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대책이라면···?”
“동족들을 만나야겠다.”
홍미가 몸을 일으켰다. 레드 드래곤의 동족이라면 같은 드래곤 뿐이다.
“지금 가실 겁니까?”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지.”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홍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여기서 탑과 저 계집을 지켜라.”
홍미가 레어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토끼 수인족 알라샤가 있었다. 은성이 홍미와 싸우면서 입구에 옮겨뒀는데 그녀는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가지 않고 또 다시 레어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홍미에게 붙잡혔다.
“이번 일은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제 책임이 큽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해라.”
“하지만···.”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홍미는 유선에게 일갈하고 손을 휘저었다.
잠시 후 푸른 포탈이 생겨나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홍미는 다른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을 부려서 동족들을 불렀다.
* * * * * *
상위 구슬은 중위 구슬과 달랐다. 효율만 다른 게 아니었다. 성장치가 증가하는 방식도 달랐다.
망설이지 않고 남색 구슬을 삼켰는데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상했다. 마치 먹으면 안 되는 독약을 삼킨 것 같았다.
어어···, 이게 왜 이러지.
나는 예상치 못 한 상황에 얼이 빠졌다. 갑자기 명치와 옆구리가 시큰거렸다.
뭐야, 이 고통은!
구슬을 먹고 고통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오장육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속이 뒤집어졌다.
“으아아악!”
나는 고함을 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덥지도 않은데 땀이 줄줄 흐르고 춥지도 않은데 오한이 들었다.
피부는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 해 김이 났고 온몸의 솜털이 가시처럼 곤두섰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퍽! 퍽! 퍽!
맨땅에 이마를 수차례 찧자 그제야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지니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상위 구슬에는 부작용이 있는 거냐!”
지니는 구슬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단순히 어느 게 더 좋고, 어느 게 덜 좋고, 구슬의 상대적 가치를 알려줬을 뿐이다. 어쩌면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강함에는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상위 구슬은 단순히 섭취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흡수할 수 없습니다. 성장치를 직접 흡수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아파서 돌아버릴 것 같다.
<플레이어님에게 친숙한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상위 구슬은 영약과 비슷합니다. 스스로 흡수하셔야 합니다. 스스로 흡수하지 않아도 성장은 되지만 흡수되는 성장치가 적고 오랜 시간 고통이 수반됩니다.>
“···뭐! 영약?”
<예.>
“이런 제길···. 그걸 왜 이제야···.”
<묻지 않으셨으니까요.>
“이런 미친!”
나는 과거 지구에서 영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자칭 천마신교의 교주를 혼내주고 천마신공을 비롯해서 각종 영약을 빼앗았는데 몇 개는 주아랑과 박은애에게 나눠주고 몇 개는 내가 섭취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영약들과는 레벨이 다르다. 차이가 너무 커.’
기운은 비슷하지만 크기가 달랐다. 그때의 느낌이 잔잔한 바람이라면 지금은 마치 몰아치는 태풍 같다. 거대한 기운이 몸 안에서 사방팔방 날뛰고 있다.
‘이대로는 안 돼.’
머리가 어지럽다. 심한 멀미를 할 때처럼 몸을 가누기 어렵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판단을 내렸다. 가만히 버티고 있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기운을 다스려야 한다. 일단 운기라도 해보자.’
나는 고통을 억누르고 천천히 천마신공을 운용했다.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게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웅.
몸의 내부에서 들끓는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은 머리 위로 솟구쳤다가 발끝으로 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얼굴과 발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기운을 조종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내력을 이용했다. 들끓는 기운을 천마신공의 내력으로 감쌌는데 예상과 달리 흡수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은 성난 황소처럼 날뛰었다. 덕분에 나는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쿨럭.”
토한 피가 새까맣다. 사혈(死血)이다.
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날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나는 무공에 조예가 없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얻은 감각과 시스템의 능력을 십분 활용했을 뿐이다.
막연히 내력을 끌어모아서 기운을 감싸면 흡수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기운은 더 열심히 발광했고 내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미친개처럼 움직이는데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다.
“쿨럭!”
또 다시 피를 토했다. 목구멍이 따끔따끔 부어올랐다.
지니는 스스로 구슬을 흡수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성장치가 증가할 거라고 말했다. 꾹 참고 있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냥 꾹 참고 있는 수밖에 없는 걸까.
···!
그때 감은 눈꺼풀 밖으로 빛이 번쩍하더니 사라졌다. 이를 악물고 실눈을 떠보니 주변이 바뀌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목표: 오거 로드 1마리 토벌.
아까와 같이 하늘은 붉고 땅은 죽어 있다. 흡사 지옥같은 광경. 더군다나 풀 한 포기 없는 지평선 위로 저 멀리 생명체가 보였다. 거대하고 괴기스러운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융통성이 없어.
이럴 때는 기운을 흡수할 때까지 좀 기다려줘야지!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기운을 갈무리하는데 집중했다.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우우웅.
그 순간 갑자기 내 몸 안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생겨나 배꼽부근에 자리를 잡고 모였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면 위로 솟구친 미지의 기운에 집중했다.
어어···, 이건!
나는 눈을 한껏 치켜 떴다. 몸 안에 잠들어 있는 기운을 파악했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던 걸까. 일단 천마신공으로 얻은 내력은 아니었다. 익숙하고 친숙한 기운. 그러나 백지처럼 하얗고 맑은 물처럼 순수한 기운이었다.
나는 이 기운을 알고 있었다. 천외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소원석!
하얀색 구슬의 기운. 소원석의 기운이 분명했다.
이게 왜 내 몸 안에 있지?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천외지에 오기 전, 소원석은 내게 ‘본심대로 행동하라’는 말을 전하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갈라진 구슬의 틈새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사라진 게 아니었나? 내 몸 안에 흡수된 거였나?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한시가 급하다.
나는 기운을 가라앉히는데 소원석의 기운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생각한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소원석의 기운은 내 의지대로 잘 움직였다. 마치 내 수족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소원석의 기운으로 들끓는 기운을 집어삼켰다. 천마신공의 내력을 움직였을 때처럼 들끓는 기운을 감싸고 반응을 살폈다.
이번에도 반발이 일어날까?
숨을 참고 대비 하는데 느껴지는 고통이 없다.
어어!
나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놀랍게도 들끓는 기운이 잠잠했다. 심지어 내 의지에 따라 수족처럼 잘 움직인다.
그러더니 소원석의 기운에 흡수되고, 잠시 후 내 몸 이곳저곳에 흡수됐다.
소원석의 기운을 이용하는 게 정답이었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 안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태양이 내 몸속에 있는 것 같다. 무지막지한 충족감이다.
숨을 몰아쉬고 이마의 땀을 닦는데 알림이 떠올랐다.
[능력치가 증가했습니다.]
체력 1418 ▷ 2236
감각 578 ▷ 1089
의지 359 ▷ 790
마력 890 ▷ 1411
내 눈이 저절로 치켜 떠졌다.
“어, 어어···! 뭐야! 이렇게나 증가한다고···!?”
지금까지 시련을 극복하면서 올린 성장치보다 훨씬 많이 올랐다. 말이 안 되게 올랐다. 이건 거의 치트수준이 아닌가.
지니도 놀란 눈치다.
<당신은 도대체···! 구슬을 부작용 없이 온전히 흡수하시다니···!>
뭐? 부작용?
나는 황당해서 반응했다.
“부작용이라고?”
인공지능도 말실수를 하나?
“구슬에 부작용이 있었나?”
대답이 없다.
“왜 사전에 안 알려줬지?”
<······.>
여전히 말이 없다.
“그래, 평생 닥치고 있어.”
침묵이 오히려 정보가 됐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니가 묻는다고 순순히 알려줄 리 만무하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지니는 더러운 속내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걸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호기심을 풀 때가 아닌 것 같고.’
“크르르르···.”
어느새 오거 로드가 열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방금 전 시련에서 죽인 오거와 같이 덩치가 산처럼 컸고 얼굴은 훨씬 더 흉측했다. 피부 색깔이 죽은 사람처럼 푸르딩딩한 게 미적으로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덤벼. 못난아.”
나는 숨을 가다듬고 손짓을 했다. 남색 구슬을 흡수한다고 온몸이 쑤셨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낫다.
빨리 처리하고 숨을 돌려야지.
내 도발이 끝나기 무섭게 놈이 달려왔다. 새까만 때가 묻어서 더러운 손톱이 내 목을 노렸다.
팟.
나는 뒷걸음질로 피하고 생각했다.
덩치가 엄청 큰데. 일단 눈높이를 낮춰야겠어.
나는 놈의 거대한 몸을 꿇리기 위해 로우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내 발이 총알처럼 쏘아져 놈의 통나무 같은 장단지를 타격했다.
펑!
그런데 타격음이 좀 이상하다. 퍽이나 뻑이나 빠각 같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라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어어···.”
한 방에 죽을 줄은 몰랐는데.
단순히 발길질을 했을 뿐인데 놈의 하반신과 상반신 일부가 터져버렸다. 피가 사방에 흩날리고 놈의 장기가 밀가루반죽처럼 쏟아져나왔다.
“구슬··· 구슬을 줘. 내, 내게 구슬을 줘···.”
오거 로드는 선발주자가 그랬던 것처럼 구슬타령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소름이 끼친다.
“설마 구슬의 부작용이 이건가?”
괴물로 변하는 것.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시뮬레이션이다. 현실이 아니라 탑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시련의 일부다. 구슬의 부작용을 보여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설마···.”
* * * * * *
천외지에서 가장 넓은 레이어드 산맥. 몬스터들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그곳에 세 남자가 모여 있었다.
홍미, 청미, 백미.
그들의 정체는 각각 레드 드래곤, 블루 드래곤, 실버 드래곤이었다.
블루 드래곤 청미가 말했다.
“뭐지? 홍미.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른 거냐?”
실버 드래곤 백미가 말을 받았다.
“설마 구슬이 벌써 다 모였나? 작전을 실행할 때가 왔나?”
레드 드래곤 홍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