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주인···. 또 헛된 시도를 하고 있구나.”
휴지가 말했다. 나는 반응하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
거짓말을 좀 보태자면 지구로 막 돌아와서 부모님을 뵀을 때만큼 반가웠다.
“어, 어, 어···?”
휴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떠듬떠듬 놀랐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어깨를 파들파들 떨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소리쳤다.
“주인! 나를 소환하는 데 성공했구나!”
휴지는 100일 휴가를 나와서 연인을 만난 일병처럼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도 기뻐서 두 팔을 벌렸는데 세 발자국쯤 남았을 때 돌연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으읍.”
“왜?”
뭐지?
“주인···. 몸에서 쓰레기 냄새가 난다.”
“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간 물이 부족해서 씻을 수가 없었다. 개성 넘치는 괴물들을 죽이면서 놈들의 체액으로 샤워를 했는데 덕분에 내 차림새도 알록달록 개성이 넘치게 됐다.
“히익. 주인 몸 상태는 괜찮나? 이런 지독한 냄새는 처음 맡아봐.”
“그래?”
“응.”
“흐음. 그 정도 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오버 하긴···.
나는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예상대로 그렇게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자, 이리와.”
“싫어.”
“뭐? 내가 싫어?”
“아, 아니.”
말과는 달리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다.
“다시 만나서 안 반갑니?”
“반갑기는 한데···.”
휴지가 우물쭈물 곤란해했다. 이 녀석 원. 이렇게 귀여웠었나.
나는 휴지를 안으려고 다가갔다. 휴지가 뒷걸음질 쳤다.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갈 때마다 휴지가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못하고 계속 유지됐다. 휴지가 흐물흐물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
“왜?”
“무서워···.”
“반가워서 그래.”
“나도 반갑다. 주인. 근데 이건 좀···.”
“왜?”
그녀의 얼굴표정이 절망적이다.
“제발.”
나는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내 몸에서 그렇게 냄새가 많이 나나?”
“많이 나는 정도가 아니다. 토할 것 같다. 썩은 생선을 푹 고아서 항아리 같은 곳에 100년쯤 밀봉한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해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생명체는 죽을 것 같다.”
“오버 하긴.”
나는 두 손을 들고 위협 의사가 없음을 나타냈다.
“됐고 그럼 내 몸 좀 씻겨줄래?”
“알겠어.”
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의 정령을 소환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안심했다. 다행히 휴지의 정령술은 아무 제약 없이 제대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쏴아아아.
나는 정말 오랜만에 몸을 씻었다. 묵은 때를 북북 벗기니 때가 뱀의 허물처럼 술술 벗겨진다. 도대체 얼마나 안 씻었던 거지?
“야, 이거 새로 태어나는 기분인데.”
허물 같은 때를 모두 벗기고 머리카락의 개기름까지 없애니 살 것 같다. 휴지가 말했다.
“주인.”
“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여러모로 달라졌지.”
나는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물기를 탈탈 털고 몸을 풀었다. 여전히 찢어진 옷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간의 풍상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다음 시련으로 이동하지 않는 거지? 휴지에게 신경을 쓰느라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진즉에 다음 시련으로 넘어갔어야 옳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하늘을 향해 말했다.
“지니.”
지니가 대답했다.
<예.>
“다음 시련은?”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방금 그게···.>
“방금 그게?”
<···마지막 시련이었습니다. 플레이어님.>
어어!
나는 휴지를 만났을 때보다 더 놀랐다. 시련을 모두 극복했다고!
그러고 보면 방금 죽인 놈은 완전 괴물 같은 놈이었다. 생김새도 특출나게 못 생겨서 특별하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그게 마지막 시련이었을 줄이야.
지니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님. 모든 시련을 극복하셨습니다.>
드디어!
나는 기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예전에는 허공에서 두세 바퀴 돌고 지면에 착지했는데 이제는 스무 바퀴를 돌아도 문제가 없다. 나는 지면에 착지하고 물었다.
“보상은 따로 없나?”
<···지금 탑을 나가시겠습니까?>
이따위로 대답하는 걸 보니 보상은 따로 없는 모양이다. 그래, 강해진 것에 만족해야지.
나는 금세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 굳었다.
“아니, 잠깐만.”
“왜 그러냐, 주인? 얼른 나가자.”
순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구슬이 없어.”
“먹고 흡수했으니까 없지.”
휴지는 소환하지 않는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구슬을 섭취하고 흡수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냐.”
“무슨 소리냐, 주인?”
“지구를 구할 구슬이 없어.”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먹고 사는 게 급급해서 관심을 끄고 있었다. 하나쯤은 챙겨뒀어야 했는데 시련이 이렇게 예고 없이 끝날 줄 몰랐다.
“최소한 초록색 구슬이 7개쯤은 있어야 하는데···.”
밖에서 구슬을 구하는 건 힘들다. 아르카디아가 초록색 구슬 7개에 팔렸으니 지구를 구매하는 것에도 최소한 초록색 구슬이 7개는 있어야 한다. 문제는 천외지에서 초록색 구슬은 구하기 힘든 귀한 구슬이란 것이다.
“주인.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는 휴지의 물음을 외면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구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거야.”
천외천에 가서 구슬을 구한다고 해도 문제가 된다.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른다. 무작정 공격당할지도 모르고, 구슬을 구하기 힘든 환경일 수도 있다.
그러니 구할 기회가 있을 때 구해야 한다. 내가 말했다.
“지니.”
<말씀하십시오. 플레이어님.>
“탑에 들어왔을 때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 제한된 시련이 있다고 했지?”
999단계 위에 제한된 시련이 하나 더 있다고 했었다.
<예. 플레이어님.>
“그걸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지니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할 수는 있습니다.>
말이 거슬린다. 할 수는 있다고? 제약이 있다는 건가?
“할 수는 있다는 게 무슨 소리지?”
<사용자가 탑의 마지막 시련을 극복하면 탑이 폭발합니다.>
“탑이 폭발한다고?”
관용적인 표현인가.
<비유적인 뜻이 아닙니다. 천외지 행성 전체의 생명체들이 소멸하게 될 겁니다.>
“···이해할 수 없네.”
<탑의 제작자와 사용자는 입장이 다르니까요.>
거참 이상한 시스템이네. 나는 따지려다가 그만뒀다. 하나둘 따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여긴 아르카디아의 사람들도 있어. 내 자손을 죽일 수는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하지?”
사실 구슬이 나올 구석이 있긴 했다. 정보 분석기가 상당한 가치를 지녔다고 했으니 그걸 팔아서 구슬을 마련하면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팔 것인가? 아무리 비싸고 좋은 물건이라도 사는 사람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 정보 분석기를 판매하려면 최소한 천외천에서 판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천외천은 미지의 장소란 말이지.’
나는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휴지를 쳐다봤다. 순간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정보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왜 그러냐 주인?”
“맞아. 그게 있었지.”
“뭐가 있다는 거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떠오르는 게 있어서.”
가만 보니 천외천에서 구슬을 구할 필요는 없다. 천외지에도 구슬이 있다.
“드래곤을 족쳐야겠어.”
나는 판단했고 곧 결정을 내렸다.
* * * * * *
홍미, 청미, 백미. 세 드래곤은 고대의 유산이 잠들어있는 시조 드래곤의 동굴에 도착했다. 시조 드래곤은 세상이 생겨날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모든 드래곤의 시조이자 가장 강한 태고의 드래곤이었다.
홍미가 마법의 문양이 그려진 석판에 손을 대자 동굴의 입구가 빛났다. 홍미가 말했다.
“너희들도 손을 대라.”
청미와 백미가 차례차례 문양에 손을 대자 동굴의 입구가 빛났다. 잠시 후 입구가 열리자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이틀 정도가 지나서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홍미가 돌탑 위에 꽂혀있는 고대의 유산을 보고 말했다.
“구슬은 어느 정도 있지?”
구슬을 담당하던 청미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서 구슬들을 꺼냈다.
“그간 모은 구슬이 꽤 있어. 이 정도면 고대의 유산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천외지의 수인 족들을 구워삶아서 모은 구슬이 꽤 됐다. 홍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시작하지.”
홍미는 돌탑을 향해 다가갔고 고대의 유산을 쳐다봤다. 고대의 유산은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는 거인의 손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돌무더기에 파묻힌 거대한 기둥을 보는 것 같았다.
홍미는 숨을 고르고 돌탑에서 고대의 유산을 뽑아냈다. 그러자 탑이 빛을 내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푸스슷.
기둥처럼 거대했던 고대의 유산은 사용자의 크기에 알맞게 줄어들어서 홍미의 양손에 딱 맞는 지팡이가 됐다.
“이것이 유산의 힘···.”
홍미는 감격에 젖은 눈으로 고대의 유산을 바라봤다.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스슥.
홍미가 유산을 휘두르자 지팡이의 꼭대기에 있는 보석에서 실 가닥 같은 빛들이 쏘아져 주변의 구슬들을 흡수했다. 홍미는 커다란 충족감을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고대의 유산은 구슬을 흡수할수록 강해진다. 이걸 사용하면 어떤 적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청미가 다가와서 고대의 유산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모인 구슬의 힘으로 봉인을 깰 수 있을까?”
홍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걸로는 노망난 용을 깨우기엔 역부족이다.”
“역시 아직은 구슬이 부족했나.”
“하지만 인간 놈을 죽이고 나면 충분해지겠지.”
청미가 눈을 빛냈다.
“인간을 죽이고 구슬을 흡수할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구슬을 섭취한 생명체는 사후 구슬을 남긴다. 좋은 구슬을 많이 먹을수록 그에 걸맞은 구슬을 뱉어낸다.
잠자코 지켜보던 백미가 말했다.
“유산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 이제 탑이 있는 곳으로 가자.”
* * * * * *
유선은 소용돌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련의 탑을 많이 사용해봤고, 사용자의 시련이 끝날 무렵 소용돌이의 색이 파란색으로 변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유선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파란색으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보면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드래곤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홍미님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준비하시는 거지?’
유선은 문득 탑으로 들어간 인간이 떠올라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탑을 들어가기 전 이미 드래곤과 필적했던 상대다. 시련을 극복하고 더 강해졌다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탑에서 나온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재앙으로 변했을 것이다.
쿠구구궁.
그때 땅이 울리고 커다란 굉음이 일었다. 유선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고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