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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90화 (90/127)

# 90

“설마! 벌써!”

유선이 자세를 낮추고 긴장했다. 드래곤도 없는데 인간이 탑에서 나오면 큰일이다.

쿠르르.

집중해서 들어보니 탑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유선은 탑에서 시선을 거두고 뒤쪽을 쳐다봤다. 레드드래곤 홍미가 청미와 백미를 데리고 입구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홍미님!”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군.”

홍미는 시련의 탑을 쳐다봤다. 파란 소용돌이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되도록 시련을 극복하지 않길 빌었는데 이러면 유산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대책을 마련하길 잘했어.”

“홍미님. 그 지팡이는?”

“고대의 유산이다.”

백미가 말했다.

“입구의 소용돌이가 파란색이야. 얼마나 남았다는 거지?”

“이제 곧 놈이 나올 거다.”

홍미는 고대의 유산을 쥐고 생각했다. 행동력 있게 움직였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부담스럽다.

탑에 들어간 인간이 정말 예언에서 언급한 인간일까?

구슬에 잠식돼 괴물이 되었다면 예언의 인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멀쩡하다면···.

‘만약 그렇다고 해도 예언은 틀렸다. 반편이가 끌고 온 인간이 아니니까.’

예언은 인간이 반편이와 함께 천외지에 발을 디딘다고 했다. 그러니 놈의 상태가 멀쩡하다고해도 예언의 인간은 아닐 것이다.

홍미가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백미가 소리쳤다.

“집중해! 소용돌이가 걷히고 있다!”

드래곤들은 숨을 죽였다. 기류가 걷히고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 * *

지구에서 천외지로 넘어왔을 때 휴지는 포탈을 넘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휴지가 포탈을 넘을 수 없어서 불가피하게 소환을 해제했다. 내가 포탈을 넘어서 탑에서 나오자 나를 환대하는 드래곤들이 보였다.

이 새끼들 뭐지. 머릿수가 불었다.

“어이, 빨간 도마뱀. 기다리고 있었나? 친구들을 부른 걸 보면 많이 불안했나봐.”

농담을 던졌는데 반응이 없다. 표정들을 보니 나를 보고 긴장한 모양이다.

“아직 혼내준다는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러지?”

“너, 너··· 왜 그렇게 멀쩡한 거냐?”

“무슨 소리야?”

“괴물로 안 변했잖아!”

긴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서 이질적으로 생긴 남자가 소리쳤다. 겉모습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뿜어내는 기운을 통해 그가 드래곤임을 알아챘다. 백발인 걸 보면 실버 드래곤인 모양이다.

“당황하지 마라. 놈은 예언에서 언급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시련의 탑에 대해서 아직 완벽하게 몰라. 괴물로 변하지 않았어도 행성을 파괴하기 위해 탑을 나올 수도 있다는 거다.”

레드드래곤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블루드래곤으로 보이는 파란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무시하고 말했다.

“내 물건들은 어디에 있지?”

대답이 없다.

“어이, 도마뱀. 내 성마검과 정보 분석기는 어디에 있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뭐야, 이 새끼들.

나는 묵묵부답인 드래곤들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이고 유선을 쳐다봤다. 유선이 대답 대신 곁눈질로 구석을 가리켰다.

커다란 상자 같은 게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가까이서 들춰보니 쇠창살로 만들어진 감옥이다.

성마검은 그 안에 있었다. 덧붙여 토끼 수인족 알라샤까지도.

“마법으로 재웠나?”

신경 줄이 무쇠같이 단단한 사람이라도 불안한 상황에선 쉽게 잠들지 못 한다. 알라샤가 곯아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인위적으로 재운 모양이다.

“근데 정보 분석기는 어디에 있지? 안 보이는데.”

나는 감옥 안을 살피고 말했다.

대답을 바라고 물었는데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내 말 안 들려? 어이, 빨간 도마뱀.”

레드드래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조용히 있는 거지.

“파랭이, 흰머리. 니들도 대답 좀 해봐.”

드래곤들은 침묵을 지킨 채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꼭 꿀 먹은 벙어리 같다. 왜 저러는 거지. 내 찢어진 옷차림새가 이상한가.

입고 있는 차림새를 슬쩍 훑어보고 성마검과 알라샤를 꺼내기 위해 감옥의 쇠창살을 쥐고 흔드는데 그 순간 레드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죽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놈이 쥐고 있던 지팡이에서 빛이 났다.

“뭐야, 갑자기.”

마나의 번개가 가시처럼 날아와 나를 노렸고 머리 위에서 얼음송곳이 소환돼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새끼들. 해보자는 거냐?”

나는 고드름처럼 떨어져 내리는 얼음송곳을 쳐내고 소리쳤다. 몇 개는 쳐내지 못하고 정수리와 어깨 위로 떨어졌는데 타격이 거의 없다. 몸의 내구성이 증가한 덕분이다.

저건 맞아도 괜찮을까?

지팡이에서 나온 구체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구체를 쳐내려고 자세를 잡았다가 어쩐지 불길해서 피하기로 했다.

“어?”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땅에서 솟구친 진흙이 주먹을 쥔 모양새로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런 수작을 부리려고 조용히 있었던 건가.

내가 깨닫는 사이 주변의 공기가 석고상처럼 굳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무형의 틀에 갇혀서 사지가 압박되는 기분을 느꼈다.

재밌는 짓을 하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수작에 꽤 고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흡!”

나는 기합을 내뱉는 것만으로 놈들의 포박을 깨부수고 끈끈이 같은 진흙을 짓밟아서 없앴다. 감옥의 쇠창살을 완전히 부숴서 알라샤와 성마검을 꺼낸 뒤 알라샤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안전한 지역에 두고 성마검만 쥐고 다시 되돌아왔다.

여기까지 3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네 녀석 인간을 초월했구나!”

“괴물 같은 놈.”

“진짜 괴물을 본 적이 없구나. 삼룡이들.”

나는 탑에서 죽인 괴물들이 떠올라서 얼굴을 구겼다. 생각만해도 혐오스럽다.

“닥쳐!”

머리가 새파래서 블루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소리쳤다. 그는 양손에 마나를 모아서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마력의 창을 만들어 내게 던졌다.

나는 탄지공의 숙련도도 확인해볼겸 내력을 조금 실어서 탄지공으로 맞대응했다.

파지직!

굉음이 났다. 허공에서 마력의 창과 탄지공이 맞부딪혔다. 내력을 미약하게 실었기 때문에 밀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탄지공이 마력의 창을 갈랐다.

빠직!

급기야 그대로 날아가더니 블루드래곤의 명치를 꿰뚫었다.

“커헉!”

블루드래곤은 피를 토하며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당황했다.

“어어···, 너 뭐야···.”

나는 되도록 드래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모아둔 구슬이 필요하기도 하고, 마법 아티펙트나 천외천에 대한 정보 같은 것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택지를 넓게 보고 맹약을 맺어서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드래곤은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편이 여러모로 활용가치가 높은 것이다.

게다가 인간화 상태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죽여도 부산물을 얻을 수 없다.

“끄, 끄으윽···.”

블루드래곤은 한 차례 숨결을 내뱉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내가 급히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이미 죽은 뒤였다.

“아니.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놈이···.”

의도치 않은 살인에 짜증이 났다.

“그러게 약한 녀석이 왜 강한 척을 해!”

내가 윽박지르자 붉은 머리와 하얀 머리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청미!”

“감히 인간 따위가! 네 놈이 드래곤을 죽여!”

“이제 천외지에서 우리 일족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블루드래곤의 이름이 청미였나 보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붉은 머리. 네 이름이 홍미였고, 설마 흰머리는 백미냐?”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드래곤은 선천적으로 동족애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드드래곤 홍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내게 달려왔다.

“의도치 않게 죽였지만 맞아줄 생각은 없어.”

나는 달려오는 홍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놈이 대응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힘을 조절해서 상당히 약하게 때렸는데 놈은 코뼈가 으스러진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끄으으···.”

“너도 강한 척 그만하자. 너 그러다 죽어.”

나는 두 손을 들고 공격의사가 없음을 나타냈다.

“나는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목적만 이루면 괜찮아.”

“목적?”

실버드래곤 백미가 날 쳐다봤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정보와 구슬을 나눠줘. 그걸로 봐주지.”

홍미는 대답 대신 지팡이를 휘둘렀다.

“어허, 죽는다니까.”

“웃기지 마라!”

“먼저 공격한 건 너희들이야. 난 지금 자비를 베푸는 거라고.”

그 순간 지팡이의 보석에서 강렬한 기운들이 우후죽순 솟구쳐 내게 엄습했다. 불길하다. 드래곤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데 저 지팡이는 뭔가 달랐다.

저 지팡이가 놈이 믿는 구석인가.

푸스슷!

나는 지팡이에서 나온 구체들을 쳐내서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주려다가 왠지 꺼림칙해서 그냥 피했다. 기운으로 응축된 구체들이 거머리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귀찮게.”

나는 구체를 피하다가 짜증이 나서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어, 이건···?”

나는 구체에 부딪히자마자 급히 뒷걸음질 쳤다. 이상했다. 구체가 내 내력을 흡수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약해진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큭큭큭큭.”

돌연 홍미가 웃었다.

“뭐가 웃기지?”

“유산의 힘을 새롭게 알게 돼서 웃었다.”

“무슨 소리야?”

“구슬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도 있었군. 네 힘 잘 받았다.”

나는 깨달았다.

기분 탓이 아냐. 저 지팡이가 내 힘을 흡수했어.

“역시 고대의 유산을 사용하는데 질 리가 없어.”

홍미가 무작정 지팡이를 휘둘렀다. 기운을 머금은 새하얀 구체가 밤하늘 별자리처럼 생겨나 공동 안을 가득 메웠다. 홍미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말했다.

“인간. 네 정체가 궁금해서 잠깐은 살려두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바로 죽여주마.”

“장비 하나 믿고 엄청 까부네.”

“그 잘난 입 언제까지 놀릴 수 있나 보자.”

홍미는 구체들을 무작정 내게 던졌다. 빽빽하게 날아오는 구체들을 보니 피할 틈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지?

고민은 짧았고 판단도 짧았다.

“놀고 있네.”

나는 탑 안에서 휴지를 소환하느라 마력을 많이 소모했다. 그래서 힘을 아껴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에 위기가 닥쳐 오는데 힘을 아껴둘 필요는 없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날아서 단숨에 놈의 코앞에 도착했다.

퍽! 퍽! 퍽!

그리고 옆구리를 살살 두들기자 놈의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홍미가 기겁했다.

“아아아! 안 돼!”

“돼!”

지팡이를 낚아채고 놈의 명치를 발로 차니 놈이 축구공처럼 날아가서 벽에 부딪혔다.

나는 지팡이를 살피다가 인상을 구겼다.

“뭐야. 이거 또 내 힘을 흡수하네.”

지팡이를 쥐고 있으니 구슬로 얻은 힘이 자꾸 빠져나간다. 뭐지. 놈이 술수를 부려서 내 힘을 빼앗은 게 아니었나?

놈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팡이에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지?

나는 생각했고 곧 행동에 나섰다.

“휴지 소환.”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서 휴지를 소환하는 데 소모되는 마력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보다 천외지에서 휴지를 소환하기 힘든 것처럼, 천외지보다 시련의 탑 내부에서 휴지를 소환하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탑의 내부에서 휴지를 소환하는데 가장 많은 마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천외지에서 휴지를 소환하는 데는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냐, 주인.”

“이거 들고 있어.”

나는 휴지에게 지팡이를 건넸다. 휴지는 구슬을 먹지 않았으니 지팡이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때 백미가 소리쳤다.

"반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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