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제때 도착했군. 주은성.”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시조 드래곤이 나를 반겼다.
“노느라 좀이 쑤셔서 시간을 맞췄지.”
“이제 당분간 상당히 바쁠거야.”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어.”
시조 드래곤은 여전히 하늘색 구슬의 모양새였다. 공중에 두둥실 떠 있으니 마치 조명같다.
빛이 은은하네.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시조드래곤이 말했다.
“천외천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를 거야.”
“다르다고?”
“그래.”
포탈처럼 이동하는 것 아닌가?
“천외천의 황제가 보고 있어. 그는 낮의 소리를 듣고 밤의 기운을 읽을 수 있지.”
“미친 놈이네.”
“그의 눈을 피하려면 일반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이동할 생각이지?”
내가 묻자 그가 손을 펼치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다른 차원에 통로를 여러 개 열어서 병렬로 이동할 거야. 여러개의 돌무더기를 개울에 뿌려놓고 개울을 건너는 것처럼. 그걸 준비하느라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렸어.”
“굉장하네.”
나는 호들갑을 떨며 잠자코 그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지구에서 천외지로 넘어왔을 때가 생각나서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
“뭐지?”
“내 소환물도 같이 이동할 수 있겠지?”
지구에서 천외지로 넘어왔을 때 한동안 휴지를 소환하지 못해서 애먹었다. 내가 휴지를 가리키자 시조드래곤이 휴지를 보고 말했다.
“저 하프드래곤은 네게 계약으로 종속되어 있군.”
“그래. 가능할까?”
“가능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그럼 이건?”
나는 성마검을 소환해서 시조드래곤에게 보여줬다.
“그건 천외천의 물건이군.”
“맞아.”
시조드래곤은 뜸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천외천의 물건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이것도 내게 계약으로 종속되어 있는데?”
“그들의 기술력이 들어간 물건이야. 잘못하다간 황제에게 위치를 발각당할 수도 있어.”
시조드래곤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존재가 겁을 먹을 정도라니.
“그럼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경우는?”
시조드래곤이 휴지를 가리켰다.
“혼돈의 파편으로 그 검을 흡수해라.”
“혼돈의 파편이라면···.”
나는 휴지가 들고 있는 고대의 유산을 쳐다봤다. 지팡이는 여전히 음침해보였다. 내키지 않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보이니 별 수 없지.
“저걸로 어떻게 성마검을 흡수하지?”
“갖다대기만 하면 돼. 그릇으로 보호받지 않는 기운은 모조리 흡수하니까.”
“그릇으로 보호 받지 않는 기운?”
“그런 게 있어.”
시조드래곤이 말을 아꼈다. 나는 구태여 더 묻지 않고 그의 말대로 성마검을 혼돈의 파편에 갖다댔다. 휴지가 들고 있어서 굳이 내가 쥘 필요는 없었다. 성마검이 혼돈의 파편에 부딪히자 푸른 빛을 내며 흡수됐다.
“어!”
나는 작업이 무사히 끝난 후 소리쳤다.
“맞아. 가만 보니 성검이랑 마검이가 있는데···?”
뒤늦게 정령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지?”
불안해서 묻는 시조드래곤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서둘러 기운을 살폈다. 기억을 토대로 기운을 읽어서 그들의 존재를 찾자 여전히 살아있음이 확인됐다.
-크큭.
-어이, 깜짝 놀랐잖아요. 미리 말을 하라고!
“휴.”
나와 계약으로 종속돼 있어서 그런 건가. 성마검이 매개체에 지나지 않으니 사라져도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시조드래곤이 내 곤궁한 표정을 읽고 계속 물어왔다. 나는 그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런 게 있어.”
“문제가 없으면 얼른 내 앞에 서라. 시간이 없어. 천외천으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정해진 날짜에만 쉽게 열 수 있으니까. 거기 뒤에 있는 반쪽 드래곤도 함께 서라.”
나와 휴지는 시조드래곤의 말대로 그의 앞에 섰다. 휴지와 나란히 서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갑자기 빛났다. 빛이 무척 강렬해서 마치 초신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더럽게 밝군.
“눈부시다, 주인.”
휴지가 볼멘 소리를 냈다.
동감이야.
강렬한 빛에 대항해서 실눈을 게슴츠레 떴다. 빛이 잠들길 기다리고 있으니 시조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잊지 마라, 주은성. 마력을 읽어서 레드의 시조를 찾아야한다. 황제에게 들키기 전에. 최대한 빨리.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처럼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체가 폭죽처럼 만개하듯이 터졌다. 폭발의 기운이 온 세상천지를 감싸고 나와 휴지의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파레트에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빛은 점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더럽게 화려하군.
다음 순간 공간이 순차적으로 바뀌면서 나는 실버의 시조를 흡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기운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몸 안의 마력이 늘었어.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천외천에 도착한 뒤였다.
* * * * * *
하늘은 맑고 숲은 푸르고 땅은 변함없이 딱딱한 갈색이다. 하늘엔 태양이 있고 땅 위엔 나무와 숲이 있다. 나와 휴지는 수풀과 나무가 빽빽한 숲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주인. 우리 제대로 도착한 것 맞지?”
휴지가 말했다.
“여기가 천외천이 맞는 거지?”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하다.
“그러게. 이상하네.”
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연히 천외천에 도착하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왠지 이상하다.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모습인데.”
“어떤 모습을 상상했는데?”
“일단 이런 모습은 아니야.”
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지금까지 흔하게 봐왔던 평범한 흙바닥에서 평범한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천외천이라고 별 것 다른 건 없는 건가.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나···.”
그뒤 한동안 주변을 탐색해보았다. 나는 천외천의 환경이 다른 차원들과 많이 다를 줄 알았다. 신기한 식물이 존재하거나, 이상한 동물이 살아숨쉬거나, 땅과 하늘의 색깔이 특별하다거나 구름과 안개가 일반적이지 않다거나···. 여러모로 특별한 점이 있거나 차이점이 있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예상이 모두 틀렸다. 시련의 탑에서 겪었던 다른 차원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급기야 내 앞에 있는 나무는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다.
“주인. 구슬이 실수를 해서 평범한 차원에 도착한걸까?”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으니 왠지 찜찜하다. 지구에서 천외지로 넘어왔을 때도 문제가 생겼으니까. 아니, 그건 놈이 의도한 바였으니 문제는 아니지. 어쨌든 한 번 당한 게 있으니 이번에도 천외천이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다. 뭐, 그럴 확률은 낮겠지만······.
정말로?
나는 상념을 접고 행동에 나섰다.
“일단 마력의 파장을 읽어보자.”
블루의 시조드래곤은 마력의 파장을 이용해서 천외천에 봉인된 레드의 시조드래곤을 찾으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목적지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집중을 하고 파장을 읽어보니 라디오 전파처럼 수갈래의 마력들이 느껴진다. 나는 그 중에서 유난히 특출난 기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꽈배기처럼 베베 꼬여 있는데 꼭 심성이 뒤틀린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이게 시조드래곤이 말한 마력일까?”
내 몸 속에 잠들어 있는 시조들의 기운과는 다르다. 익숙한 기운은 전혀 아닌데.
“그래도 일단 이쪽으로 가보자.”
판단을 내린 나는 휴지를 데리고 천마비행술로 하늘을 날았다. 그 순간 그물에 걸린 것처럼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하늘을 나는데는 문제가 없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무 빠르다, 주인. 머리털이 빠질 것 같아.”
“이 근방이야. 거의 다 왔어.”
나는 낼 수 있는 만큼 속력을 높여서 날았다. 천외천의 환경에 호기심을 품고 주변을 둘러봐도 되지만 시조드래곤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최대한 빨리 레드의 시조드래곤을 찾으라고 했다. 황제에게 들키기 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력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주인.”
“사람들 밖에 없어. 특별한 장소로는 전혀 안 보이는데.”
숱많은 머리에 커다란 땜빵이 하나 나있는 것처럼 빽빽한 수풀 가운데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공터 안에는 복장이 두 부류로 나눠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상인들이고 한쪽은 습격하는 사람들인가.
깊게 보지 않아도 쉽게 유추된다. 누더기를 겹겹이 입은 쪽이 습격자들이고, 코뿔소처럼 생긴 괴물이 끄는 짐마차 쪽의 사람들이 상인들일 것이다. 나와 휴지가 공터에 발을 내딛자 습격하는 쪽의 사람들 중 유난히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 소리쳤다.
“누구냐!”
성질이 급하게 생겼는데 목소리에는 겁이 가득했다.
“뭐지?”
요상한 마력은 그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이거 잘못 짚은 건가. 아무래도 베베 꼬여있는 마력이어서 흔적을 따라왔는데 잘못 짚은 것 같다.
“누구십니까?”
그때 사람들 중 유일하게 여성인 사람이 나를 보고 말했다.
“혹시 공관에서 오신 분입니까?”
정중한 목소리에는 겁이 잔뜩 서려 있다.
혹시 내 전투력을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둘러보는데 정보분석기를 착용한 사람이 없다. 나는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까요.”
비유적인 표현인가 싶어서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게 신기한가?”
내가 황당해서 물었다. 천외천의 전투력 수준은 천외지보다 높다. 단순히 하늘을 나는 것만으로 놀랄 이유가 없다.
“그래요.”
“어째서?”
내 질문에 그녀는 왜 이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특수한 마법이 걸려있으니까요.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나는 기억을 더듬고 깨달았다. 아주 예전, 수인족들을 처음 만났을 때 수인족의 왕궁에도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하늘을 날지 못했고 내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유선이 놀랐었다.
“그렇군.”
나와 휴지의 등장으로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싸움을 멈추고 나와 휴지를 멀거니 쳐다봤다. 그들은 뒷걸음을 치며 충분한 공간을 만들었고 나와 휴지는 그들에게 둘러싸여 포위되는 모양새가 됐다.
어느 쪽 편을 들까.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상인들쪽이 좋겠어. 내 신원을 공관이냐고 물어보는 걸로 보아 그쪽 계통의 사람인 듯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중한 태도를 보아하니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순찰이 없다고 했잖아.”
“뭐야. 이럴 수가 없는데.”
“정보가 틀린 건가?”
습격자들이 소란을 피웠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공관의 인원으로 보는 듯했다. 공관이 천외천의 치안유지를 도맡아 하고 있는 건가.
“사는 곳이 별반 차이가 없네.”
“그럴 리 없어. 저 복장을 봐. 공관의 복장이 아니라고.”
그때 성질이 급해 보이는 놈이 제 편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습격자들이 내 복장을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럼 무슨 술수를 부린 건가? 일반인들은 하늘을 날 수는 없잖아.”
“혹시 모르지. 가능할지도.”
“제길. 오만 놈들이 다 흘러들어와서 감이 안 잡혀.”
그들은 안절부절했다. 혹시라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성질이 급해보이는 놈이 소리쳤다.
“정보가 틀릴 리 없어. 구슬을 얼마나 쥐어줬다고. 죽여! 일단 죽이자고!”