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처음엔 도착하자마자 개 박살을 내려고 했다. 오크들은 대개 멍청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겐 주먹이 답이니까.
“인간족이 여긴 무슨 일이지?”
“뒤에 까마귀 수인족도 있어.”
“수인족과 사이좋게 지내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방금 그 수상한 빛은 뭐냐?”
그런데 예상외로 똑똑해 보인다. 대화가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의 대장은 어디에 있지?”
“인간. 우리들의 질문이 먼저다. 무슨 일로 이곳에 찾아온 거지? 수인족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건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의도로 봐도 되나?”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오크가 말했다. 서열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놈들보다 조금 더 덩치가 크고 갑옷이 화려한 오크를 찾으면 된다.
“흠.”
더럽게 크군. 내 정수리 위에 머리 두 개는 더 얹은 것 같다.
“내 것을 찾으러 왔어.”
“네 것? 무슨 소리지?”
나는 짧게 대답했다.
“드래곤의 사체.”
내 대답이 웃겼던 모양이다. 칼처럼 날카롭던 분위기가 연두부처럼 물렁해지고 대장 오크가 박장대소했다. 주변의 부하 오크들도 따라서 웃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넌 누구지? 정체가 뭐냐?”
“그럼 넌 누군데?”
“평원 오크족의 명예로운 바람. 경비 9단장 칼딘이다.”
칼딘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대장 오크가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오크가 저런 꼴을 하니 웃기다. 그런데 자부심이 넘쳐나는 모양새라서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경비 9단장이라···.”
하늘에서 봤을 때부터 규모가 제법 있어 보였는데. 예상대로 수가 많네.
“네가 경비 9단장이라면 이곳에 경비단이 몇 개나 있다는 소리지?”
“아홉 개.”
“그중에서 아홉 번째?”
“그래.”
칼딘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별 것 아닌 놈이었군.
“아홉 개 중에 아홉 번째면 꼴찌 아냐? 명예로운 바람이라니 전혀 안 어울리는데.”
내가 지적하자 칼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칼딘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숫자가 높을수록 더 강하다는 뜻이다. 멍청한 인간. 나는 경비단장 중 가장 강한 오크족 전사다.”
아하, 그래서 자부심이 가득했군.
“그건 상식 밖이네.”
“그래서 넌 누구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천외지에서 가장 강한 사람.”
내 대답에 칼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창대를 세워서 나를 향해 겨눴다. 그러자 주변의 부하 오크들도 따라서 내게 창을 겨눴다.
“누군가 했더니 이거 머리가 돌은 놈이었군.”
그는 더이상 대화를 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눈이 유난히 불거져 나온 오크에게 말했다.
“미친놈에겐 몽둥이가 약이지. 카르크. 포박해서 늑대들의 밥으로 줘라.”
“둘 다요?”
카르크라고 불린 오크가 고개를 갸웃 숙이며 물었다.
“그래.”
칼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크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나를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휘체계를 보니 칼딘이 지휘관이고 카르크가 지휘자 같은 건가?
군대의 중대장, 소대장과 비슷하다.
“지휘체계는 비슷하네.”
둘 모두 살려둘 필요는 없다.
나는 판단을 내리고 단숨에 오크들의 포위망을 뚫었다. 일부러 속도를 낮췄는데 그들에겐 총알처럼 빠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칼딘에게 접근했다. 여기까지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윽.”
옅은 신음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멀리서 봤을 땐 괜찮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몰골이 장난 아니다. 과연 오크는 오크구나. 더럽게 못생겼네.
“몽둥이는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 사용하는 법이지.”
나는 칼딘이 쥐고 있는 창을 빼앗았다.
“어, 어, 뭐야!”
칼딘이 떠듬떠듬 놀랐다.
“뭐긴 뭐야.”
“어떻게!”
칼딘은 내 속도에 놀라고 창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못생긴 놈이 인상을 찌푸리니 더 못생겼다. 칼딘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대체 언제 내 창을 빼앗은 거지?”
“언제긴 지금이지.”
나는 창을 휘둘러 놈의 턱을 올려 쳤다. 타격음이 울리고 놈의 턱뼈가 유리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카르그가 두 눈을 치켜떴다. 내가 말했다.
“나는 말이야. 굉장히 효율적인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목소리에 당혹감이 가득하다.
“시간을 허투로 쓰는 걸 싫어한단 말이지.”
나는 쓰러진 칼딘을 축구공 차듯이 차버렸다. 오크는 내게 몬스터나 다름없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손속을 둘 이유가 전혀 없다.
쿵.
칼딘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주변의 천막에 부딪혔다. 가까이 있던 오크 병사 몇몇이 쓰러진 칼딘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안위를 살폈다. 숨을 쉬지 않는 걸 보고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미친.”
카르그가 그 광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다.
“다시 물어볼게. 너희 종족의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지?”
카르그가 소리쳤다.
“당장 공격해! 공격! 죽여도 상관없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군.
카르그의 명령을 받은 오크들이 내게 창을 던졌다. 창날들이 우후죽순 내 몸을 찢어발길 것처럼 위협적으로 엄습해 왔다. 평소에 훈련을 잘 받았는지 동작들이 하나같이 일사불란하다. 도미노가 차례대로 쓰러지는 것처럼 순서대로 척척이다.
엄습해 온 창들을 피하자 근접한 오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휘둘렀다. 슬쩍 몸을 비틀어 피하고 보니 다른 오크들이 열을 갖춰서 공격을 대기하고 있다.
“더럽게 척척이네.”
얼마나 훈련을 했을까.
애석하게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내게는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제아무리 일사불란해도 유치원생들의 학예회에 지나지 않는다.
“죽어라, 인간!”
콧구멍이 커서 오백원짜리 동전이 들어갈 것 같은 코주부가 내게 창을 휘둘렀다.
푹.
나는 백미에게서 받았던 갑옷의 성능을 시험할 겸 그의 창을 그냥 맞아줬다. 창끝이 갑옷의 명치 쪽에 제대로 꽂히자 코주부는 자신만만 표정을 지었다.
“큭큭.”
콧구멍이 크니 콧소리도 크다.
“사방에서 공격하니 하찮은 재주를 부릴 수 없는 모양이군.”
카르그가 기세등등해서 말했다. 그 뒤로 창날 대여섯 개가 내 몸 위에 더 꽂혔다. 창이 꽂힌 부위를 확인하니 하나같이 치명적인 부위들이다.
가장 강한 놈들이 맞긴 한가 보네.
상처를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멀쩡하다. 느껴지는 감각도 기묘하다.
“신기하네.”
맞았다는 감각은 있는데 통증은 거의 없다. 게다가 느껴지는 감각이 실제 몸에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다. 진짜 갑옷을 안 입은 것 같잖아.
나는 마력을 이용해서 투구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던 갑옷을 목 밑으로 내렸다. 투명해서 거의 보이지 않는 만큼 오크들에겐 대량의 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마뱀이 진짜 좋은 걸 줬구나.”
백미가 준 갑옷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그 의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내가 멀쩡히 몸을 일으키자 코주부가 놀라서 소리쳤다.
“어어, 뭐야? 너 왜 멀쩡해!”
나는 어벙해 있는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놈의 머리가 몸에서 찢겨져 허공을 날았다. 주먹에 손속을 두지 않으니 결과가 참혹하다.
카르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뭘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어! 모두 당장 공격해! 쉴 틈을 주지 마!”
가만 보니 지휘체계가 진짜 비슷하네.
“감투를 쓰는 놈들은 하나같이 솔선수범 안 하는 게 공통점인가.”
나는 포위망을 뚫고 카르그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 직후 카르그의 앞에 서서 그의 목을 붙잡고 적당히 비틀어 돌렸다. 세 바퀴쯤 돌리자 그의 머리가 꽈배기처럼 몸에서 분리됐다.
“부, 부관님께서 저렇게 허무하게······.”
카르그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휙 던지자 오크들이 부산스럽게 떠들어댔다.
“언제 또 저기로 움직였어!”
“저, 전령을 불러라! 속히 본진에 보고해!”
나를 포위했던 오크들이 스멀스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영 멍청한 놈들은 아니었군. 과연 지성이 살아있는 오크인가.
“저기 지원군이 오고 있어!”
주변이 소란스럽다. 고개를 치켜드니 저 멀리 더 많은 오크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너무 소란을 부렸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바퀴벌레같이 많이 오네.
“아, 귀찮게.”
이참에 메테오를 사용해서 다 조져버릴까?
“아냐, 그건 너무 참혹하니까···.”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겁을 먹고 슬슬 도망치는 오크들을 보니 마음이 거슬린다. 소통이 되는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할 만큼 나는 무딘 성격이 아니다.
“딱 절반만 조져버리자.”
그렇게 결정하고 메테오를 시전 하려는데 갑자기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자 소란스럽던 주변이 쥐 잡아먹은 듯 조용해지고 창을 든 오크들이 홍해 갈라지듯 갈라져 있었다.
“뭐야?”
멀리서 갑옷을 잘 차려입은 오크가 다른 오크들과 함께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들이 꽤 많은데.”
눈에 힘을 주자 대충 신원이 파악된다. 마침 잘 됐군. 저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어. 지휘관들의 머리를 네다섯 개쯤 날리면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잘 차려입은 오크들은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넙죽 숙였다.
“하찮은 미물이 위대하신 존재를 뵙니다.”
눈치가 좀 빠른데. 그들은 나를 드래곤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무리는 아니지.
그들 무리 중 가장 값비싼 갑옷을 입은 오크가 말했다.
“항복하겠습니다.”
뭐야, 이렇게 간단하게?
“족장이 죽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수인족과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여. 부디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족장이 죽었다고?”
내 물음에 멀찌감치 서 있던 오크가 말했다.
“예. 위대하신 존재께서 던지신 빛에 맞아서 단번에 죽었습니다.”
가만보니 본 드래곤과 같이 서 있던 놈이다. 아, 오자마자 죽인 게 놈들의 족장이었나.
값비싼 갑옷을 입은 오크가 말했다.
“저희는 처음부터 족장의 의견에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인족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고 당연히 위대하신 존재의 시신을 훼손할 생각도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반대하지 않았지?”
“저희 평원오크족은 수인족과 달리 강한 자가 모든 걸 좌지우지 합니다. 종족 중에서 가장 강한 자의 의견을 반대하는 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상한 관습을 가지고 있군.”
“죄송합니다.”
머리를 땅에 닿을 듯이 조아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위대하신 존재여.”
“좋아, 노여움을 풀지.”
놈의 낯빛이 밝아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든 말씀하십시오.”
“구슬을 내놔.”
“얼마나 드리면 됩니까?”
“너희들이 가진 것 전부.”
* * * * * *
오크들은 사과의 표시로 구슬을 한 무더기 줬다. 드래곤의 사체와 구슬을 모두 건네받으니 너무 많아서 들고 갈 수가 없다. 백미에게 말해서 받기로 한 무구 중 남은 하나를 성능 좋은 아공간 주머니로 받고 드래곤의 사체와 구슬을 모두 챙겼다.
사체를 파는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수인족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없다. 당장 천외천으로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나는 팔고 남은 드래곤의 사체들을 모두 내가 챙기기로 했다.
그 뒤 유선이 중재해서 평원 오크족과 수인족 왕국 간의 외교 문제를 풀고 삼일이 지났다. 나는 약속한 대로 시조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