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구슬을 섭취하면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 천외지에 오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구슬이 여기서 화폐로 쓰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처음 천외지에 발을 디뎠을 때 빨간색 구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몬스터를 죽이고 우연히 빨간색 구슬을 얻었는데 역한 냄새(썩은 피 냄새)가 나서 먹기를 포기했었다.
그 다음은 돈인족과 시비가 붙어서 주황색 구슬을 얻었고 궁금해서 섭취해 봤다. 먹는 노력에 비해(토악질을 꾹 참고 먹었다) 경험치가 너무 적게 올라서 실망이 컸다.
이번에 얻은 초록색 구슬은 달랐다.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품질관리를 한 것처럼 먼지 한 올 묻어있지 않았고 표면에 윤기가 좔좔 흘렀다.
한 번 먹어볼까.
주리스는 아르카디아가 초록색 구슬 7개에 팔렸다고 했다. 구슬을 보관하고 있으면 지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구슬을 보관할 수단이 없다. 먹지 않으면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나는 생각했고 곧 판단을 내렸다.
첫 시련부터 초록색 구슬을 얻었어. 앞으로 더 얻을 수 있을 거야.
구슬을 삼키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1000 ▷ 1010
“어어···!”
나는 잠깐 멍해졌다.
레벨 1000이 만렙이 아니었나? 더 높은 레벨이 있었어?
지금까지 몬스터를 잡아도 더 이상 레벨 업이 안 됐다.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었고 성장의 한계에 맞부딪혔다. 하지만 초록색 구슬을 먹으니 단번에 레벨 업이 됐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경험치 양이다.
“하나를 먹었을 뿐인데 레벨이 10이나 오르다니···.”
내 혼잣말에 지니가 반응했다.
<플레이어님의 성장치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내 성장치가 높다고?”
“예. 중위에 있는 구슬부터는 사용자의 강함에 비례해서 성장치가 증가합니다.>
강함에 비례해서 증가한다니.
”강한 사람이 먹을수록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맙소사. 이거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나는 당황한 속내를 감추고 재차 물었다.
“그럼 중위에 있는 구슬은 또 뭐지? 분류를 할 때 쓰이는 하위, 중위, 상위를 말하는 건가?”
<정확합니다. 빨간색과 주황색은 하위 차원의 구슬, 노란색과 초록색, 파란색은 중위 차원의 구슬입니다. 구슬은 태초의 파장에 따라 효율이 다르고 파장의 순서에 따라 효율이 더 좋습니다.>
“그럼 상위 차원의 구슬은?”
<남색, 보라색 구슬입니다. 상위 수준의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구슬로 중위 차원의 구슬보다 월등히 효과가 좋습니다.>
“시련을 극복하면 상위 차원의 구슬도 얻을 수 있나?”
<플레이어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라면 가능할 것 같다고?”
<탑의 시련은 사용자의 성장치에 따라 부과됩니다. 첫 시련부터 초록색 구슬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시련을 시작하기 전 계산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었다.
역시 사용자에 따라서 시련이 다르구나.
같은 시련을 겪어도 성장의 폭이 다르다니.
게다가 보상이 구슬이라니. 어쩐지 웃기다. 여기는 구슬이 전부인 세상인가.
“혹시··· 하얀색 구슬···. 아니, 아니다.”
물어보려는데 왠지 찝찝하다.
나는 하얀색 구슬에 대해 질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 * * * * * *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련은 놀라울 만큼 같은 내용이었고 반복적이었다. 퀘스트처럼 목표가 있었고 목표를 달성하면 구슬을 줬다.
▷획득: 초록색 구슬 1개.
▷획득: 초록색 구슬 3개.
▷획득: 초록색 구슬 5개.
···
처음 오크들의 문명을 봤을 때도 신기했는데, 트롤과 오거들이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니 황당할 지경이다.
놈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고 놀랐고 기겁했고 그러다가 공격했다. 목숨이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대개 무지에서 나오는 위험이었다. 능력 차이로 인한 위험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데 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미개한 문명이 있는 반면 지구처럼 발달한 수준급 문명도 있었다. 나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말을 하는 오거들을 보며 황당했지만 묵묵히 시련을 완료해 나갔다.
시련은 하나를 마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시련이 시작됐다. 대부분 적지 한복판에서 시작하게 되니 쉴 틈이 없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씻고 싶고, 쉬고 싶고, 숨을 좀 돌리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 맛없는 식사마저 나오지 않아서 음식도 현지조달 해야 했다.
“휴지가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휴지는 아직도 마나부족으로 소환할 수 없었다.
실용적인 마법을 배우지 않은 게 후회가 된다. 시련이 이렇게 전투지속능력을 요구할 줄 알았다면 탑에 오기 전, 제대로 배워두는 건데.
▷시련 완료.
▷획득: 파란색 구슬 1개.
나는 또 다시 시련을 완료하고 구슬을 얻었다. 시련의 난이도가 올라감에 따라 보상이 파란색 구슬로 늘어난 상태였다.
잠시 후 다음 시련에 진입하고 구슬을 쳐다보고 있으니 피처럼 붉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이 새 빨갛네. 이번 시련의 컨셉은 지옥불인가.”
보통 시련에 진입하면 성문 앞 혹은 건물 앞 혹은, 궁전 앞이나 황궁 앞, 가끔은 도시 같은 번화가에서 시작했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처럼 행동하는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했다. 놈들은 나를 신기한 동물이나 혹은 침입자로 여기며 대화를 시도하거나, 구경하거나, 납치를 시도하거나, 무작정 공격을 했다. 이런 정해진 패턴 탓인지 시련의 목표도 정해져 있었다.
특정 생명체의 토벌 또는 전 생명체 몰살.
그런데 이번 시련은 좀 이상하다. 몬스터가 안 보인다. 게다가 하늘만 지옥 같은 게 아니라 땅도 지옥 같다. 나무는커녕, 사막처럼 마른 대지 위에 풀 한 포기 없어서 분위기가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이번 시련은 목표가 뭐지?”
▷ 오거 1마리 토벌.
“오거 1마리··· 토벌?”
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지금까지의 규칙을 보자면 시련은 날이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오거 1마리 토벌하라니.
“쉬어가는 보너스 타임인가?”
어쩌면 그럴 수 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까.
나는 천마비행술로 하늘을 날았다. 사막처럼 넓은 대지 위에서 오거 1마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날았는데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있군.”
밀가루 반죽처럼 넓게 퍼진 마른 땅 위에 초록색 덩치가 먹음직스럽게 서 있다.
나는 내력을 뿜어서 총알처럼 날아갔다. 가까이서 쳐다보니 오거의 덩치가 예사롭지 않다.
“어어···. 이 새끼 이거, 평범한 오거가 아니잖아.”
몸집이 괴물처럼 컸다. 곰보 같은 얼굴은 달의 표면처럼 흉측했고 커다란 몸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수호목처럼 옆으로 퍼진 주제에 위로도 컸다. 심지어 놈의 손가락이 내 몸집만 해서 괴물이란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어이, 괴물.”
나는 놈을 불렀다.
“여기는 너밖에 없나?”
시련의 몬스터들은 대개 말이 통했다. 목표가 몰살이 아닌 경우 현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음식이나 필요한 물품을 현지조달 했다.
“···구슬.”
“구슬?”
“구슬 냄새가 난다.”
“구슬을 아는구나?”
시련이 갈수록 가관이군. 꼭 가상이 아니라 현실 같단 말이지.
나는 방금 전, 시련을 완료하고 얻은 파란색 구슬을 흔들어 보였다.
“먹을 걸 주면 이걸 주지.”
당연히 진짜로 줄 마음은 없다.
“구, 구···슬을 내놔.”
“먹을 게 먼저야.”
“구슬···을 줘.”
말은 통하는데 대화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놈이 대뜸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휘둘렀다.
파직!
음속을 돌파하는 채찍 끝부분처럼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커다란 주제에 빠르기도 엄청 빠르네.
나는 상체를 비틀어 피하고 놈의 팔꿈치를 가격했다. 마음 같아선 턱을 갈기고 싶은데 덩치가 너무 커서 일단 보이는 곳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참이다.
틱!
예상과 달리 약한 타격음이 났다. 꼭 당구 채가 미스난 것처럼 불길한 소리다.
퍽!
천마신공을 실어서 때리자 그제야 원하는 소리가 났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몬스터와 다르다. 평범한 오거가 아니다.
“크워어어어!”
놈이 고통스러운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붕붕 휘저었다.
정형화된 공격이 아니야.
가볍게 피하고 반격을 하려는데 놈의 팔이 갑자기 네 개로 늘었다. 나는 황당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어··· 이 새끼 이거, 진짜 괴물이었잖아.”
놈이 다시 주먹을 휘두르는데 이제 팔이 네 개로 늘어나서 아까보다 더 매섭다. 거의 풍차돌리기 급이다.
나는 기회를 봐서 공격했고 기어코 놈의 명치에 붕권을 먹여줬다. 내력을 상당히 실어서 때렸기에 놈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해치웠나?”
마법의 문장을 말하자마자 놈의 몸이 슬라임처럼 수복됐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나는 놈과 상당히 고전하면서 싸웠고 결국에는 놈을 죽였다. 탄지공을 최대출력으로 사용해서 단번에 놈을 녹였는데 마력 소모가 상당했다.
‘위험하지는 않은데 애를 먹이는 군.’
이런 식이면 위험하다. 다음 시련에서 여유가 없다면 누적된 피로가 나를 좀 먹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시련 완료의 알림이 떴다.
▷시련 완료.
▷획득: 남색 구슬 1개.
맙소사. 파란색 구슬이 아니라 남색 구슬이 나왔다. 역시 이번 시련이 분기점이었나?
“남색 구슬이 상위에 속하는 구슬이었지?”
<그렇습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슬을 삼켰다.
* * * * * *
드래곤은 오래 사는 종족이다. 벽에 똥칠을 하다 못 해, 똥으로 벽을 만들 때까지 오래 사는데 덕분에 고질적인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 만성적으로 느끼는 지루함. 그것이 문제다.
대개 할 일 없는 드래곤은 100년, 200년, 세기가 바뀔 때까지 수면을 취한다. 그들은 그걸 동면이라고 불렀고 자고 싶을 때 자거나 기간도 임의로 정할 수 있었다. 순전히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드래곤에게 수면이란 친숙하고 익숙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며 당연한 것이었다.
레드 드래곤 홍미 또한 불면증을 모르고 살았다. 며칠 전 까지는.
“······.”
벌써 며칠이 흘렀다. 잠을 자려는데 잠이 안 온다. 마법진에서 솟구치고 있는 소용돌이가 신경을 긁고 있었다. 탑에 들어간 인간이 죽지 않고 시련을 계속 돌파하고 있다는 뜻이다.
“유선.”
홍미가 부르자 까마귀 수인 족 여성이 다가왔다.
“예. 홍미님.”
“인간이 탑에 들어간 지 며칠이나 흘렀지?”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로 4일째입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착각이 아니다. 뒷골이 선득했다.
“4일이나 버틴 놈들이 많았던가?”
“드문 일로 알고 있습니다.”
“내 기억이 틀리길 빌었는데···.”
망각을 모르는 드래곤의 기억이 틀릴 리 없다.
“시련이 끝나기까지 약 3일 정도 남았군.”
“예. 그 정도 남았을 겁니다.”
홍미는 혀를 찼다.
“불길해.”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보면 보통 인간이 아니었어. 성마검에, 정보분석기에···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어.”
드래곤은 이성적인 종족이었지만 레드 일족은 예외였다. 화가 나면 불같은 감정이 일어나서 자꾸만 옳은 판단을 놓친다.
주은성이 맡긴 물건들은 이미 처분했다. 안면을 트고 있는 천외천인에게 싼값에 넘겼다. 뒷생각을 하지 않고 팔았는데 망자의 물품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미가 말했다.
“인간이 시련을 완료할 수 있을까?”
불안해서 자꾸 목이 움츠러든다. 인정하기 싫지만 주은성과 싸우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탑에 들어가기 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시련을 겪고 나면 얼마나 강해졌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탑에서 살아나온다면 얼마나 강해져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선의 회피성 대답에 홍미는 확신이 들었다.
“대책을 마련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