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95화 (95/127)

# 95

한참을 걸었다.

어정쩡하게 어두워서 눈에 힘을 주는데 휴지가 말했다.

“주인. 여기 되게 음산하다.”

“그러게.”

나는 바닥의 풀을 밟으며 생각했다. 무덤은 망자의 생전 위엄을 보여준다.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면 무덤이 으리으리해야 하는데 여긴 꼭 무연고지 무덤 같다. 아니, 무덤이라기보단 꼭 버려진 동굴 같다.

관리되지 않고 잿빛으로 죽은 풀들을 보면 확실하다. 여긴 버려진 곳이다.

‘게다가 이상하군.’

집중하다가 깨달았다. 마력의 파장도 심상치 않다. 기름같이 끈적끈적한 마력이 공기와 섞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분포돼있다.

인쌍을 찌푸리고 있는데 백미가 내 눈치를 살피고 말했다.

“일부러 이런 환경을 조성한 거야.”

“일부러 이런 환경을 조성했다고?”

무슨 개소리지.

“드래곤의 시체가 썩은 곳엔 마나가 풍부해. 마나가 풍부하면 동식물들이 모이고 동식물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몬스터가 늘어나지. 몬스터가 늘어나면 인간이나 수인족들이 꼬이게 되고. 여긴 시조 드래곤의 무덤이야. 마나가 풍부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곳이지. 벌레가 들끓기엔 최적의 장소란 말이지.”

“그래서 이런 어두침침한 환경을 조성한 거라고?”

“시조께선 봉인된 지역이 드러나길 바라지 않았어.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후대의 드래곤들이 무덤을 이렇게 조성한 거야.”

그런 이유였나.

“일종의 보호장치인 셈이지.”

“드래곤은 질서와 조화의 종족으로 순리를 지키는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미래를 보고 판단하신 거야. 일부를 보면 혼돈이지만 전체를 보면 질서거든.”

“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리는 계속 걸었다. 갈수록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져서 기분이 나빠진다. 거참, 더럽게도 잘 만들었네.

천장의 종유석이 충분히 날카로워서 저게 떨어지면 얼마나 위력적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드디어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휴지를 시켜서 라이트 마법으로 주변을 비췄는데 돌연 새까만 벽이 나왔다.

뭐지? 주변이 어두워진 게 아니라 이 벽 때문에 어둡다고 생각한 건가?

휴지가 벽을 살펴보고 말했다.

“이거 봐라, 주인. 벽에 이상한 글귀가 적혀 있다.”

백미가 벽을 쓰다듬고 말했다.

“여기가 봉인된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야.”

내가 팔짱을 낀 채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백미가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야.”

“여기까지라니?”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

나는 휴지가 들고 있는 고대의 유산을 가리켰다.

“혹시 이 문을 열기 위해선 저걸 이용해야 한다는 소리···?”

“아마도.”

“개소리군.”

“정확히는 몰라. 우리도 예언을 통해서 봉인을 열려면 유산을 사용해야 한다는 막연한 사실만 알고 있어.”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된 봉인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곤란한데···.

툭.

호기심을 품고 벽을 살짝 때려봤다. 밀도가 높은 반죽을 두들겼을 때처럼 소리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반죽과 달리 무척 단단했다.

“무덤의 대부분이 시조 드래곤의 비늘과 뼈로 만든 것들이야. 물리적인 피해는 안 먹히고 마나로 이루어진 공격은 흡수하지. 우리도 호기심에 수십 번 부수는 걸 시도해봤는데 입구를 깨부수지는 못했어.”

“우리 드래곤님들께서는 질서와 조화의 종족이 아니셨나?”

“지식의 탐구자이기도 하지.”

“어련하시겠어.”

나는 곁눈질로 고대의 유산을 가리켰다.

“그래서 저 지팡이가 필요하단 건가?”

“그래. 유산의 힘을 빌리면 입구를 부술 수 있어.”

“여기 벽에 적힌 글귀를 해석해야 하는 건 아니고?”

“그건 절대 아냐.”

백미가 고개를 흔들며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린 드래곤이야.”

“말 안 해도 알고 있는데.”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체 중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로운 최강의 종족이란 소리야. 우리가 해석하지 못하는 글귀는 없고 우리가 해제하지 못하는 봉인은 없어. 이건 해석해야 할 게 아니야.”

“이 봉인은 해제 못 하잖아.”

“해제하는 방법은 알고 있지.”

“그럼 글귀는?”

“의미 없는 글귀라고 생각해.”

“그렇단 말이지.”

나는 글귀를 집중해서 쳐다봤다. 동굴 전체를 감싸는 요상한 마력은 벽에 각인된 글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부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벽면에 써진 글귀를 매직아이를 볼 때처럼 사팔뜨기로 쳐다보고 있으니 실타래 같은 게 보인다.

익숙한 기운이다. 이건······ 소원석의 기운이군.

인상을 더 찡그려서 집중하자 실타래가 겹쳐져서 상형문자의 형태를 취했다.

“어, 어, 어···.”

나는 상형문자를 확인하고 뒷걸음질 쳤다.

“왜 그러지?”

백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천장 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종유석들이 빼곡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숭이. 위에 뭐라도 있나?”

“위쪽이야.”

“위쪽?”

이 벽은 문 같은 게 아니었군.

애초에 지팡이를 사용할 필요조차 없는 곳이었다. 벽에 숨겨진 요상한 마력은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집중해서 쳐다본 것만으로 그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소원석의 힘일까.

“위에 뭐가 있다는 거지?”

“잘 봐봐.”

나는 탄지공을 날려서 천장의 종유석 몇 개를 부쉈다. 그러자 파편이 떨어지고 가려졌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하기로는 본래 통로가 위쪽에 나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종유석으로 가려진 모양이다.

“저건 또 뭐야?”

백미가 인상을 구겼다.

“애초에 앞쪽이 아니라 위쪽이 입구로 가는 길이야.”

내가 웃었다.

“저쪽이 입구라고?”

“지상 최강의 종족이 원숭이보다 못할 때도 있군.”

“어떻게 알아냈지?”

“타고난 센스.”

내가 머리를 두들기며 으스대자 휴지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대단하다, 주인.”

그러다가 주저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주인. 계속 갈 거냐?”

“왜?”

“여기 여러모로 좋지 않다. 분위기만 이상한 게 아니라 마력의 분포가 이상하다.”

백미는 말이 없는데 휴지는 민감하다. 내가 느끼고 있는 걸 똑같이 느끼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칼을 뽑은 김에 무라도 써는 게 좋잖아.”

“그럼 무만 썰고 빨리 돌아가자.”

우리는 개구리처럼 뛰어서 종유석 사이의 통로로 진입했다.

“저게 진짜 문인가 봐.”

휴지가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올라가서 쳐다보니 긴 복도 끝에 돌문이 있었다.

“좋아.”

나는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날아가 돌문을 부쉈다. 내력을 실어서 주먹을 내지르자 돌문이 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후두두둑.

백미가 감탄을 내비쳤다.

“미쳤군.”

“왜?”

“시조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문을 한 방에 부쉈잖아.”

“이건 그냥 돌문인데?”

백미는 부서진 문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부를 살펴보는데 넓은 공터와 거대한 석상이 보였다.

석상은 양손 도끼를 역수로 쥔 야만인의 형상이었는데 상의는 웃통을 벗은 채로, 하의는 누더기 하나만 걸치고 있어서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근육도 역동적이군.

“진짜 살아 숨 쉬는 사람 같다, 주인.”

“그러게.”

크기도 어찌나 큰지 엄지발가락의 높이가 내 키보다 컸다.

“그래도 골렘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지금까지 던전을 돌면서 숱하게 겪어왔다. 석상이 사실은 골렘이었다는 패턴을.

하지만 저 정도 크기의 골렘이라면 핵 또한 어마어마하게 클 것이다. 그러니 골렘이 아니다. 골렘은 자동차와 비슷하니까. 튼튼하고 무겁고 덩치가 클수록 연비 효율이 안 좋아져서 덩치가 큰 골렘은 여러모로 제한이 많다.

“엄청나게 크다, 주인.”

“내 본체보다 훨씬 크군.”

얼핏 성체 드래곤 두 마리는 합친 것 같은 크기의 저 석상이 골렘이라면 마력을 얼마나 소모할지 감이 안 잡힌다. 애초에 저런 크기의 골렘을 제정신으로 만들 수나 있을까?

“비효율적이야.”

그러니 골렘일 리는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유유히 복도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저적. 쩌저적.

뭐지. 불안한 마음을 삼키고 고개를 치켜들자 공교롭게도 석상의 다리 사이가 보였다.

“으음···. 흉측하군.”

“석상이 팬티를 안 입었다, 주인”

백미와 휴지가 감탄을 흘리는 가운데 나는 깨달았다. 석상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누더기 아래의 아마존과 덜렁이가 내 동공에 새겨지듯 박혔다.

“참 디테일하게 잘도 만들었네.”

나는 즉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 * * * * *

지나친 신중함은 도리어 기회를 날릴 수도 있다. 아스퍼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보를 요약하고 분석하는 대로 공관의 본부청사에 보고했다. 행정업무가 많아서 처리가 늦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연합처리부로부터 부름이 왔다.

아스퍼거는 약속 시간에 맞춰서 처리부의 대장실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유기의 긴고아처럼 생긴 황금 띠를 머리에 두른 남자가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관리경 아스퍼거입니다.”

들어오기 전 충분히 목청을 가다듬었는데 자꾸만 목소리가 떨린다. 침을 삼킨 아스퍼거는 선망의 시선으로 관리대장을 쳐다봤다.

“자네가 올린 보고서는 봤어. 중견 그룹의 팀장이 팀원과 함께 천외지에서 사망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배후는 해방연합?”

“정황상 확실합니다. 그들은 지구에서 죽은 동료들의 배후를 쫓다가 연합이 있는 걸 확인하고 사망했습니다.”

“흥미롭군.”

관리대장 마렐퀴는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연합이 그렇게 티 나게 일을 처리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어떤 부분이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천외천인들이 모두 관리 감독 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잘 알고 있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단지 규칙이 그랬기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천외천인들은 모두 관리되고 있었다. 막연하게 추측하기로 상위층에서 구슬을 쉽게 빼돌리기 위해서라거나, 해방연합의 활동을 막기 위해서라는 추측만 나돌았다.

“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몇몇 천외천 인원들에게 감시카메라를 붙여놨습니다.”

“감시카메라?”

“예. 반역자들과 관련된 일이 있을 경우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감시카메라를 붙여놨죠.”

물론 물품 비용을 활동비에서 청구했다는 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뭐지?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천외지에서 죽은 팀장과 팀원이 보낸 분석 정보에서 전투력 90만의 인원이 식별되었습니다.”

“뭐?”

마렐퀴가 인상을 구겼다.

“전투력이 90만?”

“예.”

아스퍼거가 들어왔을 때부터 냉담하던 마렐퀴의 얼굴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천외지에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군.”

“직접 대면해서 보고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렐퀴는 표정을 감추고 물었다.

“그 말은 꼭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군. 원하는 게 뭐지?”

아스퍼거는 숨을 몰아쉬고 대답했다.

“제게 이 일을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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