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93화 (93/127)

# 93

“이걸 사용하면 알 수 있을 거야.”

퍼시픽 림이 정보 분석기를 착용했다. 테두리에 있는 버튼을 눌러서 사용하니 주변 생물들의 전투력이 보였다.

“버켓의 물건입니까?”

“그래. 네가 나한테 맡긴 거. 신형이지.”

퍼시픽 림은 정보 분석기를 조작했다. 구형만 써봤던 그였지만 신형 분석기를 사용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주변 생명체들의 전투력을 확인하면서 버튼을 조작하는데 퍼시픽 림이 갑자기 인상을 구겼다. 아가멤논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형편없군.”

퍼시픽 림은 짜증이 나서 침을 퉤 뱉고 정보 분석기를 벗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고장이 났어. 신형은 내구성이 형편없나 봐.”

“외관만 보자면 멀쩡한데···. 어쩐지 암시장에서 값이 싼 이유가 있었군요. 초록색 구슬만 날렸어요.”

“버켓도 구매한 지 얼마 안 된 분석기야. AS 받을 수 있을 거야.”

퍼시픽 림은 아가멤논에게 신형 정보 분석기를 건네주고 자신의 구형 정보 분석기를 꺼내서 착용했다.

“이번엔 내 분석기를 써봐야겠어.”

그리고 전투력을 측정하는데 아까보다 인상이 더 구겨졌다.

“왜 또 그러십니까?”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이것도 고장이 났어.”

퍼시픽 림의 미간이 좁아졌다.

“천외지로 이동해오면서 그 충격으로 망가진 건가?”

“그런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군, 이상해. 신형과 구형이 동시에 고장 나다니. 정보 분석기가 단순 이동으로 고장 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전투력 계측이 아예 안 되는 겁니까?”

퍼시픽 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냐.”

“그러면?”

“전투력 측정이 안 될 만큼 강한 생명체가 식별돼서 그래.”

아가멤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전투력이 측정기의 한계치인 90만을 넘어섰다고.”

“90만!”

아가멤논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하지만 천외지에 그렇게 강한 존재는···.”

“맞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퍼시픽 림은 말을 마치고 손짓을 했다. 아가멤논이 그 손짓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가지고 있던 정보 분석기를 착용했다.

“어때? 보이나?”

“어, 어, 어···!”

“내 말이 맞지?”

“그런데 정보 분석기가 고장이 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한 개체의 전투력 표시를 제외하고는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아가멤논이 물었다.

“드래곤의 기척도 한 마리 밖에 느껴지지 않고···. 혹시 공관에서 대장급이 내려와 먼저 처리한 걸까요?”

처음 버켓의 사건을 접수했을 때 공관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해방연합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글쎄.”

“측정기의 전투력을 상회하는 존재들은 공관의 대장계급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뭔가 석연치 않군.”

퍼시픽 림은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일단 오류가 나는 쪽으로 가보자.”

둘은 정보 분석기가 나타내는 루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 * * * * *

천외천의 인물들이 천외지로 내려왔을 때 나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드래곤하트는 챙기고 비늘과 발톱, 이빨 같은 나머지 부속품은 유선을 시켜서 수인족들로 하여금 팔게 했다. 홍미의 사체뿐만 아니라 청미의 사체까지 수거해서 도축했는데 백미는 이해를 하고 넘어갔다.

홍미를 죽인 직후 홍미의 레어를 뒤졌었는데 쓸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백미에게 물어보니 천외지의 드래곤은 보물을 특정한 아공간에 저장하고 있다고 했다. 특정한 아공간은 주문을 통해서만 열 수 있었기에 주문을 모르면 열람할 수 없다. 죽이기 전에 협박해서 물어볼 걸 그랬다.

알라샤는 레어 주변을 둘러본다고 밖으로 나가고, 나와 휴지는 레어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몸을 풀고 있으니 천국에 온 기분이다. 벌써 이틀이나 흘렀다.

“주인. 이제 좀 살 것 같다.”

“나도.”

도대체 내가 몇 년이나 탑에 있었던 거지.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먹으며 용케 버텼다.

“소환되기 전에 힘들었다, 주인.”

“그래?”

“너무 답답했어.”

그러고 보니 휴지는 나보다 오랫동안 미지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

“소환되기 전에 있던 곳은 꼭 아공간 주머니 속 같았다. 춥지도, 덥지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어. 시간이 꼭 멈춰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루하진 않았어. 주인이 고생하는 걸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고생 많았어.”

“주인이 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고 주인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령 주인은 가끔 혼자 있을 때 바지를 벗고···.”

“그만.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불쾌하네.”

우리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수다를 떨었다. 휴지는 변한 게 없었다.

혼자 오랜 시간 갇혀 있으면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이라던데, 다행히 그런 낌새도 없었다. 아니, 휴지는 원래 조금 이상한 애라서 이상이 없는 걸까.

나도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냈는데 비교적 멀쩡한 것 같고.

하품을 하고 늘어지게 누워있는데 백미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약속했던 구슬을 모아왔어.”

“오, 빠른데.”

“모아두고 있던 걸 들고 왔을 뿐이야.”

백미가 아공간 주머니를 던졌다. 나는 받아들고 물었다.

“유선은 아직 연락 없지?”

“그래. 왜 그러지?”

나는 백미의 눈치를 살폈다.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조바심이 생겼다.

“드래곤의 시체를 파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해서.”

“글쎄. 모르겠군. 급한가?”

“되도록 빨리 처리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구슬을 받고 이곳을 뜰 수 있으니까.”

빨리 일을 처리하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

백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들에게 구슬을 상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어. 드래곤의 시체를 판매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글쎄. 급하다면 내가 닦달해보지.”

“고마워.”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동전지갑처럼 생긴 아공간 주머니를 확인했다. 내용물을 보니 초록색 구슬이 다섯 개, 잡다한 구슬이 서른 개쯤 있었다.

생각보다 구슬이 적네.

“이게 네가 가진 구슬의 전부야?”

그간 수인 족으로부터 꽤 모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양이 적다.

“그래.”

“어째서 구슬이 이렇게 적지?”

“원래 더 많았는데 저걸 깨우는 데 대부분을 썼어.”

백미는 휴지가 가지고 있는 고대의 유산을 가리켰다.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지도 않아서 그냥 휴지에게 맡겼다.

“아, 저 지팡이.”

그러고 보니 저 지팡이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다. 전투후 전리품 처리를 한다고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 지팡이는 대체 뭐지?”

“봉인을 깰 수 있는 일종의 열쇠야.”

“열쇠?”

홍미가 내뱉은 말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지팡이를 통해 겪었던 경험을 물었다.

“저 지팡이 말이야. 구슬의 힘을 빨아들이던데?”

“원래 그런 물건이야. 구슬을 많이 흡수할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그게 봉인을 깰 수 있는 열쇠의 기능과 무슨 상관이지?”

“구슬을 흡수해서 완전충전된 상태에서만 봉인을 깰 수 있거든.”

나는 고개를 갸웃 숙였다.

“이상한 봉인이군.”

“봉인의 결계가 아주 강해서 그래.”

“봉인을 볼 수 있을까?”

“좋아. 지금 볼래?”

“그러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백미를 따라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다. 감각을 열고 주변의 변화를 집중하니 레어를 둘러본다던 알라샤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큰일 났어!”

알라샤의 토끼 귀가 하늘로 삐쭉 솟아올라 숫자 11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나는 그녀를 향해 묻다가 스스로 깨달았다. 마력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 백미도 이상한 걸 감지하고 레어의 입구를 쳐다봤다.

웬 생선 대가리와 원숭이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서 다가오고 있었다. 복장도 이상하다. 20세기 세기말 복장처럼 은박지 같은 걸 둘둘 두르고 있다. 둘은 땅에 착지하고 우리를 쳐다봤다.

“드래곤과 수인족, 하프 드래곤··· 그리고 인간 뿐이군.”

“공관의 대장급은 안 보입니다. 역시 분석기가 고장났던 걸까요?”

“그런 것 같군. 조심히 움직일 필요는 없겠어.”

그들은 우리를 두고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내가 물었다.

“누구지?”

원숭이 머리가 흥미를 보였다.

“저 녀석이군. 오류의 주범이.”

“가까이서 전투력을 계측해도 여전히 한계치를 넘어섰군요. 이상합니다.”

“겉보기엔 평범한데.”

백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했다.

“천외천의 존재들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호오, 우리의 정체를 파악했는가.”

“아주 오래전 천외천의 마력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파장을 기억하다니. 희미하게 느껴질 텐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군.”

“잊을 수 없으니까요.”

원숭이 머리가 말했다.

“하지만 틀렸어. 우린 너를 찾아온 게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생선 대가리가 백미의 말을 잘랐다.

“이걸 천외천에 판매한 레드드래곤을 찾고 있다.”

그는 착용하고 있던 정보 분석기를 벗어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깨달았다.

어! 저건 내 정보 분석기잖아!

나는 총알처럼 튀어가서 녀석의 손에 있는 정보 분석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여기까지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총알처럼 갔다와서 순간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

생선 대가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냐? 무슨 일이야?”

“방금 뭐였습니까?”

생선 대가리는 뒤늦게 자신의 손에 있던 정보 분석기가 사라진 걸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분석기가 내 손에 있는 걸 확인하고 놀랐다.

“어, 어! 뭐야! 그게 왜 네 손에 있는 거냐?”

원숭이가 탄성을 흘렸다.

“놀랍군. 무슨 재주를 부린 거지? 이동마법은 아니었는데.”

“그냥 걸어가서 들고 온 건데.”

“이상한 술수를 부렸군.”

“마음대로 생각해.”

원숭이 머리는 손바닥을 펼쳐서 손톱을 세웠다. 긴 손톱날이 마력을 머금고 붉게 빛났다.

“천외지에 온지 얼마 안 된 인간인가보군. 우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딱히 반감은 없어.”

“말이 많이 짧은 것 같은데.”

“나는 내 물건을 가져 왔을 뿐이야.”

원숭이 머리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물건이라고?”

“그래.”

“정보 분석기를 말하는 것 맞나?”

“문제 있나?”

“네 놈. 레드드래곤과 관계가 있는 놈이구나.”

원숭이는 나와 열걸음쯤 떨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싸움을 할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무슨 짓이지?

거리가 꽤 있어서 반응하지 않고 뭘 하나 쳐다보고 있는데 돌연 그가 공간을 찢어발길 기세로 손톱을 휘둘렀다. 순간 붉은 손톱이 비수처럼 날아와 나를 노렸다.

되게 느리네.

힘의 격차는 기회가 있을 때 보여주는 게 좋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서 손톱을 막았다. 내력으로 손을 감싸고 있었기에 고통은 없었다.

“천외천인들도 별 거 아닌가봐. 되게 약하네.”

내가 말하자 원숭이가 웃었다.

“멍청이.”

“내가 왜 멍청이지?”

“그 손톱엔 독이 발라져 있다. 천외천의 잘난 전사들도 30분을 채 넘기지 못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상체를 숙였다.

“윽!”

“이제 대화를 나누기 한결 쉽겠어. 묻는 걸 대답하면 해독제를 주지.”

나는 상체를 다시 세우고 비웃었다.

“농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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