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97화 (97/127)

# 97

“무슨 소리지?”

-네가 가진 어마어마한 힘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버가 가진 힘은 순수함과 완전함. 정화력도 가지고 있지. 그런데 넌 그런 거대한 힘을 얻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우물처럼 퍼다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겨우 한 두 방울 끌어다 쓰는 정도야. 아주 심각해.

“······.”

입을 닫고 있으니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또 중얼거린다.

-네 기억을 훑은 대로 표현하자면 이건 3000조의 재산을 가진 세계적인 거부가 천장에 매단 굴비로 맨밥식사를 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격이야.

“표현이 신랄하네.”

-겸손한 표현이지. 흐음. 가만 보니 실버의 힘을 깨닫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군. 그래서 그런가···.

맞는 말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 내 몸에 잠재워진 소원석의 힘을 알지 못했다. 위기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럭키 가이처럼 우연찮게 소원석의 힘을 일깨웠을 뿐이다. 제대로 활용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흐음···,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건 완전히 모르고 있다가 겨우 깨달은 거군. 아무리 실버의 기운이 순수하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각하군.

구슬은 여전히 자기 할 말 만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건 시조 드래곤의 공통점인가. 소원석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도와주지.

“네가? 어떻게?”

-우리 시조 드래곤들은 본디 한 몸이었다. 그러니 서로의 힘을 제 능력처럼 잘 알고 있지. 몸에 힘을 풀고 정신을 내게 집중해라.

나는 잠깐 주저하다가 그의 말에 따랐다. 딱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달변가가 말하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하늘색 구슬에 온 정신을 집중하자 새파란 정전기가 내 몸을 타고 흘렀다.

파지직. 파지직.

전신이 따끔했다. 절벽에 올라서서 밑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뒷골이 선득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다잡는데 구슬이 말했다.

-됐다.

“됐다고?”

-끝났어.

3초밖에 안 흐른 것 같은데?

지나치게 심플하다.

“너무 간단한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네가 의식을 잃어서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야. 듣던 대로 그릇이 거대하군. 이 정도 크기의 그릇이라면 모든 걸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겠어.

주변은 여전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회색빛으로 굳어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인은 해봐야 한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운기를 시작했다. 정통적으로 운기를 배운 게 아니라서 혈자리의 이름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기운을 다스릴 줄 안다. 시스템으로 체득한 능력의 장점이다.

잠시 후 내 입에서 짧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허.

밑바닥에서부터 믿을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내력이 족히 두 배는 많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내력의 양만 늘어난 게 아니다.

“기운의 성질이 바뀌었어.”

천마신공을 익힌 뒤로 순수했던 내 내력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다르다는 유사과학처럼 내력도 마찬가지다. 내력은 사람의 인격에 소소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항상 급하게 행동했고 쉽게 발끈했으며 이성을 죽이고 감정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정신이 말끔하다. 아니, 완전히 말끔한 건 아니지만 개운하다. 몸을 씻고 사우나에 들러서 땀을 흠뻑 뺀 기분이다.

구슬이 말했다.

-힘을 완전히 흡수시키지는 못했어. 오랜 시간 기운을 썩혀 두고 있어서 쉽게 섞이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물꼬를 트여놨으니 차차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모든 기운을 흡수하게 될 거야.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건가.

“굉장해. 고맙다.”

-천만에. 내가 더 고맙지.

나는 순수하게 기뻐서 공중제비를 돌다가 돌연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잠깐. 무슨 소리지?”

-왜?

“네가 왜 고맙지?”

-너는 천외지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 줄 인물이니 당연히 고맙지.

“내가?”

-그래.

“누구한테 너희를 해방해준다는 거야?”

-천외천의 황제.

드래곤과 비슷한 말을 지껄이는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무슨 소리냐?

“아니, 난···.”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뒷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실버에게 듣지 못했나. 너는 본디 세상을 구할 운명으로···.

나는 말을 잘랐다.

“그래. 맞아.”

-흐음···.

구슬이 의미심장한 침을성을 삼킨다. 매끈한 표면에 눈이 달려있다면 나를 째려보고 있을 것 같다.

소원석은 내 본심대로 행동하라고 했다. 나는 지구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천외지나 다른 존재들은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살든, 죽든, 지지고 볶든 그것은 모두 그들의 몫이다. 내 몫이 아니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능력이 된다면 구하는 거고 아니면 버릴 수밖에 거지.’

물론 내 자손인 주리스나 아르카디아의 사람들은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본심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괜스레 솔직하게 말해서 유리한 분위기를 바꿀 필요는 없다. 머쓱해져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휴지가 쥐고 있는 고대의 유산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건 대체 뭘까.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런데 저 지팡이는 뭐지?”

-지팡이?

구슬이 관심을 보였다.

“드래곤들은 고대의 유산이라고 부르더군. 내 힘을 다짜고짜 흡수했어. 소원석이 들고 있는 기운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떠올리니 섬뜩하다.

“메마른 사막처럼 내 힘을 끝없이 흡수했어. 저건 대체 뭐지?”

-혼돈의 파편이다.

“혼돈의 파편? 고대의 유산이 아니라?”

구슬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고대의 유산이라··· 어쩌면 그렇게 불릴 수도 있겠군. 저 지팡이는 우리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정확한 정체는 몰라. 다만 네게 전해주라고 들었다.

억겁의 세월을 살았던 시조 드래곤조차 모르는 건가.

“내게 전해주라고?”

-그래.

“누가 그랬지?”

-시작의 존재, 모든 것을 아는 선구자, 첫 의식이 말했다.

“첫 의식?”

의문을 표하자 구슬이 대답했다.

-최초의 생명체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졌다는 표현이 어울리겠군.

“그렇군.”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결론은 시조 드래곤도 지팡이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는 건가.

저 지팡이는 대체 뭐지. 모든 것을 아는 선구자, 첫 의식은 또 뭐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구슬이 말했다.

“힘을 회복되는 대로 천외천으로 갈 수 있는 포탈을 열어주지. 일주일 정도 걸리겠군. 그때까지 떠날 준비를 끝마쳐라.”

* * * * * *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마렐퀴는 그 말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정치 암약에 휘말려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을 때 그는 자신의 미래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았다. 실제로 끝났다. 자신을 깎아내린 상대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고 자신은 무저갱 같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복수는 손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어졌고 꿈속에서나 가능해지는 희망이라는 단어 안에서만 살아 숨 쉬는 이야기가 됐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천외천에서 수백, 수천, 수만 개가 있는 수많은 그룹들 중에서 고작해야 팀장이었던 그는 그들을 만나고 공관에 입성했고 관리경을 지나서 관리장, 그리고 대장급이 됐다.

탄탄대로였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쉽게 강해질 수 있었고 원하는 걸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다.

어느새 마렐퀴는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는 그들의 단체에서 어느 정도 입김을 내뱉을 권한이 생겼다. 그 탓에 윗선의 경계를 받아서 진급 길이 막히게 됐다.

마렐퀴는 기회주의자였다. 배 위에서 누린 게 있어도 배가 침몰하면 지체 없이 배를 버릴 사람이었다. 해방연합의 감투가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헌 모자를 버리고 새 모자를 쓰면 된다.

최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실수를 한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기억이 의심된다.

‘왜 내가 모르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거지.’

마렐퀴는 지하시설로 이동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스퍼거의 보고를 받고부터 찝찝하다.

사람은 모자를 버릴 수 있어도 모자는 사람을 버리면 안 된다. 아니, 버릴 수 없다. 마렐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투력의 한계치를 넘어선 존재가 왜 천외지에 있는 걸까.’

연합으로부터 그런 작전은 들은 적이 없다. 전투력 90만 이상의 거물이 움직이는 작전이라면 자신이 모를 수 없다. 아니, 몰라선 안 된다.

혹시 그 작전은 자신이 알면 안 되는 작전이 아닐까.

연합에서 먼저 자신을 내칠 생각을 가진 게 아닐까.

불안이 의심을 만들고 의심이 불안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아스퍼거의 보고 타이밍도 이상했다. 윗선에서 의심을 받아서 마음을 조리고 있을 때 마침 해방연합에 대한 제보를 해왔다.

수많은 대장급들 중에서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왜 자신에게 보고를 한 걸까.

마치 물고기가 된 것 같다. 누군가 미끼를 던져놓고서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다.

‘빌어먹을.’

마렐퀴는 불안하고 초조해서 해방연합의 간부실을 찾았다. 지금 시간이면 자신의 윗급인 태경급이 있을 시간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은색 왕관을 쓴 노인이 보였다.

“마렐퀴. 자네였군.”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하드버 태경님.”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나?”

마렐퀴는 이곳까지 오면서 결심을 끝냈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미끼가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물겠다. 연합을 배반하겠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주저하는 게 오히려 의심을 사는 길일 것이다.

“제가 모르는 비밀작전 때문에 왔습니다.”

“비밀작전?”

“예.”

“무슨 소리지?”

마렐퀴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껏해야 모자 주제에. 하지만 목이 잘리기 싫다면 허리를 숙여야 한다. 허리를 숙여서 모자를 써야 한다.

“아스퍼거 관리경에게 보고 받았습니다. 천외지에 전투력 90만의 존재가 있다고···. 한 그룹의 팀장과 팀원들을 죽였다고 하더군요.”

“전투력 90만?”

“예. 측정 최소치라서 정확한 수치는 아닐 겁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제가 모르는 작전이 수행되고 있는 거죠?”

하드버는 마렐퀴를 노려봤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군. 최근 윗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 그래서 숨을 죽이고 다른 작전을 하지 않고 있네.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합에선 최근 수행한 작전이 없네. 지금은 때가 아냐.”

“하지만 실제 팀장과 그룹 인원들이 죽었습니다. 아스퍼거 관리경의 보고는 조작된 게 아닙니다. 전투력 90만 이상의 인원이 천외지에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마렐퀴는 아스퍼거에게 받은 보고서와 자신이 별도로 조사한 보고서를 하드버에게 건넸다. 허드버가 빠르게 보고서를 훑고 말했다.

“우리 연합을 잡기 위해 윗선에서 덧을 놓은 것일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마렐퀴는 고개를 내저었다.

“팀장과 팀원들의 목숨은 큰 가치가 없습니다. 문제는 전투력 90만의 인원입니다.”

“무슨 소리지?”

“미등록자입니다. 그래서 연합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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