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문제가 터졌다.”
“문제?”
실버 드래곤 백미가 고개를 갸웃 숙였다.
“하계 차원의 인간이 시련의 탑에 들어갔다.”
“그게 왜 문제라는 거지?”
“주리스 만큼 강한 인간이다.”
청미와 백미가 두 눈을 치켜떴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주리스 만큼 강한 인간이 또 나타났다고?”
홍미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를 불렀구나!”
블루 드래곤 청미는 힘이 빠져서 고개를 숙였다. 주리스가 탑에 들어가서 크게 성장한 후로 드래곤은 그들의 입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탑의 이용금액을 올리고 탑의 이용을 막았다.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일석이조의 방법인 셈이다.
청미가 말했다.
“어느 정도로 강한 인간이라는 거냐? 설마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가?”
“나와 비슷한 정도였다.”
“아···. 너와 비슷한 정도였다고?”
청미는 황당해서 얼굴을 구겼다. 레드 드래곤은 일족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족속이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 따위가 그런 레드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말이 안 된다.
“잠깐만. 그런 인간이 시련의 탑에 들어갔다고 했잖아?”
백미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 인간이 어느 수준의 시련을 선택했지?”
“최고 난이도.”
“최고 난이도?”
백미의 얼굴이 청미와 마찬가지로 구겨졌다.
“농담이지?”
“농담이 아니다.”
순간 서릿발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청미와 백미는 홍미의 눈을 살펴보고 진위를 판단했다.
레드 드래곤은 선천적으로 장난기가 없다. 성격도 지랄 맞고 이기적이며, 독선적이다. 그럼에도 청미와 백미는 지금 상황이 꼭 그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여겨져서 현실감이 없었다.
청미가 말했다.
“지금 상황과 우리를 부른 이유를 보자면 그 정도 수준의 인간이 꼭 최고 난이도의 시련을 극복할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
홍미가 잘라 말했다.
“맞아. 그것 때문에 너희를 부른 거다.”
청미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레드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의 인간이 시련을 극복한다니. 그것도 최고 난이도다. 그런 인간이 최고 난이도로 시련을 극복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해질지 예상할 수 없다. 지금 천외지의 관리장이 된 주리스조차 시련의 끝을 보지 못했다. 평범함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의 시련을 극복했을 뿐인 것이다.
“인간이···, 그것도 우리와 대등한 수준의 인간이 탑의 시련을 최고 난이도로 극복한다고?”
“황당하겠지만 진실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잠자코 듣고 있던 백미가 말했다.
“그래서 그 인간에 대한 정보는?”
“수인 족을 이끌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정체는 나도 몰라. 예상하기로 천외천 놈들에게 행성을 파괴당하고 이주해온 놈이겠지.”
“새로운 놈들이 이주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어. 그 인간 성격은 어때? 고향을 잃은 평범한 이주민들처럼 분노에 휩싸여 있었나?”
“이상할 정도로 냉정하고 걱정이 없어 보였다. 오직 시련의 탑을 이용하려고만 하더군.”
청미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그러면 왜 그렇게 걱정하지? 주리스처럼 과격분자가 아니라면 단순히 구석에 박혀 있다가 조용히 천외천으로 갈 놈일 수도 있잖아?”
얼마 전만 해도 시련의 탑에서 성장한 이들이 천외천으로 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수를 위해서, 진실을 알기 위해서, 불합리한 일을 더 이상 겪지 않기 위해서. 이유는 많았지만 그들이 천외지에 해를 가지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에 구슬을 두고 사소한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놈과 싸우게 됐지. 하지만 싸울수록 점점 이상한 걸 알게 됐지. 놈은 성마검과 정보 분석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양새만 똑같이 만든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더군.”
백미가 소리쳤다.
“성마검! 정보 분석기!”
청미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 숙이고만 있었다.
“정보 분석기는 알겠는데 성마검은 뭐지?”
“너처럼 어린 용은 잘 모르는 거다.”
백미가 훈수를 두듯 말하자 홍미가 목청을 가다듬고 계속 말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어쩌면 천외천에서 폭탄을 날린 것일지도 몰라.”
“우리의 작전을 눈치챈 걸까?”
“그건 아닐 거다. 아마도··· 그냥 이 행성의 파멸 시기가 도래한 거겠지.”
홍미는 시련의 탑이 세워질 당시를 떠올렸다.
시련의 탑은 천외천인들이 그저 선물로 준 탑이 아니다. 일종의 폭탄이다. 탑이 가동되면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소멸 되고 구슬만 남게 된다. 그리고 폭탄의 타이머를 가동한 자는 괴물이 되어 행성의 구슬을 수거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행성에 있는 탑의 사용자가 파괴된 행성의 괴물을 죽이고 그가 수거한 구슬을 천외천에 보내지.”
그 대가로 구슬의 일정 비율을 정산받는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모른다. 그마저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알아낸 정보일 뿐이다. 가설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둔 바가 있나?”
백미가 물었다.
“너희들을 부르기 전 스스로 많은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지금이 고대의 유산을 사용할 때인 것 같다.”
백미가 바로 제동을 걸었다.
“구슬이 아직 덜 모였을 텐데?”
“인간 하나 처리하는 데는 충분해.”
“그를 처리하고 나면?”
“운이 좋으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지금까지 노력해온 대업을 운에 맡기자는 건가?”
“선택지가 별로 없다.”
청미가 눈알을 굴리는 가운데 백미는 생각했다.
변수는 적을수록 좋다. 없는 게 최선이지만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의 길도 있다. 하지만 변수를 처리하는데 노력의 결실을 사용하는 게 영 찜찜하다. 게다가···.
“이건 어쩌면···.”
백미가 입을 열었다.
“사실 고대의 예언이 사실이었던 게 아닐까?”
“고대의 예언?”
청미가 의문을 표하자 홍미가 일갈했다.
“그건 고대의 전승이 아니다. 노망난 용의 헛소리였을 뿐.”
“하지만 상황과 시기가 적절한데.”
청미가 말했다.
“고대의 예언이 뭐지?”
“너처럼 어린 드래곤은 모르는 얘기다.”
홍미 대신 백미가 나서서 대답했다.
“로드가 돌아가시기 전 유언처럼 말하셨던 예언이 있었어.”
“무슨 내용인데?”
“시조 드래곤이 일족을 위해 대대로 남긴 예언이었지. 토막을 잘라 말하자면 드래곤보다 강한 인간이 나타나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준다는 내용이었어. 레드와 나, 블루만 남은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인간이 나타난 시기도 그렇고, 이건 어쩌면···.”
막상 위기가 도래해서 시련의 탑이 세워지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예언이다. 백미가 계속 말했다.
“그럼 탑에 들어간 그 인간의 정체가 설마 이곳 천외지를 구해줄···.”
“허튼소리 그만해라.”
홍미가 말을 자르고 경고했다.
“예언을 믿었던 놈들은 모두 죽었어.”
“그건 죽은 게 아니라 일족을 위해서 용감하게 희생한 거지.”
“게다가 그 예언의 앞부분에는 다른 내용도 있었다. ‘반편이가 끌고 온 인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백미가 말을 받았다.
“예언에는 우리가 고대의 유산을 그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말도 있었지.”
“하지만 그는 혼자서 왔다. 우리의 피가 섞인 반편이 따윈 옆에 없었다. 기껏해야 토끼 귀 수인 족 하나 달고 다니더군.”
“역시 예언은 예언일 뿐인가?”
대화가 끊기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청미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지?”
홍미가 대답했다.
“유산을 가져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지.”
* * * * * *
해방연합은 천외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단체다. 공관은 수시로 그들의 제보를 받는 한편, 막대한 포상금으로 홍보도 했다.
그래서 공관의 도움을 받는 게 어렵지 않았다. 퍼시픽 림은 공관에 결재를 받고 행동에 나섰다. 공관의 힘이 있으니 배후를 알아내는 게 일사천리다.
“천외지의 드래곤에게 구매했습니다.”
버켓의 정보분석기를 유통했던 장물업자가 말했다.
“천외지의 드래곤?”
“예.”
기가 막혔다. 드래곤은 하계의 생명체 중 강한 편에 속한다. 차원의 등급에 상관없이 강한 생명체인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는 드래곤이 없고 따라서, 천외지의 드래곤은 버켓의 죽음과 연관이 없다.
“내가 우습나?”
“무슨 말입니까?”
“소규모 그룹의 팀장이 나이도 꽤 있어 보이니 우습게 보이나 보군.”
“아닙니다.”
“그럼 왜 재미없는 농담을 하지?”
“농담이 아닙니다.”
퍼시픽 림은 고개를 흔들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난 나무상자처럼 생겼는데 낡고 오래돼서 퀴퀴해 보였다. 그가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자 낚시를 할 때 쓰이는 갯지렁이처럼 징그러운 벌레 여러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물업자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 그건 직토룡!”
“공관의 물건을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군. 역시 이것저것 물불 안 가리고 손대나 봐.”
“그걸 저에게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직토룡은 공관에서 범죄자를 심문할 때 쓰는 벌레다. 섭취 시 술을 먹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고 묻는 걸 전부 대답하게 되는데 후유증이 있었다. 감기몸살에 걸린 것처럼 몸의 열이 오르고 심한 경우 피를 쏟고 며칠을 앓아눕는다. 더군다나 벌레에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공관에 사용 허락을 맡았어.”
“저 벌레에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는 군.”
“거짓말이 아닙니다.”
“먹여보면 알겠지.”
퍼시픽 림이 손짓하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가멤논이 업자의 팔을 잡았다. 업자가 발악을 하는데 퍼시픽 림은 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직토룡을 먹였다.
꿀꺽.
잠시 후 업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었다. 눈과 귀와 입에서 거품과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데 퍼시픽 림이 무시하고 물었다.
“다시 묻겠다. 버켓의 정보 분석기를 누구에게 구매했지?”
업자는 처음 했던 말을 또 다시 꺼냈다.
“처··· 천외지의··· 드래곤에게서··· 구매···했다.”
아가멤논이 말했다.
“이놈 한결같은 놈이네.”
“이상하군. 직토룡이 안 먹히는 경우도 있나? 곤충 족은 아닌 것 같은데.”
곤충 족은 직토룡이 먹히지 않는다. 퍼시픽 림은 끝까지 업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놈 말이 진짜일까요?”
“곤충 족은 아니니까 진실로 봐야겠는데. 흐음···.”
퍼시픽 림은 혹시나 싶어서 업자의 입을 벌리고 직토룡 한 마리를 더 먹였다. 이번엔 업자의 머리와 턱을 잡고 직접 움직여서 꼭꼭 씹어 삼키게 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는데 같은 대답이 나왔다. 아가멤논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퍼시픽 림은 그제야 업자의 말을 믿었다.
“별수 없지. 천외지의 도마뱀 새끼들을 보러 가야겠어.”
* * * * * *
▷시련 완료.
촉수가 소장의 융털처럼 많아서 말미잘처럼 생긴 괴물을 무찌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갈수록 생물답지 않은 게 나온다. 힘이 강해질수록 생김새도 강해지는 모양이다.
“이 새끼들은 갈수록 개성적이네.”
▷보상: 보라색 구슬 5개.
이제 시련의 보상이 보라색 구슬이다. 시련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다.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구슬을 섭취하고 운기를 했다.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다. 기운을 제대로 흡수하지 않으면 몸이 죽을 듯이 아프니.
우우웅.
소원석의 기운으로 구슬의 기운을 흡수하니 과연 잘 흡수된다. 나는 운기를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천외천에서 엄한 놈에게 죽지는 않겠지.”
처음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요령이 생기니 구슬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도 금방이다. 나는 만족하고 다음 시련이 시작되기 전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될까.”
남색 구슬을 먹고부터 빠짐없이 행했던 일. 나는 손을 들고 주문을 영창 했다. 휴지의 소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력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올까?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좀 달랐다.
“어어···.”
습관처럼 행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막상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니 나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떠듬떠듬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