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92화 (92/127)

# 92

“크아악!”

홍미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비겁한 놈! 변신 중에 공격을 해!”

“야. 너도 아까 비겁한 짓 했어.”

홍미는 두 발로 일어서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네 발로 상체를 일으켰다. 날개와 꼬리가 잘려서 중심을 못 잡는 모양이다.

나는 검을 땅에 박고 주먹으로 홍미의 턱을 올려 쳤다.

퍽!

찰진 소리가 났다. 놈의 거체가 공중에 붕 뜨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홍미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망할 자식.”

“또 지껄여 봐.”

“······.”

주먹을 보여주자 더는 말이 없다.

“이제 진실을 말할 생각이 좀 드나?”

“난 거짓말한 적 없어.”

“끝까지 오리발이군.”

나는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정보 분석기는 어디에 있지?”

“아까 말했어. 천외천의 장물상인에게 팔았다고.”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라고!”

홍미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게 진실이면 넌 죽어.”

나는 놈의 뺨을 후려갈기고 말했다. 피가 튀고 비늘이 떨어졌다. 놈이 다시 나를 노려보는데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둡다.

설마···.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진짜로 팔았다고?”

홍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기가 막혔다.

“어째서? 내가 탑 안에서 죽을 거라 생각해서 팔았나?”

망자의 유품이라고 가정한 채 팔았다면 이 녀석은 정말 못 된 놈이다.

“네가 우리 천외지에 커다란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백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괴물로 변할 줄 알았다고?”

“성마검과 정보 분석기.”

“그게 왜?”

“그 두 물건은 천외지의 물건이 아니다. 나는 네 정체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두 물건 모두 천외천과 무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착각해서 내 물건을 팔았나?”

“착각이 아닌 합리적인 의심이다. 난 구슬이 필요했어.”

“구슬을 먹어서 강해지려고?”

“아니. 틀렸다.”

홍미는 휴지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휴지가 쥐고 있는 지팡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지팡이를 움직이는 데 구슬이 필요한가?”

“저건 그냥 지팡이가 아니다. 고대의 유산이다.”

“고대의 유산?”

그러고 보니 지팡이의 정체가 궁금하다. 구슬의 힘을 흡수하는 걸 보면 평범한 무구는 아닌 듯했다.

“저건 대체 뭐지?”

홍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저건··· 일종의 열쇠다.”

“열쇠?”

뒷말을 기다렸는데 더 이상 들려오는 말이 없다.

“말해주기 싫나?”

홍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힘도 없는 놈이 자존심만 강해서 문제야. 그래, 계속 닥치고 있어. 대신 정보 분석기 값은 받아갈게.”

나는 땅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드래곤을 해체해서 판매하면 어느 정도 정보 분석기와 수지타산이 맞을 것이다. 구태여 귀찮다면 판매할 필요도 없다. 드래곤의 시체는 사용처가 많다. 비늘을 뽑아서 방어구를 만들거나 발톱과 이빨을 뽑아서 검을 만들거나 심장을 적출해서 마법 아티펙트를 만들면 된다.

구슬은 백미가 준다고 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홍미가 말했다.

“나를 죽일 생각인가?”

“생각 좀 해보고.”

나는 백미를 쳐다봤다. 그녀가 홍미의 목숨에 관심이 있다면 마냥 죽일 순 없다. 죽이는 것보단 살리는 편이 원만한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백미가 내 의도를 알아채고 말했다.

“죽여도 괜찮아.”

“고맙다, 흰밥.”

“천만에, 원숭이.”

홍미가 소리쳤다.

“백미! 네가 날 배신해!”

백미가 그를 외면하고 말했다.

“유산에 대한 정보도 걱정하지 마. 나도 알고 있어.”

“역시 드래곤의 동족애는 경이롭군.”

“비꼬지 마. 일의 경중을 아는 거야. 동족이 죽는 건 가슴 아프지만 천외지가 사라지는 것보단 나아. 예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걸림돌이 될 거야.”

나는 백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유선을 쳐다봤는데 별말이 없다.

“어이, 까마귀.”

“왜 그러지?”

“넌 왜 조용히 있지? 드래곤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하지 않았나?”

순전히 궁금해서 물었다. 그녀는 탑에 들어가기 전 몸을 날리며 홍미를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조용하다.

“난 우리 수인 족의 이익을 생각할 뿐이야. 네가 예언의 인간이라면 네 쪽을 지지하고 싶어.”

“너도 예언을 알고 있었나?”

“천외지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구체적인 건 방금 알았지만 대략적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렇군.”

예언은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던 모양이다.

“잠깐! 멈춰.”

홍미가 다급히 소리쳤다.

“뭐지? 유언인가?”

“협상하자.”

“협상?”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네게 알려줄게.”

“됐어. 정보는 이미 네 친구에게 듣기로 했어.”

“백미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보의 질이 다르다.”

“그 나물에 그 밥이야. 사양하지.”

홍미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좋은 것을 줄게.”

“좋은 것?”

호기심이 생겼다.

“목숨값으로 뭘 줄 수 있지?”

“내 레어에 아티펙트가 많아. 천외천인들도 부러워할 만큼 품질 좋은 아티펙트.”

“그게 정보 분석기 정도의 값어치가 되나?”

홍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되는 것 같군.”

나는 검을 들고 휘두를 준비를 했다. 홍미가 당황해서 말했다.

“만약 네가 특정한 마법무구를 원한다면 내가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무엇이든?”

“내가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게 따로 있나?”

나는 말했다.

“드래곤 하트.”

홍미가 소리쳤다.

“그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는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난 죽기 싫어.”

“인간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자존심 안 상해?”

“난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 자존심이 무지하게 상하지만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오래 살았으면 죽어도 괜찮겠네.”

“하지만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이 남았어.”

홍미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 녀석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나는 마음이 찜찜했지만 칼을 치켜들었다. 화근을 남겨둬선 안 된다. 살려두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 순간 놈을 감싸던 마나의 기운이 넓게 퍼졌다가 모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악! 주인!”

뒤를 돌아봤다. 땅에서 솟아난 진흙 뱀 수십 마리가 휴지의 지팡이를 뺏으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정령술인가. 나는 탄지공을 총알처럼 날려서 진흙 뱀들의 머리를 부쉈다.

“재밌는 짓을 하네.”

“흥! 회복하느라 힘들었다.”

그럼 그렇지.

홍미가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말했다. 날개와 꼬리가 여전히 잘린 채로 있는 걸 보면 최대한 효율을 살려서 몸의 내부 상처만 치료한 것 같았다.

“어리석은 놈. 여유를 부리다니.”

“빨간 밥. 진즉에 알고 있었어.”

“헛소리.”

“네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거.”

나는 놈에게 근접해서 검을 휘둘렀다. 놈이 방어막으로 내 검을 막았다. 검이 맞부딪히자 방어막이 유리 파편처럼 깨져 나갔다.

“제길.”

홍미는 급히 텔레포트를 시전해서 도망쳤다. 그리고 내가 어디 있는지를 찾았는데 나는 이미 놈의 옆에 도착해 있었다.

“너, 너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홍미가 나를 발견하고 까무러칠 듯 놀랐다.

“나도 몰라. 어느 순간 마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나는 시련을 극복한 뒤로 체득한 게 있었다. 감각이 인간을 초월했더니 마력의 파장이 느껴지고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정신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마법마다 파장이 달라서 파장만 외운다면 상대가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 어디로 사용할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홍미가 다시 텔레포트를 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마력의 파장이 특이하고 거대한 걸 보니 브레스다.

“귀여운 짓을 하네.”

나는 몸의 내구성을 테스트해 볼 겸 한 번 맞아볼까 생각하다가 휴지를 생각해서 그만뒀다. 검을 들고 천마비행술로 곧장 날아갔다.

치익!

내가 총알처럼 근접하자 놈이 마력을 거두고 갑자기 혀를 튕겼다.

더럽게 뭐 하는 짓이지? 침 공격?

“네가 무슨 히드라냐?”

그 순간 공기가 떨리고 음파가 귓가를 강타했다. 침이 아니라 드래곤 피어였다. 나는 피어에 대항하기 위해 기합을 내질렀는데 지르고 보니 기합을 내지를 필요도 없었다.

내 상대가 아니군.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서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놈이 다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는데 내 검이 더 빨랐다.

서걱!

내 검날에 놈의 오른팔이 잘려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내 팔!”

나는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근접해서 검을 휘둘렀다. 놈은 상처를 치유하지도 못하고 도망치는데 급급했다. 도망치면서 용언 마법이나 정신계 마법을 마구 퍼부었지만 내겐 통하지 않았다. 능력치 차이가 커서 대응할 필요조차 없었다.

홍미는 계속해서 마법을 부리며 피했다. 그때마다 내가 바짝 따라붙었다. 오른팔을 자르는 걸로 시작됐던 추격전은 결국 마지막 남은 왼쪽 다리에서 끝났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좌절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실수했어. 유산을 포기하더라도 기회를 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는 건데···.”

홍미가 후회의 탄식을 내뱉었다.

“실수는 모르면서 저지르는 거지. 너는 실수가 아니라 네 본성을 탓해야 해. 음흉한 놈은 살려둘 수 없으니까.”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서걱.

드래곤의 두개골이 연두부처럼 갈라졌다.

* * * * * *

천외천인이 천외지를 방문하는 것은 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덕분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공관에 결재를 맞고 확인증을 얻고 최종 검토일을 기다린 후에 천외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윗선에서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구는 걸까요?”

동행으로 따라온 아가멤논이 물었다.

“거기에 대해선 많은 소문이 있지.”

퍼시픽 림이 말했다.

“소문이요?”

“너 천외지를 왜 천외천 밑에 두고 있는지 아나?”

“글쎄요.”

“특별 관리를 하는 곳이라 그래. 천외지는 다른 행성과 달리 다른 가치가 있거든.”

“다른 행성과 다른 가치요?”

퍼시픽 림이 주변을 둘러봤다. 외진 곳으로 도착해서 듣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는데 그는 외설스러운 얘기를 하는 소년처럼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특별한 무언가가 봉인돼 있어. 그래서 그걸 감시하려고 천외지를 천외천의 아래로 옮긴 거지.”

아가멤논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나 천외지 출신이야.”

“그렇군요.”

둘은 하늘을 날아서 레드드래곤이 있는 레어로 향했다. 시련의 탑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예상과 달랐다.

“드래곤이 없군요.”

“어디로 간 거지? 탑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는데.”

천외지에는 드래곤이 많지 않다. 아주 오래전 전쟁을 치른 뒤 드래곤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추적관리가 비교적 쉬웠다.

“이상하군. 탑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텐데.”

둘은 레어를 살폈다. 그러다가 전투의 흔적을 발견했다.

“칼자국과 발톱 자국, 그리고 상흔도 있어.”

“누가 드래곤과 싸운 걸 까요?”

“적어도 천외지에는 드래곤과 싸울만한 인물이 한 명밖에 없지.”

하지만 그녀는 드래곤과 싸울 이유가 없다. 퍼시픽 림은 정보 분석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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