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미등록자라···.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천외천인들의 신병은 전원관리 된다. 전투력의 측정 한계치를 돌파한 존재가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자라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정말 모르시고 계셨던 겁니까?”
“전혀. 처음 듣는 얘기야.”
하드버의 반응에 마렐퀴는 미간을 좁혔다.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 쪽의 인원이 아니라면··· 그럼 그 인원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나도 몰라. 다만 추측하자면···.”
“추측하자면?”
“우리를 잡기 위해 깔아놓은 일종의 함정이 아닐까 싶은데···.”
마렐퀴는 숨을 죽였다.
“함정? 무슨 함정을 말하는 겁니까?”
“진실을 감춰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수법이지. 생각해봐. 우리가 흔히 하는 짓이지 않나.”
“그게 도대체 무슨···.”
“전투력 측정 한계치의 인원이 갑자기 튀어나왔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정보가 자네에게 무사히 전달됐지.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뭐겠나?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는 거야. 어쩌면 자네가 이곳에 온 것부터 놈들의 미끼를 문 것일지도 몰라.”
“그런···.”
마렐퀴는 순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럼 이 모든 게 놈들의 함정이라는 겁니까?”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애꿎은 천외천의 그룹 인원들이 죽었는데···?”
“대신 연합의 정체를 밝혀낼 수단을 얻었지 않나.”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걸리지도 않을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룹 인원들을 미끼로 삼다니.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드버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확신하고 있었겠지.”
“확신? 제가 함정에 걸릴 걸 그들이 예지라도 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는 천장을 가리켰다.
“황제.”
마렐퀴가 의아해서 물었다.
“황제? 무슨 뜻입니까?”
“황제는 천외천의 모든 시스템을 관리하는 정점의 계급이자 감투지. 황제가 왜 황제의 자리에 군림할 수 있는 지 아나?”
마렐퀴는 짧게 생각하고 말했다.
“천외천의 인원들 중 가장 강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냐.”
“그러면?”
“정점은 단순히 강하기만 해선 안 되네.”
“그 말은··· 그러니까, 황제가 예지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하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그 파장은 사소하지 않았다.
“아마 모든 일들을 예지하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예지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맙소사.”
“그리고 황제의 예지능력 탓에 우리 해방연합의 건물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지.”
하드버는 책상을 톡톡 두들기고 말을 이었다.
“천외천에서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네. 고대인들이 세웠다는 성스러운 장소에서만 그의 눈을 피할 수 있지.”
“성스러운 장소···?”
“황제가 몇 살이나 먹었는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아무도 몰라. 다만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갈 존재라고만 알고 있지. 나는 과거에도 그에게 대항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네. 그 대항자들이 황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장소가 바로 이곳 성스러운 장소지.”
마렐퀴는 입을 다물었다.
충격적인 사실들에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이 모든 얘기들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드버가 말했다.
“자네는 의심이 많군.”
“······.”
“의심해봤자 나오는 건 없어. 증거가 없는데 뭐가 나오겠나.”
하드버가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 의심하는 건 적들의 수중에 놀아나는 꼴이네. 그렇지 않나? 자네도 마찬가지야. 아직 놈들은 심증이 있을 뿐이네. 물증이 있었다면 자네를 진작 체포하고 남았겠지. 자네가 멀쩡한 건 증거가 없기 때문이야.”
“그건···.”
맞는 말이다.
“내가 한 가지 충고를 하지. 스스로 알아낼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땐 일단 눈을 감고 귀를 막게. 입으로만 숨을 쉬면 간단하지. 그리고 운명에 맡기게.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마렐퀴는 침을 삼켰다. 속마음이 들킨 건 같아서 언짢아졌다.
“충고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드버가 대화를 끊고 말했다.
“용무는 끝났나?”
“일단은··· 그렇습니다.”
“자네가 보고한 건에 대해선 알아보고 연락을 주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조심히 행동하게. 요즘은 보는 눈이 많아. 최근 들어 윗선에서 연합을 처리하려고 부쩍 신경 쓰고 있어.”
“예. 그건 주의하겠습니다.”
마렐퀴는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하드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개를 낮추면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지. 하늘만 높은 게 아니라 땅도 넓네. 목숨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밑바닥도 나쁘지 않아. 욕심을 버리고 행동하게. 아,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
마렐퀴는 괜히 목젖을 쓸어내렸다.
“알겠습니다.”
하드버의 단순한 충고가 그에겐 경고처럼 들렸다.
* * * * * *
하늘색 구슬은 내게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 그는 천외천으로 가게 되면 나머지 시조 드래곤의 흔적을 찾으라고 말했다.
남은 시조 드래곤이 레드 드래곤이었던가.
실버는 하계로, 블루는 중간계로, 레드는 상계로 올라갔다더니 천외천으로 간 모양이다.
찾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마력의 파장을 이용하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구슬의 말에 납득하고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마치 군 입대를 앞둔 스무 살의 청년처럼 하고 싶은 걸 마음껏 즐기면서 보냈다.
약속한 기일이 3일쯤 남았을 때 백미를 닦달해서 그의 보물창고를 털었다. 그는 드래곤답게 창고에 쌓아둔 무구들이 많았다.
“우와. 이걸 다 주겠다고?”
역시 드래곤이라 그런지 통이 크네.
내가 무구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을 보고 감탄해서 말했다.
“다는 안 돼.”
“그럼?”
“두 개만 주지.”
백미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몸집은 엄청 큰 놈이 마음은 코딱지만하네.
“꼴랑 두 개?”
“여기 있는 무구들은 내 평생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모은 것들이야.”
“최대한 도와주겠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나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성격이야.”
같은 동족이 죽는 건 이해하더니, 웃긴 성격이네. 다른 드래곤들과 마찬가지로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은 건가.
나는 더 따지고 몰아세우려다가 고개를 흔들고 레어에 깔린 무구들에 집중했다. 두 개도 나쁘지 않다.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지만··· 중요한 순간이 닥치면 잡다한 것 여러 개보다 오히려 알짜배기 한 두 개가 나을 수도 있다.
나는 산처럼 쌓인 무구들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가장 쓸만한 장비가 어느 거지?”
백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말했다.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야지.”
“끝까지 비협조적이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협조해준 거야. 그 점을 제대로 알아줬으면 좋겠군.”
“어련하시겠어.”
나는 백미를 지나친 뒤 정보분석기를 착용하고 무구의 산을 훑었다. 예상대로 분석기를 사용하니 무구들의 정보가 고스란히 보였다. 문제는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걸 언제다 비교하지?”
10분쯤 무구들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똥씹은 표정을 짓자 백미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비교할 거야? 빨리 결정하라고.”
“네가 도와주면 금방 끝나겠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나는 놈의 말을 끊고 말했다.
“공과 사? 그 발언 책임질 수 있어?”
“무슨 소리지?”
“만약 네 도움이 부족해서 너희들의 목적에 차질이 생긴다면 말이야···.”
그리고 뒷말에 힘을 줬다.
“엄청 재밌겠다. 그지?”
놈의 얼굴이 길가에 버려진 깡통 캔처럼 찌그러졌다. 그제야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모양이다. 놈이 손바닥을 비빔박자로 비비며 말했다.
“큼큼. 뭐가 필요하지?”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손해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행동한 것 같다. 영리한 놈. 나는 내 몸을 한 차례 훑어본 후 말했다.
“일단 갑옷이 필요해.”
시련의 탑에 있을 때 방어구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몸이 강해진 이후로 방어구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관리하기 귀찮아서였다.
드래곤이 들고 있는 장비 중에는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방어구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요구사항을 간단히 요약해서 전달했다.
“가볍고 편하고 관리하기 쉬운 갑옷?”
“그래.”
“흐음. 그런 갑옷을 원한다면···.”
백미가 무구들의 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주 특별한 게 있지.”
그리고 염력을 사용해서 훑더니 한참 만에 무구더미에서 새하얀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뭐야?”
나는 두 눈을 치켜떴다. 이곳에도 떡이 있었나. 그보다 왜 지금 이런 상황에서 떡을 꺼낸 거지? 백미가 꺼낸 것은 하얗고 동그랗게 생긴 것이 영락없는 찹쌀떡이었다.
“나보고 먹으라고?”
“아니, 이건 먹는 게 아니다. 갑옷이다.”
“갑옷?”
아무리 봐도 갑옷처럼 안 생겼는데.
“의문을 가지기 전에 한 번 만져보는 게 어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미의 요구대로 행동했다. 반원 모양의 그것을 만지자 순식간에 내 손을 타고 올랐다.
“어, 어, 어···? 이건 뭐야?”
떡의 몸이 슬라임처럼 수십 배로 늘어났다. 몸을 감싸 쥐는 것처럼 투명한 막으로 변하더니 마치 전신 쫄쫄이 타이즈처럼 변했다. 하얀색 얇은 막은 색깔이 불투명해지고 이내 검은 빛으로 바뀌었다.
“이거 신기하네.”
나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원, 투 펀치를 날리고 가볍게 뛰어봤다.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아무 저항감이 없다. 이게 갑옷이라고?
“놀랍군.”
역시 드래곤이 들고 있는 장비는 뭐가 다르긴 다르다.
“마음에 드나?”
“그래. 좋네. 마음에 쏙 들어.”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갑옷이야. 그래서 마나를 싣기도 편하고 수리하기도 편하지.”
“마나로 이루어진 갑옷? 그게 가능한 건가?”
“만드는데 오래 걸렸어. 불가능하진 않더군.”
마나로 이루어진 갑옷이라니 이런 괴상한 모습도 이해가 된다.
백미가 손가락을 튕기고 말했다.
“혹시 싸우는 도중에 갑옷이 파괴된다면 수리는 마나를 주입하면 돼.”
“굉장하네.”
“천외천의 놈들과 싸운 당시에 개발된 물건이야. 만드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써먹을 일이 없었지만 결국 이렇게 쓰게 되는 군. 잘 됐어.”
“그래. 고맙게 잘 쓸게.”
나는 정말 마음에 들어서 몸을 몇 차례 더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왜? 무슨 문제 있나?”
“이거 실용성은 좋은데 외형이 좀 신경 쓰이는 군.”
나는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갑옷이 쫄쫄이 타이즈처럼 몸에 꽉 끼이다 보니 몸의 윤곽이 다 드러나서 중요한 남성성까지 면밀하게 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민망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약점을 훤히 드러낸다는 점이 거슬렸다.
“갑옷의 모습도 네 의지대로 바꿀 수 있어.”
“오. 진짜네.”
말을 듣자마자 신경을 썼더니 타이즈 같았던 갑옷의 모습이 변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후로 유용해 보이는 장비들을 구경 하고 각종 포션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챙겼다. 한참 수집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유선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드래곤의 사체 판매를 그녀에게 맡겼었다. 드래곤의 사체가 모두 팔렸나.
“뭘 그리 급하게 뛰어와.”
판매된 구슬을 주러 온 것이라 판단하고 그녀를 쳐다봤는데 손에 들린 게 없다. 빈손이다. 뭐지? 구슬을 아공간 주머니 같은 곳에 담아 온 건가.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말했다.
“주은성. 문제가 생겼다.”
“문제? 무슨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