구슬의 확보를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그것뿐? 아닌 것 같은데.”
<천외지는 구슬이 생산되는 몇 안 되는 거주지 중 하나니까요.>
“구슬이 생산되는 거주지가 희귀한가?”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거주지들은 당신이 사는 지구 같은 곳이 대부분입니다. 구슬이 없는 거주지. 생명의 근원이 스스로 탄생한 땅. 발아되지 않은 씨앗들의 집.>
틀렸다. 지구에도 구슬이 있었다. 날 이곳으로 이끈 새하얀 구슬. 천외천의 놈들이 근원이라고 부른 구슬.
‘찝찝한데. 설마 이 성장 프로그램에 이상한 수작 같은 건 없겠지?’
나는 샌드백을 한 번 더 쳤다. 샌드백이 좌우로 크게 출렁거렸다.
이런 구식 운동기구에 특수한 기술이 적용돼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지구의 제네바 협약처럼 차원 단위의 특정한 생명체를 보호하는 협약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근원이 말하길 천외천에도 규칙이 있다고 했어. 우리 세계의 법처럼. 법에 저촉되지 않게 행동하는 건가?’
거기에 대해 물어 봤지만 AI는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수련이나 하십시오.>
언제든, 무엇이든 물어보라더니 갑자기 변덕이다.
* * * * * *
그날부터 시작된 수련은 의심병이 도질 만큼 단순했다. 하루에 정해진 만큼의 할당량이 있었고 그걸 만족하면 일일 수련이 끝났다.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따위의 간단한 것들. 샌드백을 치거나 줄넘기를 하거나,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도 있었다. 모두 상식 수준의 것들이다.
남는 시간에는 천마신공을 운용하거나 탄지공의 정확도 훈련을 했다. 구비된 목검으로 은의 검술을 연마하거나 붕권, 강권, 로우킥 따위의 체술도 빠짐없이 수련했다.
“정말 이런 걸로 강해질 수 있는 건가?”
몸이 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모종의 제약 때문인지 예전보다 힘들고 피곤하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탑의 특수성 때문인지 상태창을 볼 수 없다.
<플레이어님은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입니다. 탑에 들어오시기 전보다 약 20퍼센트 강해지셨습니다.>
“글쎄···.”
구체적인 수치를 말해줘도 의심이 든다. 바뀐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퍽!
샌드백을 때리자 묵직한 감각이 어깨를 타고 흘렀다.
확실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부터 주변의 운동기구까지. 변한 게 전혀 없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련에 임했다. 강해졌다면 변화가 있어야 정상이다.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의심이 사라질 텐데.
휴지를 소환할 때마다 마력이 부족하다라는 글귀가 뜨는 걸로 보아 시스템 능력을 잃은 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왜 상태창만 볼 수 없는 걸까.
“궁금한 게 있어, 지니. 이곳에서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상태창의 열람은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성장에 가장 효율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저 AI 지니가 인위적으로 열람을 제한했습니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이 녀석이 내 상태창을 제한했다고? 지니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었나?
<플레이어님이 원하신다면 풀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추천 드리지는 않습니다.>
“성장의 효율과 상태창을 제한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확실한 목표보다 막연한 목표가 성장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막연한 불안감은 생물을 성장시키는 원동력. 성장지표의 확인은 당신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곧 스스로 만족하고 나태해질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쓸데없는 분석이다.
“니가 제한하고 있다면 풀어줘. 나는 상태창을 보고 싶어.”
<원하신다면.>
지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상태창이 떠올랐다.
정말로 이 녀석이 내 상태창을 제한하고 있었구나.
<주은성>
레벨: 1000 (윤회+ 1)
[체력: 1269+] [감각: 378+]
[의지: 215+] [마력: 670+]
[미 분배 포인트: 0]
“어어···.”
나는 떠듬떠듬 놀랐다. 레벨 업을 하지도 않았는데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다. 지니의 말대로 모든 능력치가 20 퍼센트 정도 상승해있었다.
특히 의지 능력치와 마력 능력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단순히 가벼운 운동을 했을 뿐인데!
“아, 설마!”
그 순간 내 시선이 샌드백에 닿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기구들도 샌드백과 상태가 비슷하다. 오랜 기간 사용해서 낡고 헤져야 정상인데 비교적 멀쩡한 것이다.
내가 성장할수록 다른 것들도 같이 성장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변화를 느낄 수 없었던 거다. 내가 강해질수록 중력이나, 기압이나, 운동기구들의 내구성이 더 강해졌을 테니.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스킬의 확인에 나섰다. 과연 스킬들의 레벨은···.
[윤회 1] [붕권 37]
[로우킥 20] [강권 35]
···
[탄지공 52]
[천마신공 20] [천마비행술 11]
[은의 검법 14]
···
역시나!
능력치와 마찬가지로 스킬들도 파격적으로 성장했다. 운동에 필요한 기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환경이 내게 맞춰서 성장했나 보다. 중력부터 시작해서 마나의 분포까지. 내 성장에 가장 최적인 조건으로 말이다.
‘놀랍군.’
황당하고 기뻐서 멍청하게 서 있으니 지니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의 목적은 오로지 탑의 사용자를 성장시키는 것. 관찰자이자 조력자의 역할 뿐입니다.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상태창의 열람을 제한한 것에 대해 내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 확실히 불안하긴 하지.
순수한 의도를 떠나서 독단적인 판단이 거슬린다. 잘못된 판단으로 자칫 나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음부터 이런 건 내게 먼저 확인하고 실행해.”
<알겠습니다.>
지니에게 일갈하고 나는 다시 수련에 몰두했다. 의심이 사라진 만큼 주저하고 있을 틈이 없다.
‘수련 다음에 곧바로 시련이라고 했어.’
* * * * * *
퍼시픽림은 무쇠처럼 단단한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토했다.
“상황이 안 좋아. 이러다간 이번 분기에도 진급하기 힘들겠어.”
지구에 파견한 나달과 버켓이 연달아 죽고 책임을 졌다. 천외천을 관리하는 공관에 책임 비용으로 파란 구슬을 50개나 지불하고 자금 사정이 나빠졌다.
“괜히 유야무야 넘기려다가 일만 키워서···.”
경력에 흠집이 갈 것을 염려해 사건을 축소, 은폐 했다. 그 결과 책임 비용만 더 지불했다.
“제길, 내가 천외지 출신만 아니었다면 벌써 진급하고 이런 일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대개 그렇듯 진급은 순수한 능력 순으로 이루어지지 못 한다. 인맥이 필요하고 자금이 필요하다.
퍼시픽림은 천외천이 아닌 천외지 출신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소규모 그룹의 리더자리를 배정받았지만 그뿐이었다.
“망할 놈의 인맥 사회!”
생각하니 또 열이 뻗친다.
쾅!
보이지 않는 천장이 수십 년 째 머리를 막고 있었다. 천외천 출신들은 줄을 타고 잘도 올라가는데 그 혼자만 수십 년 째 제자리다.
“이러다간 이번에도 진급하긴 글렀어. 구슬이 부족해.”
적당한 입김과 배경은 이미 손을 써놨다. 문제는 든든한 후원자가 바라는 게 많다는 것. 잘 봐주십사하고 다리를 놓았는데 지금에서는 로비할 돈이 없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뭐지?”
“리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선 머리를 달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아가멤논. 그룹 인원들 중 유난히 신뢰가 가는 인물이다.
“무슨 일이지? 자네 오늘 쉬는 날 아닌가?”
“이것 좀 보십시오.”
아가멤논이 품에서 안경을 꺼냈다.
“음?”
자세히 보니 안경이 아니다. 눈에 익숙한 물건이다.
“이건?”
“버켓의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