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유선이 조심스레 말했다.
“드래곤의 시체를 빼앗겼어.”
“시체를··· 빼앗겼다고?”
나는 황당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이지?”
“농담이 아냐.”
“그럼 장난치는 거냐? 나 이런 장난 싫어해.”
나는 유선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재미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백미처럼 속내를 숨기는 건가.
드래곤의 사체는 비싸다. 빼앗겼다는 거짓말로 조금이라도 빼돌린다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대놓고 거짓말 치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련히 빼먹으면 이해할 참이었다. 드래곤을 유통판매 하는데 수고가 들어가는 만큼 나는 그 비용을 제대로 쳐줄 생각이 있었다.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야.”
유선이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뭐야?”
“평원 오크족들에게 빼앗겼어.”
“평원 오크족?”
“그래. 놈들이 다짜고짜 거래소를 기습해서 드래곤의 시체와 구슬들을 강탈해갔어.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있어서 대응을 못 했는데···, 덕분에 사체를 판매하고 있던 수인족들까지 모조리 끌려갔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여기 오크족도 있었나?”
“응.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오크족이 있어.”
그러고 보니 천외지에는 수많은 이주민 종족들이 있다고 했다.
“너희 수인족이 여기 천외천에서 가장 강한 것 아니었어?”
“지금까지는 그랬어.”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유선은 백미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숨을 훅 들이켜고 말했다.
“드래곤이 죽었어.”
“그건 알고 있어. 내가 죽였으니까. 그게 왜?”
“천외지에서 우리 수인족의 영향력이 가장 큰 건 맞지만 그건 우리 뒤에 드래곤이 있었기 때문이야.”
“드래곤 없이도 너희 수인족이 가장 강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 얘기야. 하지만 우리 수인족들은 수가 적어. 여러 종족으로 나눠진 수인족들을 통합하고 규합했는데도 천외지 종족 중에서 가장 머릿수가 적은 편이야.”
“실제로는 전력이 부족하다는 건가.”
“그래.”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백미를 가리켰다.
“하지만 아직 실버 드래곤이 남아있잖아?”
내가 물건 취급하듯이 취급하자 백미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유선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맞아. 아직 백미님께서 남아계시지. 하지만 평원오크족들은 본래 호전적인 종족이야. 지금까지 그들이 생각하는 천외지의 드래곤이란 죽지 않는 존재, 불멸의 존재, 신과 근접한 자연의 수호자처럼 신의 대리인 그 자체였어. 하지만 주은성 네 손에 홍미님과 청미님이 죽자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 그들은 더 이상 드래곤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 수인족들을 겁내지 않는 것 같아.”
“겁을 상실했네.”
“맞아. 그래서 우리를 공격한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오크는 본래 무식하고 앞뒤 없는 성격이다. 고삐가 풀린다면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수인족들은 뭘 하고 있지?”
“그게···.”
유선은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사실 제대로 된 대책을 아무것도 못 세우고 있어.”
“왜?”
“그게··· 탁상공론 중이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수인족들은 너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서 이번 실책에 대해서 책임을 질 사람을 정하고 있어. 네가 드래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각 수인족 대표들은 네가 드래곤의 사체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엄청나게 분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어.”
“그래서 책임질 사람을 정하고 있는 건가? 내 분풀이로?”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황당할 뿐이다.
“그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안 하고 그런 것에 힘을 쏟고 있다고?”
“오크들을 토벌할 토벌단의 병력을 분배하는 것도 문제야. 각 대표들이 자기 종족의 손익계산만 신경쓰고 있어서···.”
내 인상이 구겨지자 유선이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미안해.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을 못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웃기는 노릇이군.
당장 시조드래곤과 약속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에서 천외지로 넘어왔을 때처럼 시기가 맞아야 천외천으로 넘어갈 수 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수인족 대표들을 닦닥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이들이 나서봤자 시간만 지체될 뿐이다.
“평원오크족은 어디있지?”
“내가 안내할게.”
* * * * * * *
목책으로 둘러진 드넓은 평원에 몽골 전통집 게르처럼 생긴 원형천막 수백개가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원형천막에서 중년의 오크가 나왔다. 그는 오른손에 소의 머리뼈와 척추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홀홀홀.”
평원오크족의 족장 칼라크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노획한 물품들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드래곤도 별 거 아니었군.”
그는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나눠진 드래곤의 사체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간 드래곤의 눈치를 본다고 좀이 쑤셨다.
천외지에 온 뒤로 수인족의 규칙에 따라서 대륙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지냈다. 약탈과 방랑을 일삼던 평원오크족에겐 전혀 맞지 않는 삶이었다.
정착생활은 힘들었고 관습처럼 굳어진 유목생활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돌파구가 생겼다. 드래곤이 죽은 것이다.
“드래곤도 결국 생명체였어.”
드래곤의 소멸을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대한 존재의 소멸은 천외지 곳곳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나 마력능력이 뛰어난 족장 칼라크는 홍미와 청미의 죽음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것이 기회였다. 드래곤이 세 마리였을 때는 감히 덤빌 생각을 못했는데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되자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지전능한 드래곤이 일개 인간에게 죽었다는 사실도 한 몫했다. 수인족 왕국을 감시하는 부하들에게 그 사실을 들은 참이었다.
“수인족들의 상황은 어떻지?”
칼라크가 정찰을 끝내고 온 정찰단장에게 물었다.
“경계지를 확인한 바로는 아직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군.”
“생각보다 수인족들의 보고 체계가 느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
“보고는 이미 받았을 거야. 준비를 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지.”
“그렇습니까?”
정찰단장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칼라크가 말했다.
“그래. 무능한 놈들이 머리를 쥐고 있으니 이렇게 결정이 느린 거야. 저들끼리 치고 박느라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너 멀쩡한 오크가 갑자기 모르는 놈에게 칼을 맞으면 어떻게 행동 하는 지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정찰단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칼라크는 쓰게 웃었다. 평원오크족은 다른 차원에서 온 오크들답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오크들이었다. 하지만 평균적인 지능은 선천적인 천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대부분의 오크들은 머리가 좋지 못했다.
“연약한 인간들과 엘프는 갑자기 공격을 당하면 자신의 상처부터 돌보겠지. 우리 오크들은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 공격한 놈의 얼굴을 확인부터 할 것이다. 그런데 저들을 봐라.”
칼라크가 경계지 너머의 수인 족 왕국을 가리켰다.
“저들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도 않고 누가,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확인도 하지 않지. 멀쩡한 놈들이 아니라는 증거야.”
정찰단장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갸우뚱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크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머리가 말썽이니 손발도 망가지는 거야. 오래지 않아 저들의 왕국은 우리 평원오크족 발아래에 떨어질 것이다.”
정찰단장이 물었다.
“저들을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당연한 수순 아닌가.”
“저는 단지 드래곤의 사체를 훔치려는 건 줄만 알고···.”
“그것도 있지.”
“하지만 수인 족들은 우리 평원오크들보다 전투력이 강합니다.”
“대신 우리는 수가 많지.”
“저들 뒤에는 실버드래곤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어떻게···.”
칼라크는 혀를 쯧쯧 차더니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손목을 마저 푼 뒤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가 서 있는 발치에는 드래곤의 시체들이 조각조각 놓여 있었다. 살점과 뼈 무더기가 군데군데 사라진 상태였지만 한 마리 몫을 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잘 봐라.”
칼라크가 일갈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의 마력이 폭풍처럼 일어나더니 이내 파도처럼 물결쳤다. 칼라크가 지팡이로 드래곤의 사체를 가리키자 거대한 마력의 파도는 드래곤의 시체에게로 유유히 흘러들어갔다.
스스슥.
지푸라기를 태웠을 때처럼 새까만 연기가 피어나고 사체의 살점이 흙덩이처럼 떨어져내렸다. 살점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뼈마디만 남게 되자 드래곤의 시체가 스스로 뼈조각을 맞추더니 거체를 일으켰다.
시체는 곧 입을 크게 벌리고 표효했다.
끼기기긱.
발성기관이 없어서 초라하게 바람 빠진 소리만 났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정찰단장이 놀라서 소리쳤다.
“맙소사! 이, 이건···!”
“본 드래곤이다.”
“이것이 드래곤의 사체로 만들 수 있다는 그, 본 드래곤···.”
칼라크는 본 드래곤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원오크족은 다른 차원에서 온 오크족답게 특이한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자소생술. 생전능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본 드래곤은 분명 큰 전력이 될 것이다.
“운이 좋았어. 일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다니···. 하늘도 우리편이라는 건가.”
수인족들의 뒤에 실버드래곤이 있어도 괜찮다. 본 드래곤이 있는 한 충분히 해볼만한 싸움이다. 칼라크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쿵!
그때 지진이 난 것처럼 땅바닥이 흔들렸다.
“뭐야!”
정찰단장이 고함을 치자 목책 근처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오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침입자입니다!”
“침입자?”
정찰단장은 어이가 없어서 두 눈을 치켜떴다. 저 멀리 목책 아래에서 개미크기의 작은 무언가가 보였다. 너무 멀리 있어서 마치 검은 점 같았다.
“저게 침입자···? 둘 밖에 없잖아?”
집중해서 봐도 더 이상의 인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둘이서 이곳에 침입했다고? 제정신인가?
그때 작은 점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강렬한 밝기에 놀라서 급히 눈을 감는데 빛이 직선으로 날아와 본 드래곤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파가각!
굉음이 일고 본 드래곤이 크게 휘청거렸다. 급기야 관통된 관자놀이를 중심으로 본 드래곤의 뼈마디마디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칼라크가 놀라서 소리쳤다.
“어, 어, 어···! 이럴 수가 없는데···!”
“뭐, 뭡니까?”
부족장이 놀라자 정찰단장도 덩달아 놀랐다. 부족의 전설에서나 언급되는 본 드래곤이 설마 저런 간단한 일격에 마무리 되는 건 아니겠지?
설마는 현실이 됐다. 본 드래곤의 거체가 잿더미처럼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칼라크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순간 또 다시 빛이 번쩍하더니 이번엔 칼라크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정찰단장은 놀라서 딸국질을 했다.
* * * * * *
날아오는데 시간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목책 아래에 발을 내딛자마자 유선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헉헉··· 벌써 도착한 거야?”
“그래.”
유선의 안내만으로는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중에서 위치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마력폭풍이 일어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탄지공을 날려서 멀리 보이는 본 드래곤을 부수고, 술자로 보이는 지팡이를 쥔 녀석에게도 탄지공을 날렸다.
죽었겠지?
아무렴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확인해보자.
손날을 세워 명중여부를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부산스럽다.
“누구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나는 나를 포위한 오크들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얘네도 탑에서 만난 오크들처럼 침을 질질 안 흘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