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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85화 (85/127)

# 85

버켓이 살아생전 보여줬던 물건이 있었다. 정보분석기 MK2. 초록색 구슬을 10개나 주고 샀다고 죽기 전 자랑했던 물건이다.

“이걸 어디서 발견했지?”

“이번 암시장에 장물로 나온 겁니다. 초록 구슬 1개에 팔더군요.”

“장물!”

퍼시픽 림이 놀라서 소리쳤다.

암시장. 불법적인 무구들이 거래되는 뒷거래 시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버켓은 지구에 파견된 직후 정체불명의 죽임을 당했다. 지구에 있어야 할 고인의 물건이 저 스스로 천외천에 돌아올 리는 없다.

“역시 그랬어.”

나달에 이어 버켓까지 지구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퍼시픽 림은 생각한 바가 있었다.

동종 업계의 종사자가 자신의 그룹을 노리고 뒤통수를 친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당시엔 증거가 없어서 착각이라고 여겼다.

이젠 알겠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지만 누구지?”

퍼시픽 림은 한평생 적을 두지 않고 살았다. 언제나 겸손하게 행동했고 누구를 만나도 친하게 지낼 여지를 남겼다.

그가 겸손하게 행동한 것은 선천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천외지 출신으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도태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누가 내 뒤통수를 노린 걸까?”

“버켓이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달이 버켓보다 먼저 죽었어. 두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하계에서 죽었는데 개인적인 원한일 확률은 거의 없어.”

“그럼···.”

아가멤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해방군들의 소행은 아닐까요?”

“해방군!”

천외천은 천편일률적인 사회가 아니다. 다른 차원의 침략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부하고 회의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해방군들은 범죄자로 취급되는 걸 감수하면서도 하계 차원의 권리를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다른 차원을 침략해선 결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군. 나는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해방군들은 저열한 차원에 관심이 많았다. 지구처럼 최하층에 속하는 차원은 그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반동 놈의 새끼들! 신념 때문에 같은 천외천인을 죽여!”

“어떻게 할까요?”

“혹시 버켓의 정보분석기를 누가 들고 왔는지 알 수 있나?”

퍼시픽 림은 정보분석기를 가리키며 묻다가 저 스스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니지. 상인은 신용이 생명이잖아. 누구에게 물건을 받았는지 말하지 않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제게 연줄이 있습니다. 덕분에 정보분석기도 쉽게 구매할 수 있었죠.”

퍼시픽 림의 얼굴이 환해졌다.

버켓의 물건을 공급한 사람을 알아낸다면 그의 죽음에 감춰진 배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룹 인원들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면 공관에 지불한 막대한 책임 비용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당장 움직이지.”

* * * * * *

수련을 한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났다. 쉬는 시간을 줄여서 무리하게 움직였더니 온몸이 쑤시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전투식량처럼 생긴 비닐 팩을 종잇장처럼 찢었다. 칼로리 바와 흡사하게 생긴 음식이 나왔는데 한눈에 봐도 맛없게 생겼다. 으적으적 씹고 억지로 삼키니 토가 나올 지경이다.

“더럽게 맛없네. 이건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 지지가 않아.”

성장에 효율적인 환경을 조성해준다더니 이런 부분에선 빵점이다. 음식이 왜 이렇게 맛없냐고 지니에게 따졌는데 필수 영양소를 고루고루 섞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 이건 개밥인 거다. 아니, 지나가는 똥개도 이건 안 먹겠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복 수련을 지겹도록 해서 이제는 거의 작용-반작용 수준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쉴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싶고, 밥을 먹으면 수련을 하고 싶다.

나는 샌드백 앞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세차게 두들겼다.

퍽! 퍽퍽! 퍽퍽퍽!

경쾌한 타격음이 나고 샌드백이 좌우로 출렁거렸다. 이제는 주먹을 뻗기만 해도 어느 방향으로 흔들릴지 예상이 된다. 체술은 반복 숙달이 중요하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슬슬 몸을 풀고 있으니 지니가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로 수련은 종료입니다.>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뭐든지, 언제든지, 묻고 싶은 게 있을 때 물으라더니 정작 궁금한 질문은 계속 함구한다. 나는 따지려다가 화제를 돌렸다.

“이제 시련을 시작할 수 있는 건가?”

<네.>

처음부터 수련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탑에서 별도의 수련 기간을 내게 준 것은 내 성장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내게 적합한 시련을 계산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적합한 시련을 위한 계산이라···.

시련도 수련처럼 맞춤형으로 구비 되어 있는 걸까?

생각을 곱씹고 있을 때 주변이 어두워졌다. 진행이 빠르군. 탑에 발을 디뎠을 때 마주한 어두컴컴한 장소였다.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시련은 단계별로 강해집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련을 극복할수록 좋은 보상을 받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니가 시련에 대해 설명했는데 내 생각을 벗어난 점은 크게 없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처럼 단계별로 시련을 극복하면 된다. 클리어할수록 난이도가 성장하는 시스템이라서 게임처럼 단순하다.

“게임처럼 하면 된다는 거지?”

<비슷합니다. 플레이어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퀘스트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목표나 조건을 만족하면 클리어겠군.”

<정확합니다.>

잠깐 기다리니 주변 곳곳에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시련을 시작하는 건가.

<곧 시작합니다. 준비하십시오.>

잠시 후 지형지물이 바뀌었다. 시련이라고 생각해서 아마존 열대우림이나 수풀이 빽빽한 오지, 외딴 던전 같은 곳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잘 지어진 성 앞에 도착했다.

어어···. 이건 또 예상 못 했는데.

탑의 방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보다.

“몸은 좀 거슬리지만 이상은 없는 것 같고···.”

나는 목과 어깨,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수련을 할 때는 몸이 무거웠는데 여기선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중력의 세기가 엄청 약해진 기분인데.

“진짜 같이 잘도 만들었네.”

몸의 점검이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성된 환경이 눈에 띈다. 꼭 왕이나 황제가 기거할 만큼 웅장하고 커다란 성이다.

더럽게 현실적이네.

성 앞에 서서 고개를 치켜드니 성벽 위에 경계를 하고 있는 오크 병사들이 보였다. 깡통 같은 갑옷들을 입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데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인간이다! 인간들은 멸망한 게 아니었나?”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설마 마법사인 건가?”

“방어 마법진이 파훼된 거 아냐? 당장 확인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오크들이 전깃줄에 앉은 참새무리처럼 나를 보며 고함을 쳤다.

짹짹거리는 게 되게 시끄럽네.

입술에 솟아 있는 커다란 송곳니가 거슬릴 텐데 새는 발음도 없이 잘도 말한다. 내가 아는 ‘크취익’ 거리는 오크들보다 훨씬 영리해 보이는데 지능 덕분일까.

그때 유난히 비싼 갑옷을 입고 있는 오크가 소리쳤다.

“뿔 나팔을 불어라! 그리고 뭘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어!”

“어떻게 할까요?”

“인간 마법사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당장 잡아 와!”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가 말하자 굳게 닫혔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깡통 갑옷으로 중무장한 오크들이 창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빙빙 둘러서 나를 원형으로 에워쌌다.

오크들이 사람처럼 행동하니 신기하네.

잠자코 쳐다보고 있으니 치렁치렁한 로브를 입고 있어서 마법사처럼 보이는 오크가 선두로 나와서 말했다.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는데 관심이 가지 않는다. 내 정체를 묻고, 이곳에 온 목적을 묻고,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묻는다.

글쎄,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녀석들이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데. 뭐라고 대답할까.

잠자코 고민하고 있으니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시련의 목표입니다.>

▷목표: 오크 로드 토벌.

결정됐군. 적이다.

마법사 오크가 다시 물었다.

“침입자. 네 정체는 뭐지?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이제 대답할 거리가 생겼다.

“오크 로드 토벌.”

그 순간 오크 마법사가 마나를 이용해 창을 만들어 내게 던졌다. 오크 주제에 마나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나는 성장한 몸의 내구성을 테스트할 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줬다.

툭.

날카로운 생김새와 달리 마나의 창은 내 몸에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오크 마법사가 놀라서 떠듬떠듬 소리쳤다.

“어, 어, 어, 어떻게···.”

“예의범절이 굉장하네.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어.”

“이쪽의 인간이 아니다! 마족이다! 모두 공격하라!”

마족?

놈이 외치자 나를 에워싼 오크들이 창을 내질렀다. 나는 몸을 비틀어 가뿐히 피하고 체술로 반격했다.

퍽!

대충 때렸는데 얻어맞은 마법사의 코뼈가 함몰됐다. 주먹에 맞은 마법사는 코뼈가 얼굴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쉬지 못하고 절명했다.

“오크 로드가 누구지?”

말이 통하는 생명체는 힘을 보여주면 고분고분 말을 잘 듣기 마련이다. 지능이 있는 존재라면 대개 잘 먹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곳의 오크들은 아니었다. 다른 오크들과 달리 지능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 통할 줄 알았는데 명예를 들먹이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비협조적이라면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판단을 내리고 주변의 오크들을 모두 죽이니 하늘에서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공중제비를 돌아서 피하고 탄지공으로 대응했다. 빛의 줄기가 점점이 날아가 오크 아처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픽! 픽! 픽!

일렬로 서 있던 아처들의 머리가 순서대로 구멍이 났다. 체술 훈련을 하면서 틈틈이 탄지공 훈련을 했는데 훈련을 한 보람이 있었다.

“겁먹지 마라! 놈은 혼자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우리다!”

그때 오크 하나가 포효를 하듯 소리쳤다. 가만 보니 아까 눈에 띄었던 유난히 비싼 갑옷을 입었던 오크다.

“네 녀석이 오크 로드군.”

나는 천마비행술로 날아서 놈의 앞으로 다가갔다. 놈이 놀라서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헉!”

나는 망치질을 하듯 주먹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놈의 머리가 어깨 안으로 파고 들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시련 완료.

이놈이 진짜 오크 로드였나? 첫 시련이라서 그런지 따분할 정도로 싱겁다.

<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님. 첫 시련을 완료하셨습니다. 성공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획득: 초록색 구슬 1개.

어어. 보상이 구슬이다. 그것도 무려 초록색 구슬.

이건 또 예상 밖의 전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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