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내가 말했다.
“왜 갑자기 욕을 하는 거지?”
반편이는 바보나 멍청이, 모지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예언이 사실이었군. 넌 예언의 인간이었구나.”
“예언?”
위기를 모면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낌새는 들지 않았다.
백미가 휴지를 가리켰다.
“하프 드래곤을 보고 깨달았다.”
“휴지를?”
“반편이의 이름이 휴지인가?”
“그래.”
“어울리는 이름이군.”
휴지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백미가 말했다.
“우리 천외지의 드래곤들에겐 대대로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다.”
“무슨 예언이지?”
“반편이가 데려온 인간이 천외천의 위협으로부터 이곳 천외지를 구해준다는 예언.”
“얼토당토하지 않은 예언이군.”
“얼토당토한 예언이다. 시조 드래곤께서 하신 예언이니까.”
“시조 드래곤?”
갑자기 흥미가 확 솟구쳤다.
“그래. 태초에 세상이 생겨날 때 세상과 같이 탄생한 드래곤들을 우리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시조 드래곤이라고 부른다. 시조 드래곤께선 총 세 분으로 지금 우리처럼 실버와 레드, 블루드래곤께서 계셨지.”
“그래서?”
“억겁의 시간이 지나 레드 시조께선 상계로 올라가셨고, 실버의 시조께선 하계로 내려가셨다. 남은 블루의 시조께선 중간계인 이곳 천외지에 홀로 남으셨다.”
“중간계? 천외지가 중간계라고?”
위치적으로 볼 때 천외지는 절대 중간이 아니다.
“원래 천외지는 이곳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행성의 이름도 천외지가 아니었어. 에이레라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럼 원래는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데?”
“중간계.”
더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블루의 시조께서 이곳에 터를 잡고 예언하시길, 억겁의 시간이 지나 위기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반편이··· 아니, 하프 드래곤이 데려온 인간이 천외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하셨다. 하늘 밖의 사람들이 세운 구조물에서 인간은 성장한 다음 밖으로 나올 것이며···.”
더 들어봤는데 별거 없다.
“그렇군.”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란 족속은 자신들의 혼혈을 모지리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백미가 말했다.
“구슬과 정보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
“네 조건을 받아들이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지?”
“나는 예언을 믿는다. 예언에 따르면 우리 천외지의 드래곤들은 너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
백미가 호의적으로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때 회복마법으로 몸을 수복하던 홍미가 소리쳤다.
“백미! 놈은 청미를 죽인 놈이다. 드래곤을 죽인 인간에게 협력하겠다는 거냐!”
“고의가 아니야. 서로 오해가 생겨서 일어난 사고다.”
“사고라니, 명백한 살인이다.”
“사고야.”
홍미가 나를 보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놈은 다혈질에다가 자존심도 강했다.
“너는 지금 종족 전체를 배반하고 있는 거다.”
“종족을 배반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다. 애초에 청미의 죽음은 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어난 일이야. 로드께서 계셨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노망난 용은 여기 없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 동의한 일이야.”
“엄밀히 말하면 여기 안 계시는 게 아니지. 그리고 청미와 나는 네게 속은 거다.”
둘의 실랑이가 한참 이어졌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타이밍을 봐서 끼어들었다.
“흰밥. 너희에게 로드도 있었나?”
“당연히 있다. 원숭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백미의 표정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랫사람보다 윗사람을 만나는 게 일 처리가 빠르다. 직원보다 사장을 만나서 말을 맞추는 게 효율적인 것처럼.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에 벌레가 나왔을 때 ‘사장 나와! 사장 어딨어!’하고 사장부터 찾는 건 효율적인 문제 해결방식 중 하나다.
아니, 이건 좀 진상인가.
나는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좋아. 일단 드래곤 로드부터 만나야겠어. 안내해. 너희 드래곤들에게 나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면 그 자격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겠어.”
“로드께선 여기 안 계신다.”
나는 멍해졌다.
“무슨 소리지? 방금 빨간 도마뱀이랑 대화할 땐 노망난 용이 여기 없는 게 아니라며.”
이중부정은 긍정을 뜻한다. 근데 안 계신다고?
“그건···.”
백미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불안해져서 물었다.
“설마 다른 차원에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문득 내 처지가 생각나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곤란하다. 시련을 극복한 뒤로 나는 인간의 수준을 초월했지만 차원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능력은 아직 없다.
“로드께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지?”
“인간. 시련의 탑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걸 묻네.
“그걸 왜 지금 묻는 거지?”
“대답해봐.”
“천외천에서 지은 거라며. 자동관리 시스템 같은 걸로 유지되고 있는 거 아니었나?”
백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편한 마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고 해도 대가가 필요해. 마법을 유지하는데 마력이 드는 것처럼 오래된 건물을 유지하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천외천인들은 신에 필적한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니었나?”
“모든 기술에는 자원이 들어간다. 대가 없는 기술은 없어.”
나는 백미의 말을 인과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설마 드래곤 로드가 탑 안에 갇혀서 무일푼 노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냐?”
“비슷하지만 다르다. 뇌는 적출되어 가상의 인격으로. 드래곤 하트는 탑에 봉인되어 탑을 유지하는 동력원으로 쓰이고 계신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가상인격 지니의 정체가 드래곤 로드였군.”
시련의 탑이 마냥 천외지인들에게 유리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말했다.
“흰밥. 로드가 희생될 정도라면 너희들은 천외천인들과 전쟁을 치렀겠군.”
“원숭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천외천인들은 얼마나 강하지?”
“같은 생명체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강하다. 특히 공관을 다스리는 황제는··· 거대한 재앙 그 자체다.”
백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는지 목을 움츠렸다. 나는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말해.”
“그럼 천외천인들은 왜 이곳에 시련의 탑을 세웠지? 전생 승리의 기념비 같은 건가? 하지만 탑은 사용자를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나?”
단순한 전쟁승리기념비라면 그런 기능을 넣어줄 리 없다.
“시련의 탑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수단 중 하나지만 숨겨진 기능이 있다.”
“숨겨진 기능?”
“하나는 폭발해서 행성을 날려버리는 기능. 또 다른 하나는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기능이다.”
행성이 폭발한다는 건 마지막 시련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게 무슨 의미지?”
“너는 시련을 시작할 때마다 여러 차원을 돌아다녔을 거다.”
나는 생각했다. 매 시련마다 장소가 휙휙 바뀌긴 했다. 근데 그게 차원이 바뀌는 거였나.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괴물들을 죽였겠지.”
다행히 같은 인간을 죽인 적은 없다.
“그래서?”
“네가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천외천은 수고를 더는 것이다.”
“무슨 소리지?”
“네가 다른 행성에 있는 지도자 또는 생명체들을 죽이고 나면 천외천에서 한결 쉽게 행성을 수거해가는 방식이다. 그들은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지.”
“그럼 내가 시련을 극복하고 받았던 구슬은···?”
“행성의 판매금액 중 일부다.”
기가 막혔다.
“그럼 괴물들은 뭐지?”
“구슬의 부작용으로 괴물이 된 자들이다.”
“부작용?”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대가 없이 강해질 수는 없다. 구슬을 꾸준히 복용하면 어떻게든 파멸을 맞는다.”
“그 결과가 괴물이란 소리냐?”
백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에 실패하지 않고 구슬의 부작용으로 괴물이 된 자들은 탑에서 강제로 추방된다. 그리고 구슬에 미쳐서 행성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학살하고 다니지. 네가 차원을 이동하면서 죽였던 괴물들은 모두 다른 차원에서 시련의 탑을 이용했던 자들이다. 구슬의 부작용 탓에 그런 꼴이 된 거지.”
나는 생각했다.
소원석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나도 괴물이 됐을 수도 있어.
뒷골이 선득했다. 문득 마지막에 죽였던 말미잘처럼 생긴 촉수 괴물이 떠올랐다.
“우리는 네가 괴물로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멀쩡히 나와서 의아했지. 네가 예언에 나오는 인간이란 걸 깨닫고 비로소 이해가 됐다.”
“걱정 덜었겠어. 흰밥.”
“최악으로 치닫지 않아서 안심했다. 원숭이.”
나는 백미의 말을 정리했다. 드래곤들이 목숨을 걸고 천외천인들과 싸웠다니. 수인 족들이 의심 없이 드래곤들에게 구슬을 바치는 것도 이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궁금한 건 없나?”
“지금은 물을 게 없어.”
“그럼 일단 저 녀석부터 해결하지.”
백미는 몸을 돌리고 다시 홍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홍미. 더 이상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너도 예언을 따라라.”
“웃기는 소리. 그건 예언이 아니다. 노망난 용의 헛소리지.”
“시조 드래곤께서 남기신 예언이다.”
“억겁의 시간을 거쳤어. 대대로 구두로 예언을 전하면서 변질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둘은 또 다시 실랑이를 벌였다.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놈들 사이를 갈랐다.
“둘 다 소모적인 대화 그만하고. 빨간밥. 내 정보 분석기나 내놔.”
홍미가 말했다.
“없다.”
“없다고?”
“팔았다.”
“팔았다고? 누구에게?”
홍미는 몸을 일으키더니 천장을 가리켰다.
“천외천의 장물상인.”
내 얼굴이 구겨졌다.
“거짓말을 하는군.”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뻔뻔한 사람을 많이 대해 봐서 거짓말을 구분할 줄 알아.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너처럼 뻔뻔하지 않지.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목숨값 아까운 줄 알고 함부로 말하지도 못해.”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
나는 홍미에게로 다가갔다. 백미가 말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순간 개체별로 동족애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 했는데 그것보다는 홍미를 몇 대 패주고 싶은 모양이다.
홍미는 눈치를 살피더니 몸을 움직였다. 그는 나 대신 지팡이를 들고 있는 휴지에게로 달려갔다.
“어딜.”
나는 단숨에 달려가서 놈의 뺨을 갈겼다.
퍽!
놈이 피를 뿌리며 벽 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크으으. 인간이 감히!”
홍미는 현재의 모습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여겼는지 본체로 헌신했다. 빛이 번쩍하고 놈의 몸이 태양처럼 빛났다.
“빈틈을 보여주다니. 멍청이냐?”
폴리모프는 외형 자체를 변형시키는 마법이라서 변신시간이 많이 걸린다. 보통 기다려주는 게 관습처럼 굳어 있었는데 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총알처럼 튀어나가서 은의 검술을 사용했고 놈을 도륙 냈다. 시련의 탑에서 생사를 넘나들 때 검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예상 외로 검을 휘두르는 데 무리가 없다. 내 검이 놈의 날개와 꼬리를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