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네게 맡겨달라고?”
“예.”
마렐퀴는 인상을 구겼다.
“상대의 전투력이 최소 90만이면 자네 수준으로는 상대도 안 될 텐데.”
관리경은 공관에서 가장 낮은 말단 계급이다. 전투력 수준도 가장 낮다. 관리경마다 차이가 있지만 전투력 90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제 분수를 압니다.”
“그럼?”
“정보를 수집하고 오겠습니다.”
“정보라···.”
마렐퀴가 턱을 까닥거렸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어떻게 수집할 생각이지?”
그 순간 아스퍼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호오, 투명화? 고유능력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투명화가 아니라 기척을 지우는 기술이지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았다.
“목숨을 걸겠다는 소리군.”
“예.”
마렐퀴는 생각에 잠겼다. 섣불리 일을 처리하는 것보단 신중하게 처리하는 편이 낫다. 귀찮은 일을 나서서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의심을 사고 있었는데 잘 됐군.’
접점이 없는 인물이니 부담도 없다. 문제는 실패 시 감당하게 될 책임의 무게다.
전투력이 90만?
정보 분석기의 측정 한계치를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수치다. 최소한 전투력이 90만이라는 것으로 상대의 전투력은 완전한 파악이 불가하다.
‘연합 내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거지?’
그런 무시무시한 인물이 천외지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니. 그것도 비밀리에.
‘내가 모르고 있는 일이 있나?’
마렐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중해야 한다.
“정보 제공은 고맙지만 자네 제안은 거절하지.”
“하지만···.”
“훌륭한 부하를 죽게 놔둘 수 없어. 자네 공은 확실히 알아두겠네. 이번 진급 때문이지?”
아스퍼거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따로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저 이번 진급 때 예쁘게만 봐주십시오.”
마렐퀴는 묘한 눈으로 아스퍼거를 쳐다봤다.
“좋아. 생각해두지.”
* * * * * *
옛말에 허우대만 멀쩡하다는 말이 있다.
“덩칫값을 못 하네.”
골렘은 어렵지 않았다. 내력을 실어서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으니 모래성이 무너지듯 거체가 쓰러졌다. 본래 골렘에겐 핵이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이 골렘은 핵도 없었다. 마력을 읽어보니 마치 몸 전체가 핵인 것 같았다.
분명해. 이걸 만든 놈은 변태일 거야.
골렘의 몸이 수복되기 전 무작정 두들기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거대한 몸체를 깨서 바위로 만들고 바위를 깨서 돌멩이로 만들고 돌멩이를 깨서 자갈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자갈을 모래로 만드니 골렘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괴물 같군.”
백미가 말했다.
“싱거운 소리 하지 말고 앞장이나 서.”
“생각 없이 꺼낸 혼잣말이니 싱거운 소리는 맞지.”
우리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벽을 부숴서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한기가 엄습했다.
“춥다, 주인.”
“변태 맞네.”
추워서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혔다. 어렸을 적 한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추웠다. 나는 내력으로 추위를 몰아내고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흰밥.”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는 게 없군.”
“들은 내용이 한정적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벽이 나왔고 나는 벽을 깨부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사우나처럼 더운 열기가 훅 몰아쳤다. 뜨겁군, 뜨거워. 사방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얼불노 컨셉이냐.”
“무슨 소리지? 원숭이.”
“네 조상이 변태라는 얘기지.”
나는 천마비행술로 날아서 발밑의 용암을 피하고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화염은 몸을 비틀거나 내력을 실어서 쳐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 막다른 벽에 도착했다.
툭.
호기심을 품고 벽을 때렸는데 이번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벽은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됐는데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평범했다.
“이제 함정이 없는 모양이다. 주인.”
“다른 유형의 함정일 수도 있어.”
마력의 파장을 읽어보니 아까처럼 복도 끝에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다른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함정이 끝난 건가?
“그러면 너무 싱거운데.”
우리는 유유히 걸어서 복도 끝에 도착했다. 막다른 벽에 붙어 있는 새까만 문을 살펴보니 아까처럼 별다른 글귀나 흔적이 없었다. 내력을 실어서 주먹으로 내리쳤는데 부서지지도 않았다.
“단단하군.”
“시조 드래곤의 뼈로 만든 벽이니까 당연하지.”
왜 부서지는 문과 부서지지 않는 문을 구분해놨을까.
나는 처음 맞닥뜨린 벽을 극복했을 때처럼 매직아이를 시도했다. 별다른 흔적이 없어서인지 느껴지는 변화가 없다.
그럼 이건 어떨까.
나는 탄지공의 출력을 조절해서 손끝에 응축시켰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손끝에 응집됐다. 내가 벽을 향해서 탄지공을 날리자 벽이 탄지공을 튕겨냈다.
핑!
도비탄처럼 튕겨진 탄지공이 백미의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등성이에 고속도로가 펼쳐진 것처럼 정수리에 일자로 스크래치가 만들어졌다.
“조심해, 원숭이. 죽을 뻔했잖아.”
“죽을 뻔한 것치곤 담담한데.”
나는 벽의 표면을 문지르면서 생각했다. 내력을 더 실어서 탄지공을 날려볼까? 내키지 않는다. 이번에도 탄지공을 튕겨낸다면 정말 일행 중 한 명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주먹으로 몇 번 더 내리쳐봤다. 여전히 변화가 없다.
휴지가 말했다.
“여기 까진가 보다. 주인.”
“흐음. 정말 그럴까?”
나는 백미를 쳐다봤다.
“흰밥. 뭔가 다른 말 들은 건 없어?”
“봉인을 해제할 때 고대의 유산을 사용하라는 말 밖에는···.”
“없나 보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휴지가 들고 있는 고대의 유산을 쳐다봤다.
저건 진짜 내키지 않는데···.
일단 내가 쥐기만 해도 내 기운을 흡수한다. 물 먹는 스펀지처럼.
처음 잡았을 때 밑 빠진 독처럼 끊임없이 내 힘을 흡수해서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봉인을 열기 위해, 힘들게 얻은 힘을 모조리 빼앗긴다면 그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까···.”
아니, 정말 없을까.
나는 새까만 벽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아까부터 소원석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몸의 내부에 있는 소원석의 기운을 이용하면 어떨까.
내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백미가 물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어 봐.”
나는 몸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소원석의 기운을 일깨웠다.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이는 것처럼 천천히 기운을 일으켰다. 물결이 일어나는 빈도가 더해질수록 호수의 파장이 커졌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유히 움직이는 건 힘들지만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는 있었다.
나는 소원석의 기운을 주먹에 실었다. 섬뜩한 마력의 파장이 주먹을 타고 불처럼 활활 솟구쳤다. 마치 심장이 주먹에 있는 것 같았다. 주먹의 존재감이 거대해져서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잘못하다간 힘에 먹히겠어.
“굉장하다, 주인.”
나는 공중제비를 도는 휴지를 무시하고 벽을 내리쳤다.
쾅.
벽이 갈라졌다. 한 번 더.
쾅.
그 뒤로 세 차례 더 내리치자 벽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숨겨져 있던 입구가 드러나자 백미가 기겁했다.
“맙소사. 이게 말이 돼?”
“말이 돼.”
주먹에 묻은 벽 가루를 탈탈 털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면 힘이 어디로 튀었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분명 이 벽은 그렇게 극복하는 게 아니었을 거야.”
“과정은 안 중요해. 결과가 중요하지.”
“주인. 몸이 좋으니까 머리가 편하다.”
나는 첫발을 내딛고 주변을 확인했다. 또 함정이 나올까?
내부는 밝았다. 천장의 종유석에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있는지 형광등처럼 밝았다. 그래서 내부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야. 이게 끝이야?”
좁은 원룸 크기의 공간이었는데 중앙에 네모난 기둥 하나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기둥의 윗면에 작은 드래곤 석상이 장식돼 있다.
여기가 시조 드래곤의 무덤이라고 했었지.
“혹시 이 네모난 기둥이 묘비 같은 거냐?”
“우리 드래곤들은 묘비 같은 거 안 세워.”
“그럼 이건 뭐야? 장식물도 그렇고 기둥 크기도 딱 묘비 사이즈인데.”
“글쎄···.”
기둥 밑을 파 봐야 하나. 나는 기둥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 어···. 이건 뭐야. 구슬?”
드래곤 석상의 입에 구슬이 물려져 있었다. 얼핏 보니 파란색 구슬이다.
“설마 파란색 구슬이 보상인 건가?”
황당해서 저절로 혀가 말렸다. 파란색 구슬은 중위에 속하는 구슬이다. 거창한 수식어를 가진 시조 드래곤의 보상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다.
콰득.
나는 석상의 입에서 구슬을 빼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평범한 파란색 구슬과 조금 다르다.
이건 파란색이라기보단 하늘색인 것 같은데···.
콰르르.
그 순간 지진이 난 것처럼 주변이 흔들렸다. 천장이 흔들리고 벽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렸다.
“어, 어, 어···.”
나는 떠듬떠듬 놀랐다. 정신을 집중해보니 주변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 내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주인. 괜찮나?”
“원숭이. 너 지금 뭐 하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이거.”
주변 공간이 잘 익은 국수 면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멀미가 나고 속이 매스꺼웠다. 포탈을 타고 공간이동을 할 때와 비슷했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어, 어, 어···.”
곧이어 미지의 장소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시조 드래곤의 무덤에 서 있었다. 단지 주변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나 혼자 색감이 살아있었다.
“어이, 흰밥. 휴지.”
나는 석고상처럼 굳은 휴지와 백미를 톡톡 두들겼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들은 반응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백미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드디어!
감탄 섞인 목소리였다.
뭐지?
나는 호기심을 품고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미지의 목소리는 내 오른손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네가 날 깨웠구나. 인간이여.
“누구?”
나는 손에 쥐고 있는 하늘색 구슬을 쳐다봤다.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예언이 실현되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누구신데요.”
-시조 드래곤.
말이 짧다. 하지만 그 파장은 짧지 않았다.
“겉모습이 드래곤이 아니라 파란색 구슬인데.”
-유산을 사용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왔구나. 너는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해졌어.
잘난 놈일수록 남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조 드래곤이 그랬다.
-아주 오래전 세 드래곤이 있었다. 난 그중 신뢰와 성실, 불멸과 청결을 담당하는 블루 드래곤. 오랫동안 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얘기는 백미로부터 들었는데···.”
-실버 드래곤은 하계로 가고, 블루 드래곤인 나는 이곳에 남고, 레드 드래곤은 상계로 갔지.
“그 얘기도 들었어요.”
-실버 드래곤은 이미 너도 만났을 거다. 네가 만난 소원석. 네가 흡수한 그 구슬이 실버 드래곤이니까.
“어, 어···.”
이건 듣지 못한 얘기다.
“실버 드래곤이 소원석이었다고?”
-그래. 하계로 내려간 실버 드래곤이지.
은근히 반말을 했는데 상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소원석에게 듣지 못했는데.”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하긴 그렇지.”
그 순간 손이 따끔하면서 정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하늘색 구슬이 말했다.
-소원석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군. 몸 내부에서 기운이 따로 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