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어, 어···, 어떻게!”
원숭이 머리가 떠듬떠듬 놀랐다.
“따끔하지도 않네.”
“어떻게 독을 이겨냈지?”
“이겨낸 게 아니라 아예 영향을 안 받은 거야.”
나는 손을 펼쳐서 손바닥을 보여줬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운 손바닥이 보였다.
“그게 더 말이 안 되잖아!”
원숭이 머리가 성난 황소처럼 콧등을 찡그렸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내 손톱을 막았을 리 없잖아.”
나는 놈이 날린 손톱을 흔들며 비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네. 별것도 없으면서.”
“너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해방 연합과 관련이 있는 자인가?”
“해방 연합? 그건 또 뭐지?”
원숭이 머리가 입을 다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세를 낮추고 노려보는 걸 보니 또 손톱을 날릴 생각인 모양이다.
어떻게 하지?
개성적인 놈들의 생김새를 보자면 어떤 공격을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이번에도 손톱을 날릴까? 아니면 다른 수법? 처음 손톱을 날렸을 때 독이 발라져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음번에도 이런 놈을 만나게 된다면···.
원숭이 머리는 나보다 약해서 괜찮다. 하지만 나와 비등하거나 나보다 강한 상대가 저런 술수를 부린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을 때 파악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놈의 손톱을 호주머니에 챙겨넣고 손짓했다.
“덤벼. 원숭이.”
“무례한 놈! 원숭이라니!”
생선 대가리가 발끈해서 나서려는데 원숭이가 말렸다.
“내 이름은 원숭이가 아니라 퍼시픽 림이다.”
“퍼시픽 림? 이름이 꼭···.”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원숭이가 아까처럼 자세를 낮추더니 허공을 찢어발길 것처럼 손을 크게 휘둘렀다.
휘익!
예의 그 손톱이 비수처럼 날아와 내 목을 노렸다. 나는 내력을 이끌어서 손톱을 막았다. 막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채찍?
놈은 손톱을 엿가락처럼 늘려서 채찍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손톱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구나.
찌지직. 찌지직.
놈이 긴 손톱을 연달아 휘둘렀다.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따라서 났다. 나는 손날로 쳐서 손톱을 깨부수고 놈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잘려진 손톱이 덩굴처럼 자라서 다시 내 몸을 엄습했다. 재생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예사 손톱이 아니군.
원숭이는 빙판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고양이처럼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열 손가락의 손톱이 뱀머리처럼 날렵하게 내 몸을 난도질했다.
휘익. 휘익.
아프진 않은데 신경이 거슬린다. 피는 나지 않는데 옷은 찢어졌다. 백미에게 받았던 옷이 찢어져서 넝마조각이 되는 걸 보고 나는 깨달았다.
아, 옷을 생각 못 했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옷이었는데···.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퍼시픽 림이 흡족해했다. 내가 겁을 먹고 있는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다. 녀석은 손톱을 밧줄처럼 만들어서 내 몸을 휘감았다. 내가 말했다.
“재밌는 짓을 하는 군.”
“언제까지 여유로운 척 할 수 있는지 보자.”
녀석이 손을 오므렸다. 손톱이 더 강하게 날 옭아맸다.
파지직. 파지직.
끊으려고 보니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따끔하다.
“독, 전기, 그 다음은 뭐지?”
녀석의 손에서 붉은색 오러가 일었다. 마력의 파장을 읽어보니 섬뜩하다. 붉은색 오러가 손톱을 타고 내 몸을 붉게 물들였다.
이건 좀 위험하군.
마력이 칼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팔에 힘을 줬다. 밧줄처럼 날 옭아매던 손톱이 툭하고 끊어졌다. 팽팽하던 손톱이 끊어지자 퍼시픽 림이 버티지 못하고 몸을 휘청댔다.
녀석은 자세를 바로 잡더니 품에서 쇠로 된 바통을 꺼냈다. 약이 담긴 통처럼 생겨서 도핑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순간 바통이 장대처럼 길어졌다. 나는 여의봉을 떠올렸다.
휘익.
바통이 나를 향해 길어졌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피하고 생각했다.
신기한 무기네.
나는 재빨리 녀석의 뒤로 이동한 후 손을 가볍게 말아쥐고 뒤통수를 후려쳤다.
퍽!
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크, 너무 세게 쳤나?
녀석은 목이 꺾인 채 피를 토하며 벽 쪽으로 날아갔다.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박은 사람처럼 땅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졌다.
“티, 팀장님···!”
생선대가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팀장님?
별명이 팀장일 리는 없으니 직급이라는 얘긴데 직급이 꼭 회사원 같다.
“더 보여줄 건 없나?”
겨우 상체를 일으키는 녀석을 보고 내가 말했다. 녀석이 소리쳤다.
“인간 따위가···!”
“더 보여줄 게 없나보군.”
“나를 농락해!”
보여줄 게 더 없으면 길게 끌고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사냥감을 확인한 매처럼 단숨에 달려가 놈의 목을 붙잡았다.
뿌드득.
목을 잡고 비트는데 순간 놈의 몸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뭐지?
그 순간 뒷골이 선득했다. 나는 깨달았다.
아직 살아있군.
사람의 감각은 시각부터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늦게 파악했다. 시각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을수록 다른 감각이 무뎌진다.
“원숭이. 무슨 재주를 부린 거지?”
뒤를 돌아보니 퍼시픽 림이 기습을 하려던 자세로 굳어있었다. 그는 낌새를 들킨 걸 분하게 여기는 듯했다.
“분신술이다.”
“분신술?”
“나도 순순히 대답했으니 너도 내 질문에 대답해라.”
의사소통이 지 멋대로인 놈이군.
“글쎄···. 하나만 물어봐.”
“도대체 정체가 뭐지?”
나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인간.”
“어디에서 온 인간이지?”
나는 발로 땅을 두어번 찼다. 하계에서 왔다는 뜻이다.
“너처럼 강한 인간이 천외지 태생일 리는 없어.”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말했다. 답답한 녀석. 나는 그걸 정정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지구 태생인 걸 말하면 되려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천외지 태생이야.”
“말해줄 생각이 없나보군.”
“적어도 내가 인간인 건 알게 됐잖아.”
“개자식.”
녀석이 고개를 흔들고 곁눈질을 했다. 생선대가리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전투에 가세했다.
“두 명이서 덤빌 생각이냐? 비겁하게.”
둘은 내 대답을 무시하고 곁눈질로 의사소통을 했다. 작전이라도 짜는 모양이다. 눈짓만으로 의사소통이 잘 되네. 보여줄 게 더 남았나?
“덤벼. 원숭이, 생선대가리.”
내가 손짓하자 생선대가리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돌맹이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모양새다.
어어, 저건···.
수류탄?
나는 돌맹이처럼 생긴 물건의 정체를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천외천은 지구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이다. 수류탄 같은 투척무기가 없을 리 없다. 동굴 같이 좁은 지역에서 수류탄 같은 범위형 무기가 폭발하게 되면 위험하다. 나는 무사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생선대가리가 아니라 아가멤논이다!”
생선대가리가 소리치면서 수류탄을 던졌다. 나는 그가 던지자마자 번개처럼 달려가서 수류탄을 낚아챘다. 양손으로 감싸쥐니 사이즈가 내 두 손에 딱 알맞다.
터지는 걸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후 폭음이 났다. 손바닥이 따끔할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과 달리 열기만 느껴졌다.
이건··· 수류탄이 아니군.
손가락 틈 사이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걸 보니 연막탄인 모양이다.
나는 깨닫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원숭이와 생선대가리가 기계를 조작해 포탈을 열고 있었다.
“되게 재는 척 하더니 도망이냐?”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걸 보면 포탈이 확실하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근접해서 놈들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퍽. 퍽.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더 약하게 내려치니 놈들이 억하고 쓰러졌다. 퍼시픽 림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동료의 죽음을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그것만 알면 돼. 너와 싸울 생각은 없었어.”
“무작정 폭행을 해놓고 잘못 때렸다 사과하면 폭행이 무마되냐?”
대답이 없다.
“이 새끼 뺑소니범보다 더 나쁜 놈이네.”
“살려줘.”
“싫어.”
“우리를 죽이면 재앙이 내릴거야.”
“개소리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살인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묻는 것에 제대로 대답하면 생각해보고 살려주지.”
나는 그들에게 천외천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이들이 나달과 버켓을 죽인 나를 추척하고 있다는 사실과 내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 지구를 관리감독하고 있는 천외천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는 당분간 침략이 유예상태인가?”
“그래.”
“침략을 취소할 방법은?”
“없어.”
“너희들을 죽이면 침략이 취소되는 거 아냐?”
“다른 인원들로 배정될 거야.”
슬쩍 눈을 쳐다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다. 내가 인상을 구기자 퍼시픽 림이 찔끔해서 말했다.
“행성 공략을 취소할 권한은 공관의 관리경급 이상이 가지고 있어.”
“관리경급 이상?”
“공관의 말단직 계급이야.”
천외천의 공무원을 말하는 모양이다.
천외천인들도 제대로된 정부와 계급체계를 가지고 있는건가?
희소식이다. 모든 천외천인들을 상대할 필요없이 윗선만 휙휙 날리면 된다. 퍼시픽 림이 내 눈치를 살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이런 걸 왜 묻는 거지?”
“궁금해서.”
“궁금해서 라고···.”
이제 들을 건 다 들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챙겨놨던 녀석의 발톱을 꺼냈다. 녀석의 표정이 똥 한 바가지 먹은 사람처럼 파리하게 질렸다.
“그건 또 왜···?”
나는 말을 아끼고 놈들의 목에 한 방씩 찔러 넣어줬다. 내력을 실어서 두꺼운 가죽을 뚫으니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픽. 픽.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경독맥 부근을 찔러서 그런지 둘은 독에 중독돼 질식당하는 사람처럼 목을 긁고 피를 토했다.
“성실하게 대답해줬으니 살려는 주지. 이 독은 날 폭행한 죄값이야.”
운이 좋으면 살 것이고, 운이 나쁘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손짓으로 꺼지라고 말했는데 놈들은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독에 중독됐음에도 해독제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빨리 안 꺼져? 해독제 있다며?”
“컥, 헉, 헉···. 그, 그건···.”
“거짓말이었군.”
이 놈들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이었어.
나는 괘씸해서 놈들을 두들겨 팼다. 둘은 숨을 헐떡이더니 오래지 않아 움직임을 멈췄다.
죽었군.
“이 놈들을 찾으러 천외천에서 다른 놈들이 올까?”
백미가 말했다.
“천외천인들은 관리되는 편이지만 잘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공관의 하급관리 아스퍼거는 일 때문에 분주했다. 수많은 행정업무와 보고서, 행정자료의 검토. 초과근무와 야근은 하급관리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
분명 자기 처부의 일이 아닌데, 자기 계급에서 할 일이 아닌데, 계급과 처부를 가리지 않고 일감이 밀려 들어온다. 아스퍼거는 자신의 현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건수 하나만 물면 이딴 행정 업무도 안녕인데···.”
경력을 쌓아서 직급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한다. 일감의 대부분은 자기 일이 아니다. 열심히 검토하고 보고해봤자 남의 공만 세워주는 꼴이다. 그래서 생각해둔 게 천외천 내부의 일이었다.
해방 연합과 관련된 일.
공관은 반역자들에게 가차없다. 반대로 제보자들에겐 막대한 포상을 준다. 진급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올바른 제보의 경우에 한해서다.
며칠 전 해방 연합과 관련된 제보를 받았을 때 아스퍼거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해방 연합은 주도면밀하다. 일을 그렇게 대놓고 처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선에서 일을 처리했다.
제보자들이 천외지를 간다고 했을 때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귀찮은 보고절차를 생략하고 자기 선에서 처리하고 검토했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보고를 듣고 그의 죽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어, 어··· 이건?”
그룹의 팀장급 인원이 팀원과 함께 죽었다.
“이건 예사일이 아니야.”
* * * * * *
금방이라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는데 반응이 없다. 뒷수습을 하고 봉인을 확인하러 갈 때까지 다른 천외천인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걸 희소식이라 여기고 관심을 껐다.
백미를 따라서 산을 올라가는데 돌연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동굴을 가리켰다.
“여기야.”
불에 탄 것처럼 그을려서 새까만 동굴 입구를 보니 어째 으스스하다. 습기가 많아서 바닥도 질퍽하고 여러모로 기분 나쁜 곳이다.
나는 동굴 입구를 힐끗거리다가 두 팔을 문지르고 말했다.
“여기가 봉인된 곳이란 말이지?”
백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조 드래곤의 무덤이야.”
“무덤?”
존경한다고 하더니 무덤을 이따위로 만들었나.
나는 백미를 따라 동굴을 들어갔다. 휴지가 고대의 유산을 쥐고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